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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과 만덕산 백련사

추연욱 2026. 3. 13. 15:57

 

 

다산초당과 만덕산 백련사

 

 

 

다산초당(사적 제107)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귤동리 만덕산에 있다.

지금 다산초당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의 초당,

그 양 옆에 역시 기와집 동암과 서암,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천일각이 있다.

이들은 모두 폐허가 된 자리에 복원한 건물들이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초당을 복원했고, 1974년에는 동암과 서암을 복원하며 천일각을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정약용의 손길은 초당 옆의 연못과, 마당의 넓적한 바위, 집 뒤의 샘과,

그 뒤편 바위에 새겨진 石丁이란 두 글자 정도이다. 연못은 그가 마시던 샘이고 바위는 그가 차를 끓이던 곳이다.

 

茶山草堂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集子한 것이고,

동암의 현판 寶丁山房은 추사가 썼고, ‘茶山東庵은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정약용은 순조 1(1801) 邪學(천주교)에 물든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겨우 죽음을 면하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가을에 황사영(정약용의 조카사위)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서울로 불려가 다시 문초를 받았으나 혐의가 없었으므로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가 1801년 음력 11월이었다. 그는 이곳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처음 강진으로 와서는 강진읍 동문 밖에 있는 주막집 노파의 배려로 쪽방을  한 칸을 얻어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오막살이 주막집 뒷방에 四宜齋라는 당호를 붙이고 주로 喪禮를 연구했다.

사의재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 네 가지를 의로써 규제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1805년부터는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로 <주역>을 공부했다.

다음해 가을부터는 강진 시절 제자가 된 鶴來 李晴의 집에서 기거했다.

그러다가 귀양살이 8년째 되는 1808년 봄 이곳 다산초당으로 옮긴다.

 

회갑 때인 1821년에 지은 <自撰墓誌銘>에,

무진년(1808)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었다.

동서로 두 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저서로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산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山亭이다. 석벽에 丁石 두 자를 새겼다.”고 했다.

 

귤동 만덕산 기슭(茶山은 차가 많이 나는 만덕산의 別名이고, 정약용의 이다) 동백나무가 우거진 이곳에는,

원래 해남 윤씨 집안의 처사 윤단이라는 사람의 草堂이 있었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윤두서의 손녀이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그러므로 이 귤동마을 해남 윤씨는 정약용의 외가 쪽으로 먼 일가가 된다.

 

 

다산초당도, 초의선사가 1812년에 그렸다.

 

 

 

귀양살이가 여러 해 지나자 관청의 감시도 좀 누그러지고 주민들도 경계하는 마음이 풀려 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윤단의 아들 3형제가 정약용을 초당으로 초빙한 것이다.

정약용은 이 초당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짓고, 동암에서 기거하면서 독서를 즐겼다.

서암은 주로 윤단의 아들과 손자들로 이루어진 제자들의 거처했고, 초당은 교실로 썼다.

 

귤동마을에서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에 윤단의 무덤이 있다무덤 양쪽에는 석상이 있다.

19C에 들어오면서 지방 토호들은 왕릉의 문신 · 무신석, 양반 무덤의 호신석을 모방하여 자기네 조상 무덤에도 이러한 석인상을 세운다. 지방 토호들도 경제적 · 신분적 상승으로 문화적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방에 따라 다양한 석인상이 만들어졌는데,

특히 장흥지방에는 귀가 크고 볼이 넓으며 눈동자가 은행알 같은 석인상이 중심을 이룬다.

 

 

윤단의 무덥 석상

 

 

그는 다산초당에서 10년 6개월을 지냈다.

여기서 <牧民心書>, <欽欽新書>, <經世遺表> 등을 지었다.

목민심서는 다 써 갈 무렵인 1818년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 완성했고,

<흠흠신서>는 그 다음 해에 완성했다.

그는 여기서의 독서와 사색을 바탕으로 5백여 권의 책을 저술하여,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정약용(영조 38년, 1762~ 헌종 2년, 1836)

 

1. 경기도 광주 마현리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두물머리에서,

아버지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이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시 세력을 읽었던 남인 양반 가문이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였다.

이후 조정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남인)와 반대하는 벽파(노론)로 나뉜다.

 

2. 1770년 어머니를 여의고, 10세 때인 1771년에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아버지에게 경서, 사서 등을 공부한다.

3. 15세에 장가를 들어 처가가 있는 서울을 왕래하였다.

이 무렵 정약용은 누나의 남편인 이승훈, 큰형수의 아우인 이벽과 사귀고,

그들을 따라 이가환(성호 이익의 증손자) 등과 교유하였다.

 

4. 이해 정조가 즉위하면서 남인을 등용하자 그의 아버지가 벼슬을 하게되어 서울에 자주 드나들게 된다.

16세 때인 1777년 겨울,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자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를 유람했다. 

호남에 와서 적벽과 무등산을 유람하고 둘째 형 약전과 함께 화순읍 근처에 있는 동림사에서 "얼음을 깨고 세수하며" 공부했다.

3년 후에는 아버지가 경상도 예천군수가 되자 영남지방을 유람하였다.

 

5. 1782년 21세 때 서울에 정착하고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한다. 이듬해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1784년 이벽으로부터 처음으로 西敎(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天主實義>를 얻어보았다.

이로 인하여 그의 학문은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된다.

처음에는 서교에 상당히 몰두하였으나 과거공부에 바빠지고,

서교가 제사를 부정한다는 것을 알고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6. 1789년 28세 때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다.

33세 때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고, 34세 때 정삼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른다.

이 기간에 그는 정조의 명령으로 배다리[舟橋]를 만들고, 수원성 설계, 거중기를 만드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긴다.

 

7. 이 무렵 남인 시파는 다시 信西派와 攻西派로 나뉜다.

1795년 주문모신부 밀입국 사건으로 공서파가 정약용을 천주교도라고 탄핵하자,

정조는 그를 홍주목 금정도찰방으로 좌천시켜 비방을 피하게 한다.

 

8. 1797년 36세 때 다시 좌부승지에 임명되자 또 비방이 일어났다.

정약용은 정조에게 자기의 천주교 관계 시말을 적은 소를 올리고 사직한다.

그해 정조는 그를 다시 황해도 곡산부사로 보낸다. 2년가량 곡산부사로 재직하는 동안 군포를 줄이고,

호적을 고치고 교육을 일으키는 등 자신의 개혁적 이념을 실천한다.

1799년 38세 때 다시 형조참의가 되었고, 규장각 편찬사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9. 1800년 조선 제22대 정조(1776~ 1800 재위)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12세의 순조(1800~ 1834 재위)가 즉위하고 골수 벽파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조정의 주도권은 벽파로 넘어간다. 벽파와 공서파는 시파 신서파에 대한 반격에 나선다.

 

10. 이에 1801년 봄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셋째 형 정약종, 이가환, 이승훈 등은 죽임을 당했고,

다산과 둘째형 약전은 邪學(천주교)에 물들었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어 9달동안 머무르다가,

그해 가을에 황사영(정약용의 조카사위)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서울로 불려가 문초를 받고,

11월, 다산 정약용(1762∼ 1837)은 둘째 형 정약전(1758∼ 1816)과 함께 남도 귀양길에 올랐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18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약전은 마흔셋, 다산은 서른아홉 살이었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다산 유배길은 본디 삼남대로의 한 갈래다.

서울 崇禮門에서 내려와 천안에서 영남대로와 나누어져 전주, 광주, 목포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로 나주까지 내려와,

강진 · 해남의 이진항을 거쳐  제주도 조천항, 관덕정까지 이르는 1500리 길이다. 

 

11월 21일 그들은 나주 금성산 아래 밤남정[栗亭店] 삼거리주막에서 묵었다.

밤남정 주막거리는 지금의 나주시 북쪽에 있는 동신대학교 정문에서 삼도면 방향으로 600~ 700m 떨어진 곳에  있다.

날이 밝으면 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강진으로 가야한다. 

 

정약용은 훗날栗亭別 율정의 이별이란 시를 지었다.

 

茅店曉燈靑欲滅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起視明星慘將別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脈脈嘿嘿兩無言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强欲轉嗅成嗚咽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黑山超超海連空 흑산도 아득하다 바다 하늘 닿았건만

君胡爲乎入此中 그대는 어이하여 이 속으로 드시는고.

......

 

마침 주막 앞 나주 금성산은 한양 북한산과 그 모습이 흡사해 두 중년 사내의 마음을 울렸다.

 

월출산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 樓犂(검다)上石漸漸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있네 長得行人淚酒店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말게 莫向月南瞻月出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峰峰都似道峰尖

 

<耽津村謠>라는 제목의 칠언절구 20수 중의 하나이다.

 

형제는 그 다음 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그날 이후 다시는 살아서 만날 수 없었다.

형 약전은 150리를 더 걸어 무안을 거쳐 다경포로 간다. 여기서 배를 타고 500여리 바닷길을 건너서 소흑산도에 가야했다.

아우 정약용은 180리 길을 더 걸어 강진으로 가서 유배살이를 해야 했다.

 

약전은 흑산도 코앞 우이도에 잠시 있다가 본섬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대동여지도>에는 흑산도가 둘이 있다. 하나는 대흑산도이고 다른 하나는 소흑산도였다.

당시 소흑산도는 지금의 신안군 도초면 牛耳島였다.

현재의 소흑산도는 훨씬 멀리 떨어진 섬인데 可居島라고도 한다. 

 

약전은 흑산도 바로 앞에 있는 우이도에 잠시 있다가 흑산도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약용은 혼자 나주 영산강∼ 영암∼ 누릿재∼ 성전 삼거리를 거쳐 강진읍내에 도착했다.

 

약전이 동생 약용과  헤어진 후 16년째인 순조 16년(1816)에 6월, 59세의 나이로  흑산도 유배지에서 병들어 돌아갔다.

그는 이 귀양지에서 <玆山漁譜>라는 바다 생물의 생태를 연구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연구서를 편찬했다.

 

다산은 이 길을 두 번 걸었다.

그가 이 길을 처음 밟은 건 1801년 음력 11월 신유사옥에 연루돼 유배되면서 서울에서 나주까지는 형 약전과 함께 걸었고,

나주부터 강진까지는 혼자서 걸었다.

그리고 1818 9월 형 약전이 돌아간 2년 뒤 유배가 풀려 북한강 두물머리에 있는 집에 돌아가려고 이 길을 다시 걸었다.

이 율정주막을 지나게 된 다산은 돌아간 형님을 생각하며,

 

율정지별 수성천고 栗亭之瞥 遂成千古'

살아서는 증오한 율정점이여 !

문 앞에는 갈림길이 놓여있었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흩날려 떨어져 간 꽃잎 같다오

 

11. 강진의 읍성 동문밖 주막집에 쪽방을 얻어 4년을 지낸다. 다산은 그 쪽방 문틀에 四宜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다산은 강진에서 16년 9개월을 살았다.

 

다신은  <四宜齋記>라는 글에서 그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의재라는 것은 내가 강진에 귀양 가 살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마땅히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고 한다.

마땅하다[]라는 것은 의롭다[]라는 것이니 의로 제어함을 이른다.

연령이 많아짐을 생각할 때 뜻한 바 학업이 무너져 버린 것이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때는 가경(嘉慶, 나라 仁宗의 연호) 8(순조 3 1803) 겨울 신축일 초열흘임 동짓날이니,

甲子年(순조 4, 180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周易 乾卦를 읽었다.

 

안내 표지글을 옮겨 적었다. 편집자.

 

12. 1805년 겨울에는 다산은 강진읍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報恩山房(高聲庵),

13. 1806년 가을 강진의 선비 鶴來 李晴이라는 사람의 집에 이사가 3년 정도 머무르다가,

 

14.1808년 봄 만덕산 기슭에 있는 외가의 초가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은 초가의 이름이 다산초당이라 하였다.

그 초가에서 그는 유배가 끝날 때까지 10년 하고도 6개월가량을 살았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그 초가에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 一表二書 곧 <경세유표>, <목민심서>, <欽欽新書>와 그 밖에 다산의 저서 500여 권 대부분이 쓰여졌다.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15. 1818년 9월 9일 57세 때 18년간의 긴 유배가 풀려 고향 남양주시 與猶堂으로 돌아온다.

16. 1836년 75세에 세상을 뜬다.

 

회갑 때에 <自撰墓誌銘>을 저술하여 자신이 살아온 길을 자서전적으로 정리하였다.

<자찬묘지명>에서 "나의 학문은 한마디로 六經四書로 자신을 닦고,

一表二書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본말을 갖춘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는 경학과 실학을 모두 아울렀다고 할 수 있다.

500여 편에 이르는 그의 <與猶堂全書>는 대체로 64, 12, 시문잡조의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경학, 실학, 역사, 지리, 문학, 과학, 음악, 미술, 기독교 등 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의 저술 중 12서라 불리는 <經世遺表(1817)>, <牧民心書(1818)>는 유배지에서 완성되었다.

<경세유표>는 관제, 군현제도, 田制, 賦役, 貢市, 倉儲, 軍制, 課稅, 海稅, 馬政, 船法등 국가경영을 위한 제도론이다.

현실적 실용여부와 관계없이 기강의 원칙을 서술하여 舊邦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다.

<목민심서>는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하여 율기, 봉공, 애민을 3기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 , , , , 공을 6전으로 삼았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欽欽新書>는 유배지에서 초고를 잡아 마현의 집에서 완성하였다. 이 책은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經史에 근본하였거나 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이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고자 하였다.

 

이 밖에도 <周易四箋>1808년에 탈고하였고 <喪禮四箋>은 사의재 시절에 기고하여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 <시경(1810)>, <춘추(1816)>, <논어(1813)>, <맹자(1814)>, <대학(1814)>, <중용(1814)>, <역경(1816)> 등을 저술하였다.

 

 

■ 신유사옥 1801년의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정조는 즉위 24년(1800) 6월 28일 49세로 갑자기 죽는다.

정조 사후 둘째 아들이 열두살에 순조로 등극하고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그녀는 사도세자 사건을 주도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인 金龜柱의 누이동생이다.

정조 시절 잠시 세력을 잃었던 벽파들이 다시 세력을 장악하면서,

제25대 철종(1849~ 1863 재위)조에 이르기까지 60여년간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남인 계통의 천주교 신자들을 옹호한 채제공과,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를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한

정순대비는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를 두둔하던 벽파(노론계) 세력과 합세하여,

정조의 신임을 받던 시파들을 죽이기 위해 辛酉迫害가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자 수백명이 사형당하거나 귀양을 갔으며, 여러 남인 학자들이 연루되었다.

주문모신부,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 이가환, 이승훈 등이 순교했으며,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을 간다. 이때 시파(주로 남인) 세력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표면상으로는 천주교 박해사건이나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적 숙청이었다.

이 일로 노론 일파와 尊明排淸을 이념으로 내건 모화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순조의 할머니 집안인 안동 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3년 뒤 왕의 장인인 김조순에게 세도가 돌아가 안동 김씨 세도는 19C 초까지 이어졌다.

 

순조 27년(1827) 왕이 병약하여 세자가 정치를 대리하게 되자,

세자의 장인인, 조만영 등 풍양 조씨가 권력을 잡아 안동 김씨와 대립하였다.

이 싸움은 1840년 대 말 헌종(1834~ 1849 재위) 조까지 계속되었는데 대부분 조씨네가 권력을 잡았다.

 

1850년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순원왕후의 일가 등 안동 김씨가 다시 세도를 잡았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후 폐지되었다.

세도정치는 당쟁과 함께 조선의 힘을 극도로 약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정약용 남도유배길은 4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1코스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은, 다산수련원~ 다산초당~ 백련사~ 철새도래지~ 남포마을~ 목리마을~ 강진시장~ 사의재~ 영랑생가로 이어지는 15km다.

 

 

다산 유배길 150리 중에서 유독 발길이 머무르는 길이 있다.

 

 

 

 

다산오솔길은 강진의 다산수련원~ 다산초당~ 백련사에 이르는 산책로다.

 

좁게는 다산초당에서 만덕산 허리를 가로질러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2㎞쯤 되는 오솔길은,

다산이 유배 시절 인간적으로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 惠藏 스님(1742~ 1811)을 만나러 가던 길이다.

강진군에서 다산 유배길을 내기 한참 전부터 백련사 가는 길, 또는 백련사 오솔길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산책로이다.

넓게는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 백련사까지 4 남짓한 길을 가리킨다.

 

 

 

 

 

 

 

백련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에 있다.

백련사의 내력에 관해서는 정약용이 그 제자들과 함께 찬술한 <만덕사지>,

淸香堂 尹淮(1380~1436)가 세종 13(1432)에 지은 <만덕산 백련사중창기>,

지금 백련사에 남아있는 艮齋 趙宗著(1631~ 1690)가 쓴 백련사사적비등이 있어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1. 신라 문성왕 1(839)無住 無染禪師가 창건하여 만덕사라 불렀다.

무염선사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보령의 성주산문을 개창한 승려이다.

 

그런데 무염은 이때 중국에 유학 중이었는데, 절을 창건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후 언젠가 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었다.

 

2. 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절인 제21熙宗(1204~1211 재위) 7(1211) 圓妙國師 了世(1163~ 1245)가 중창하고,

수도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요세는 강진에 사는 崔彪, 崔弘, 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제자 元瑩, 之湛, 法安 등에게 1211년부터 1232년까지 80칸의 당우를 짓게 했다. 당시 牧伯은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했다고 한다.

 

절이 완성되자 요세는 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수행인들을 모아 실천중심의 結社를 맺는데,

이것이 천태종의 수행결사인 白蓮社이다. 白蓮社는,

고려 후기 불교 수행결사로 修禪寺(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조계종의 定慧結社와 쌍벽을 이루었다.

白蓮寺는 이렇게 白蓮社의 터전이 되었고, 이로 인해 거찰이 되었다.

그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 여덟 國師가 배출되었다.

 

3. 고려 말기부터 왜구들이 자주 침범하여, 바닷가에 있는 이 절도 큰 피해를 입었다.

4.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 조계종 資福寺 24사에 속하는 등 명맥을 유지했으나 척불론이 강한 시대라서 사세는 미미했다.

세종 12(1430)에 천태종의 영수이며, 都大禪師의 지위에 있던 行乎선사가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6년에 걸쳐 절을 복구하여 옛 모습을 얼마간 되찾았다.

행호선사는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절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추기 위하여 절 주위를 둘러 긴 토성을 쌓아 행호토성이라 하였다.

 

5. 그후 제17대 효종 때(1649~1659 ) 몇몇 건물이 중수되었고, 숙종 때 탑과 사적비를 세웠다.

6. 영조 36(1760)에 큰불이 나서 대웅전, 만경루 등 건물들이 대부분의 불타버렸고, 불상만 겨우 건져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그후 중창한 것이다.

 

7. 현존 건물로 대웅전과 시왕전, 나한전, 만경루,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사적비(전남 유형문화재 제151), 圓妙國師中眞塔이라 생각되는 부도가 있다.

 

 

백련사 경내에 들어서면 초입에 넓은 마당이 나온다

지금은 만경루에서 바로 절이 시작되지만 19C 중엽까지는 그 앞에 해탈문이 있었던 것 같다.

헌종 2(1836)에 작성된 <해탈문중수기가> 절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서 바라보면 저 위 높은 곳에 만경루가 있다. 만경루는 아래층 벽면을 널빤지로 막아 무슨 창고 같이 보인다.

보통 누각은 아래가 뚫려 절집으로 들어가지만 만경루는 아래가 막혀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들어가면 대웅보전, 명부전, 칠성각, 응진당이 남향으로 나란히 앉아있고, 주변에 선방과 요사체가 있다.

 

萬景樓 안에 걸린 현판 萬景樓員嶠 李匡師(1705~ 1777)의 글씨이다.

이광사는 당시 신지도에 귀양 와 있었는데 해남의 대둔사, 이곳 백련사의 승려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는 동국진체라는 서체를 완성한 사람이다.

그의 글씨는 구불구불하여 좀 우울한 듯하면서도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강직한 느낌을 준다.

그는 백련사의 大雄寶殿현판도 썼다.

이밖에 해남 대둔사의 大雄寶殿현판과 구례 천은사 일주문 현판도 이광사의 글씨이다.

 

만경루에 올라서 앞을 바라보면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 때 慧日선사는 이곳에서 본 강진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白蓮名寺勝 백련이란 절 이름 아름답고

萬德一山淸 만덕산 맑기만 하도다.

門靜鎖松影 문은 고요히 솔 그림자로 닫혀있어,

內客聞磬聲 객이 오면 풍경 소리만 듣네.

 

帆從海上去 돋단배 바다 위로 떠가고

鳥向花間鳴 새들은 꽃 속에 날며 우짖네.

坐久忘歸路 오래 앉아 돌아갈 길 잊은 채

殊無塵世情. 티끌세상 속정은 모두 사라지네.

 

현재의 대웅보전은 영조 36(1760) 21일 수백 칸의 건물이 불타고 뒤에 2년에 걸쳐 중창한 건물이다.

대웅보전은 높은 축대 위에 우뚝 서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삼존불은 주존이 석가모니불이고, 동쪽이 약사여래불, 서쪽이 아미타불인 듯하다.

불상들은 대웅전 공간에 비해서 작은 편이다. 불상들은 얼굴이 너무 넓고 입과 코는 너무 작아 얼굴의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듯하다. 영조시대 조성된 불상이다.

 

후불탱화는 삼존불을 한 폭에 그렸다. 화기 부분이 훼손되어 언제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1773에 제작된 삼장탱과 기법이 같한 것으로 보아 상장탱과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불단 오른쪽 후벽 상부에 신라의 명필 김생이 썼다는 萬德山白蓮寺현판이 걸려있다.

이 현판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읊었다.

 

문에는 김생 글씨 붙어있고 / 누각에는 道甫(이광사의 ) 글씨 걸렸는데,/ 세월 오래니 가짜인가 의심 가고/ 이름 무거움이 헛되지 않음을 알겠네. 門帖金生筆/ 樓懸道甫書/ 世遙疑有贋/ 名重覺無虛

이 시로 보면 이때에도 김생의 글씨란 것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 白蓮寺事蹟碑(보물 제1374)는 명부전을 지나 북서쪽으로 가면 빈터에 있다. 높이 4.47m이다.

龜趺(비받침)는 고려시대에, 碑身과 이수(비머리)는 숙종 14(1688)에 조성했다.

비문은 숙종 7(1681)에 홍문관 수찬이었던 艮齋 趙宗著(1631~ 1690)가 지었다.

 

<만덕사지>에 따르면 이곳에는 고려 때 사람 崔滋(1188~ 1260)가 비문을 지은 원묘국사 부도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비신이 조일전쟁 때 파괴되고 돌거북과 비머리만 남아있었는데,

坦機라는 스님이 남은 재료를 이용하여 그 자리에 사적비로 다시 사용한 것이다.

 

고려 돌거북은 수염을 늘어뜨리고 두 눈을 씩씩하게 부릅뜨고 아래 윗니를 맞물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돌거북은 여의주를 물지 않았다. 보존상태도 좋은 편이다.

 

 

*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51)은 절을 에워싸듯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절 앞의 숲이 있고, 백련사사적비에서 더 서쪽으로 가서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에 펼쳐지는 숲은 더욱 장관이다.

이곳의 동백나무들은 고목이어서 둥치가 기둥만큼 굵고, 잎이 길어서 침침한 숲을 이루었다. 3월 말 전후에 꽃이 핀다.

 

* 백련사사적비를 지나 서쪽으로 행호토성 넘어 동백나무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백련사부도가 있다.

원묘국사중진탑으로 생각된다. 오륜탑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공 모양의 탑신석에 특이하게도 염주를 걸어 놓은 듯한 연주문 장식이 있다. 지붕돌은 조선 전기 석등의 지붕돌 모양이다.

이 밖에도 길 아래에 부도 네 기가 더 있는데, 모두 중진탑을 조형으로 한 후대의 작품들이다.

 

圓妙國師 了世(1163~ 1245)에 대해서는 최자가 지은 <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幷序>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요세는 경상도 의령의 속현인 新繁縣의 호장 서필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천태종 계통의 절인 합천 天樂寺에서 출가하여 均定에게 천태교관을 배운 후 꾸준히 수행하여 큰 덕망을 쌓았다.

23세 때 僧選에 합격하였다. 이렇게 그는 천태종의 귀족 승려가 되었다.

이때는 무신의 난(1170) 이후 왕권이 약화되어 왕실과 밀착되어 있던 천태종 세력도 점차 약해져 가고 있었다.

 

36세 때 개경의 고봉사에서 열린 설법회에서 대중들을 크게 제압하여 이름을 떨친다.

곧 서울을 떠나 전국의 절을 순례하며 수행하던 중 普照國師 知訥(1158~ 1210)을 만나 함께 지내며 지눌의 권고에 따라 정혜결사에서 조계선을 닦기도 했다.

요세는 지눌과 비슷한 시기에 승과에 합격했으며,

개경의 사찰에서 열린 법회에 참가했다가 부질없는 논쟁이나 일삼는 당시 불교계에 대한 문제의식도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천태교학자로 정혜결사의 선교융합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념적으로는 止觀의 터득, 실천적으로는 참회의식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은 결국 전라남도로 가면서 길을 달리한다.

지눌은 송광산(조계산) 修禪寺(송광사)로 가 조계종을 창시하고(1200),

원묘국사는 천태종을 중흥할 사명을 자각하고 천태종 수행으로 돌아왔다.

1208년부터 남원의 귀정사, 月生山(월출산)藥師蘭若 등을 전전하면서 천태종 부흥에 힘썼다.

이때 그의 고명을 들은 耽津(강진)의 최표, 최홍과 이인천 등 세력가들이 그를 만덕산으로 초빙했다.

이들의 청에 따라 희종 7(1211)부터 만덕산의 옛 신라 절터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1216년에는 80여 칸의 절집을 완성하였다.

조계종 수선사가 무신정권의 지원으로 중창된데 비해 백련사는 최표 등 강진 토호 및 농민들에 의해 중창된 것이다.

 

1221년에는 白蓮社를 설치하여 수행에 몰두했으며 1232년에는 보현도량을 개설하여 수행결사의 체계를 세웠다.

이리하여 白蓮社는 지눌의 정혜결사와 쌍벽을 이루며 성황을 이루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義天(1055~1101)이 창시한 천태종이 고려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전국에 세력을 떨칠 때에,

중국의 천태대사가 활동하던 강남 천태산과 비슷한 기후 풍토를 가진 남해안 지역에 그 세력 기반을 닦아 이른바 천태 三岩寺라는 진주 靈峰山 龍岩寺, 광양 白鷄山 雲岩寺, 송광산 선암사를 개창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세는 신도가 보시한 물건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옷 세 벌에 밥그릇 하나만 지녔다.

지눌과 혜심이 무신정권과 결탁한 것과는 달리 요세는 “50년간 개경 땅을 밟지 않았다고 할 만큼 중앙의 지배자들을 멀리했다.

이렇게 白蓮社는 초기에는 중앙의 지배권력과 결탁하지 않고 지방 민중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러나 백련사의 성장은 곧 지배권력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최씨정권은 자가 이념으로 수용한 조계종의 근거지를 송광산 수선사로 확정하게 되자,

이 지역이 중요하게 되어 자가의 封地로 삼고 배후 세력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니 요세로서는 조계종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최씨정권에 밀착하든지 아니면 그에 저항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했다.

결국 원묘국사 요세는 도반 사이인 보조국사의 권유를 받아 오히려 천태종의 세력 기반을 가지고 조계종에 협력하여 최씨 정권을 합리화하면서 그 세력 확장에 동참한 듯하다.

요세의 말년에는 왕은 요세에게 선사라는 호칭을 내렸고,

해마다 선물을 보냈다. 사후에는 국사를 추증하였는데, 이는 백련사와 지방 세력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뒷날 원묘국사의 수제자 靜明國師 天因(1205~1248)이 조계종 제2세 진각국사 慧諶(1178~ 1234)의 문하에 나아가 조계종지를 공부한다.

이 과정에 당시 최씨 정권의 집정자인 최우의 두 아들 萬宗萬全(뒤에 최씨 정권의 3세 집정자 崔沆)과 법의형제가 된다.

이로보아 천태종은 조계종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24583세로 입적하여 국사로 추증되었다. 시호를 圓妙, 탑명을 中眞이라 했다.

천태종의 방대한 교리를 대중이 일기 쉽게 간추린 <三大部節要>라는 책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전하지 않는다.

 

지눌의 수선사는 돈오점수, 정혜쌍수를 수행의 요체로 삼았다.

백련사에서는 참회하여 죄를 멸하는 참회멸죄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淨土求生에 전념하고 염불선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다.

수선사는 어느 정도 높은 근기를 가진 중생을 대상으로 했고,

반면 백련사는 근기가 낮고 업장이 두꺼워 자력으로는 해탈할 수 없는 범부를 교화의 대상으로 하여 좀더 대중적인 면이 강했다.

 

無染(801~888)은 속성은 김씨이다. 호는 無住, 법명은 무염, 無量으로 무열왕의 8대손이다.

할아버지 대까지는 진골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육두품으로 강등된다.

성주사터에 있는 <郎惠和尙白月葆光塔碑>難得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6두품을 뜻한다.

 

그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승려의 길을 택하게 된다.

12세에 오색석사에서 출가하여 法性의 제자가 되었다.

법성은 당나라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한 사람으로 무염에게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 주며 당나라 유학을 권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화엄학이 크게 성행하였으므로 무염은 부석사의 釋澄을 찾아 <화엄경>을 공부한 뒤,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는데, 풍랑을 만나 흑산도에서 표류하다가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돌아온 일도 있다.

 

헌덕왕 13(821)正祖使를 따라 당나라로 가서 城南山 至上寺의 화엄강석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 무렵 당나라는 화엄학보다 선종이 크게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佛光寺如滿을 찾아 선을 배웠다.

깨달음이 깊어지자 여만은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에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하면서 칭찬하였다 한다.

 

그 뒤 무염은 麻谷山 寶澈和尙을 찾아 법맥을 이어받고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20여 년 동안 보살행을 실천하자 스님의 이름은 중국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렀다.

 

문성왕 7(845)에 귀국하였다.

보령의 호족 김양이 烏合寺에 머무르기를 청하자 오합사로 와서 성주산문을 개창한다.

오합사를 성주사로 이름을 바꾸고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고 40여 년 동안 교화하였다.

또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를 지냈다.

 

88888세로 돌아가니 시호는 郎慧, 탑호는 白月葆光이다.

성주사터에 최치원이 쓴 <郎惠和尙白月葆光塔碑>(국보 제8)가 있다.

 

郎惠和尙은 중국 선종의 개조인 달마의 10세손이다.

달마(?~ 528) 慧可(478~ 593) 僧璨(?~ 606) 道信(580~ 651) 5弘忍(601~ 704)

6慧能(638~ 713) 7南嶽懷讓(677~ 744) 8馬祖道一 麻谷寶澈 聖住無染으로 선종의 계보는 이어진다.

 

무염은 흥덕왕 8(833)에 진해에 성흥사를, 문성왕 원년(839)에 강진 백련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때는 무염이 당나라 유학 중이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