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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 치술신모 · 치술령

추연욱 2026. 3. 3. 21:10

박제상 · 치술신모 · 치술령

 

 

 

1. 치술령 · 망부석 · 신모사지

 

 

■ 치술령

우리말로 '수릿재'로도 불리는 치술령 鵄述嶺(766.1m)은 울산광역시 울주군과 경북 경주시의 경계에 있는 고개다.

그 고갯마루를 오르고 내릴 때면 으례 전설이 굳어 바위가 된 망부석 두 곳을 만난다.

 

하나는 울산 망부석이고, 다른 하나는 경주 망부석이다.

이름도, 전설도 같은 바위다.

 

가파른 산을 올라 울산 망부석(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에 이르렀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이다.

 

바위 벽면에 '望夫石'이라 쓰여있다.

울산 사람들은 이곳 이 바위가 망부석이라 주장한다.

망부석 같지 않은 망부석이다.

 

 

정상부에 또 망부석이 있다.

이곳은 경주시 외동읍으로 경주시에서 주장하는 망부석이다.

망부석 같지 않기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바위 아래쪽에 기도하는 자리도 보인다.

 

 

 

'신모사지 神母祠址'라는 돌비가 있다. 

 

이곳에는 본디 鵄述神母 치술신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었다.

박제상의 부인 치술부인은 이곳에서 죽어 望夫石이 되었다.

 

부인과 함께 맞딸 阿奇, 세쎄딸 阿慶도 울다가 죽었다.

부인은 ‘치술령의 신령한 어머니’가 되어 남편과 그 지역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모권적인 무속신앙으로 재창조 된 것이다.

 

사당에는 치술부인과, 딸 아기와, 아경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 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 비석이 있는 자리가 그 사당터이다.

조선시대에 이 산 아래 두동면 만화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1206~ 1289)도 보았고,

조선 영조때 사람 성호 이익(1681~ 1763)도 <鵄述怨>에서,

"至今神母祠 지금 신모 사당이 있어,

蕙旂來依俙 향기로운 깃발 어렴풋이 나부끼네"라

읊은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있었을 것이다.

 

그후 언젠가 사당은 사라지고, 1999년 5월 이런 비석을 세웠다.

 

둘째 딸 阿榮은 어린 동생 文良을 보살펴야 했기에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영은 미사흔의 아내가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문량이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라는 전설도 있다. 

 

 

 

 

 

鵄述怨

 

李瀷(1681~1763) 

 

有身莫作忠臣婦 충신의 아내는 되지마시오.

夫去成仁婦失依 남편은 죽어 인을 이루었지만 아내는 의지할 곳 잃었네

婦去忘忘東海東 남편 떠난 동해 동쪽 멍하니 바라보니

婦哭兒啼怒拂衣 아내는 울고 아이 보채며 분노에 옷을 떨치네.

………  

 

鵄述嶺頭望朝暉 치술령 꼭대기 아침 햇살 바라보니

朝暉有來不見往 아침 햇살 비추건만, 간 사람 보이지 않고

淚灑西風向天飛 흐르는 눈물 서풍이 하늘을 향해 날리네.

………  

 

<星湖先生全集> 제7권, 海東樂府

 

 


2. 은을암


정상 망부석에서 국수봉을 바라보았다.
국수봉(603m) 왼쪽 안부에 은을암이 있다.

 

 

 

은을암 가는 길

 

 

 

은을암

 

 

 

■ 은을암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척과리에 있다.

은을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눌지마립간 1년(417) 박제상이 미해왕자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뒤 부인 김씨는,

동해가 내려대 보이는 치술령에 올라 남편을 기디렸다.

그러던 중 남편이 왜국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두 딸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때 시신은 망부석으로 변했고, 부인의 넋은 새가 되어 날아가 국수봉 바위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隱乙岩이다.

은을암은 '새가 숨은 바위'란 뜻이다.

그 뒤 이들의 충절과 정절을 기려 절을 짓고 은을암 隱乙庵이라 하였다.

 

 

 

은을암 영산전

 

 

 

사람들은 그 새가 날아 든 동굴에 제각을 짓고 용당이라 하여 모시고 있다.

은을암 용왕샘이다.

이곳에도 쌀바위전설이 있다.

 

 

또 그 새가 날아와 앉은 자리를 비조 飛鳥라 한다. 지금의 두동면 만화리의 비조마을이다.

 

 

 

3. 치술부인 김씨와 박제상 

 

■ 박제상의 아내 치술부인 김씨,

<삼국유사 왕력 제18 실성마립간> 조에 따르면, 그녀는 실성마립간의 딸이다.

그녀의 언니 아노부인은 눌지마립간의 비이다.

 

■ 朴堤上(363~ 419)은 (혹은 毛末이라고도 한다)은 신라 시조 혁거세의 후예로,

삽량주 수두리(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신라 제5대 파사니사금(80~ 112 재위)의 5세 손이고그 조부는 葛文王 아도이다.

아버지는 파진찬 勿品 물품이었다. 호는 관설당 觀雪堂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34세에 삽량주의 간(干은 수장)이 되었다.

대아찬이란 벼슬이 추증됐으며,

영해 박씨의 시조가 됐다.

눌지왕과 동서간이다.

 

<삼국사기>, 제45권, 列傳 제5, 17. 박제상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이라 하였다.

신라 왕족은 김씨이기도 하고 박씨이기도 하였다. 의상대사의 경우도 그렇다.

여기서는 익숙한 대로 '박제상'이라 쓴다.

 

 

신라 제19대 눌지마립간(417~458 재위)의 동생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간지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했고,

미사흔은 왜국에 인질로 간지 30년이나 되었다.

 

눌지마립간 2년,

당시 명망이 높고 외교에 능한 박제상은 왕의 명에 따라 고구려로 가 장수왕을 설득해 왕의 동생 복호를 데리고 온다.

 

"눌지마립간 2년(418) 왕제 복호가 고구려로부터 奈麻 朴堤上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왕제 미사흔이 왜국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왔다."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19 訥祗麻立干

 

 

박제상은 다시 왜국으로 가 미사흔을 데려와야 한다.

그는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율포(울산시 북구 강동면 정자) 갯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러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하기를 “잘 다녀오시오.” 하니,

박제상이 그를 돌아보며 “내 큰 사명을 띠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어찌 그대와 다시 만나보기를 기약할 수 있으리오.” 하며 떠났다.

 

왜왕은 고구려 왕과는 달리 교활하고 야만스럽다.

그래서 왜왕을 설득할 수는 없다. 고도의 전략을 세워 왕을 속여 탈출작전을 감행해야 한다.

박제상은 아내와 영영 이별을 이미 각오했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왜국에 남는다. 

그리하여 박제상은 왜국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한다.

 

 

 제 17대 나밀왕(내물왕)이 즉위한 36년 경인(390)에 倭王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이 신성하다는 소문을 듣고 臣등으로 하여금 백제의 죄를 대왕에게 고하게 하였으니,

대왕은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게 성의를 표하소서.” 하였다.

 

이에 왕이 셋째 아들 美海(미사흔이로고도 한다)를 왜국에 보내니 나이가 열 살이므로,

말씨나 행동이 아직 예절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에 內臣 박사람 朴娑覽으로 부사를 삼아 같이 보냈다.

왜왕은 이들을 억류해 두고 30년 동안이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 즉위 3년 기미(419)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여 이르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의 아우 보해(<삼국사기>에는卜海라 하였다)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여 특히 소신을 보내어 간청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 일로 해서 화친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내신 金武謁을 보좌로 함께 보냈더니 장수왕도 그들을 억류해 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

 

이런 상황에 왕은 동생들이 보구싶어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래서 박제상이 고구려로 가서 보해와 함께 도망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눌지왕은 보해를 만나 보자 미해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한다.

 

“마치 한 몸에 팔뚝이 하나만 있고, 한 얼굴에 한쪽 눈만 있는 것 같구나.

비록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잃은 대로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이에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탄 채 두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하고,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 갯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까지 쫓아 갔으나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간곡하게 남편을 불렀다. 하지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

 

미해를 탈출하여 고국 신라로 가게 하고,

박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를 모시는 좌우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 보려 하므로 제상이 나와서 말리면서 말했다.

 

미해공은 어제 사냥하는데 따라 다니느라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 때가 되자 좌우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때 제상은 대답했다.

”미해공은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소“

 

좌우 사람들은 급히 왜왕에게 달려가 고하자 왕은 기병을 시켜 뒤를 쫓게 했으나 따르지 못했다.

 

이제 왕은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라 왕자를 돌려보냈느냐“

제상이 대답한다.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이제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을 뿐인데,

어찌 이 일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은 노했다.

“이제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五刑을 갖추어 너에게 쓸 것이다.

만일 왜국 신하라고만 말한다면 후한 녹 祿을 상으로 주리라.

제상은 대답한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을 받지는 않겠다.

 

왜왕은 노했다.

제상의 발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벤 위를 걸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놓고 다시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

 

<삼국유사>, 1, 紀異 제1, 내물왕과 김제상

 


4. 벌지지

 

■ 長沙 伐知旨

화랑교 남쪽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고 “長沙 伐知旨”라는 입석이 있다.

이 일대를 ‘양지버들’, 주변의 모래밭을 ‘장사’라 한다.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이 고구려로 가서 눌지왕의 동생 보해를 구출하고,

다시 왜국에 볼모로 가 있는 미해를 구하기 위하여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왜국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내는 생전의 남편을 한번이라도 더 만나보기 위하여 뛰어갔으나 따라가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아내는 망덕사 문 남쪽 모래 위에 길게 들어누워 통곡을 했다. 그래서 이 모래벌을 장사라 한다.

 

또 부인의 친척 두 사람이 달려와서 부인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으나,

뻗친 부인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伐知旨’가 되었다. ‘뻗치다’의 음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양지버들’이라 부르는데 ‘양지뻗음’이 전음된 것이다.

 


 

장사 벌지지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이에 망덕사 남쪽 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다 하여 그 사장을 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伐知旨('뻗치다'라는 뜻) 라고 이름 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래 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

 

<삼국유사>, 제1권, 紀異 제1, 내물왕과 김제상

 

 

 

5. 박제상 유적

 

치산서원 鵄山書院(울산광역시 기념물)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은 박제상과 그 부인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정려 旌閭'는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 · 충신 · 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 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에 따라 세운 문이다.

 

 

치산서원 삼강문

 

 

 

望海門 망해문

 

 

 

思孝門 사효문

 

 

 

成仁門 성인문

 

 

 

치산서원 강당 관설당 觀雪堂

 

 

 

동 · 서재인 경의재와 영휘재

 

 

 

 

 

忠烈廟 충렬묘

충렬공 박제상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典祀廳 전사청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神母祀 신모사

박제상의 부인 금교 김씨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雙旌閭 쌍정려

박제상의 장녀 아기, 삼녀 아경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신라충신 박재상 추모비

 

 

 

충렬공 박제상 기념관

 

 



 

 

 

 

 

6. 효충사 孝忠祠(경상남도 기념물 제90호)

 

효충사는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박제상길)에 있다.

1960년 지역 독지가가 박제상의 생가터로 알려진 땅을 사들여 지은 30㎡ 정도의 사당이다.

이후 자치단체와 기업, 양산춘추계 등의 지원으로 지금의 건물로 개축됐다.

 

 

 

 

 

 

 

 

 

 

 

 

 

 

 

 

 

 

■ 효충사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9세손이자 영해박씨 시종조인,

박제상(362~ 418)과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공의 아들 백결 박문량이 나고 자란 생가터에 세운 사당이다.

 

……

 

공의 장렬한 죽음에 세종대왕은 신라 천년에 으뜸 가는 충신이다”라 하였고,

정조대왕은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 貞忠은 만세에 걸친다고 극찬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이곳에 세운 충렬사가 효충사의 전신이다.

1960충렬사의 옛터에 효충사가 재건되었으며,

사당 안에는 박제상과 아들 박문량의 위패와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위의 안내 표지글을 옮겨 적었다. 편집자.

 

※ 사당 안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 박제상 부자의 위패도 초상화도 보지 못해 아쉽다.

발돋움 하여 겨우 현판 "孝忠祠"만 찍었다.

 

 

 

 

 

……

 "눌지대왕은 이 말(박제상이 왜국에서 처형당했다는)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그에게 대아찬 벼슬을 추증하고,

아울러 그 가정에도 후한 상을 주고,

미사흔에게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게 함으로써 그 은혜를 갚게 하였다.

 

처음에 미사흔이 귀국하였을 때 왕은 六都(六村) 사람들에게 명하여 멀리 나가 그를 맞게 하고,

궁성으로 들어와 뵈옵자 왕은 손을 잡고 서로 울며 마침 주연을 베풀고 형제의 정의를 나눔이 극진하였다.

이에 왕은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며 그 뜻을 널리 선양하였는데,

지금 향악의 憂息曲 우식곡이 곧 이것이다.

 

※ 우식곡은 노래 제목과 배경 설명만 있고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45列傳 5, 17. 박제상.

 

 

■ 백결선생 百結先生

 

<삼국사기>, 제 48권 열전 제8, 百結先生 조에,

 

 "백결선생은 신라 제20대 자비마립간(458~479 재위) 때 사람이다.

어찌된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낭산 밑에 살았는데, 집이 극히 가난하여,

옷을 백 곳이나 기워 마치 메추라기가 달린 것 같았으므로, 이때 사람들이 그를 東里 백결선생이라고 불렀다.

 

백결선생은 영계기 榮啓期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모든 기쁨 · 노여움 · 슬픔 · 즐거움 · 불경스러운 일이 있으면 이를 모두 거문고로써 위로하였다.

 

어느 해 세모에 이웃집에서 떡방아를 찧으므로, 그 아내는 떡방아를 찧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떡방아를 찧는데, 우리만 홀로 이를 못하니 어찌 이 해[年]를 마치고 새해를 맞으리오?' 하니,

백결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목숨에 있고, 부하고 귀한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가는 것을 쫓을 수 없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를 상심하는가? 내 그대를 위하여 떡방아 찧는 소리를 냄으로써 이 슬픔을 위로할 것이다' 하고

곧 거문고를 타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냈는데, 이것이 세상에 전하여 대악 碓樂(방아타령)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영계기에 대하여는,

<공자 家語>와 <열자 列子, 天瑞>에 기록이 있다.

 

공자가 태산을 유람하던 중 은자 영계기(BC 571~ BC 474)를 만났다.

영계기는 사슴 갖옷[鹿皮]에 새끼줄을 허리띠로 삼고 거문고를 타자,

공자가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영계기는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사람이 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天生萬物 惟人爲貴 吾旣已得爲人 是一樂也,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낮은데 남자가 된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人以男爲貴 吾旣已得爲男 是二樂也,

 

사람이 태어나서 강보를 면치 못하고 죽기도 하는데 아흔 다섯까지 살았으니 세 번째 즐거움"

人生不免襁褓,吾年已九十五,是三樂也,

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어 영계기가 "가난은 선비에게 늘 있는 일이고, 죽음은 사람의 마지막인데 늘 가난하다가 인생을 마칠 것이니 어찌 걱정하겠소

夫貧者 士之常也 死者民之終也 處常待終 當何憂乎"라고 덧붙이자,

공자가 "맞습니다. 스스로 달관한 분이십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說苑>, 卷第十七 雜言, 17-27~28. 榮啓期三樂

 

 열자 列子는 전국시대(BC 403년~ BC 221년) 정나라 사람 이다.

 

 

<영해박씨 족보>에는 백결선생의 본명은 朴文良이며,

실성 마립간 13년(414) 박제상의 아들로 내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눌지마립간 때 아버지 박제상이 일본 사신으로 가 죽고,

어머니와 첫째 누나와 셋째 누나 둘이 어머니를 따라 자결하고,

둘째 누나 아영 阿榮의 손에 자랐다고 한다.

 

각간 이수현의 딸과 결혼하고, 관직에도 있었다.

자비마립간 21년(478)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귀향곡인 <樂天樂>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청렴하고 결백했으며 궁중으로부터의 일체의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핍한 생활을 즐기다가,

말년에는 왕에게 간신을 멀리하라는 6장의 상소문을 올린 뒤 종적을 감추었다고 전한다.

 

또 박문량의 아들이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스승이었다고 한다.

<금척지>라는 책을 지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영해박씨 족보>에만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고증되지도 않았고, 지금은 고증할 수도 없는 것 같다.

 

 

澄心軒은,

박제상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징심록 澄心錄>을 집필하기 위해 지었디고 한다.

 

 

 

梁山 澄心軒

 

徐居正(1420∼ 1488)

 

蒼翠玲瓏萬竹林 일만 대숲에 비취빛이 영롱하여

一軒雲物更澄心 온 누각 풍물이 다시금 마음 맑히네.

風吹細浪鱗鱗玉 바람이 가는 물결 일으켜 비늘마다 옥이요

月透疎簾徒徒金 달빛이 성근 발에 비쳐 부서진 금가루로다.

 

欲喚仙曺騎鶴去 신선을 부르자니 학을 타고 가버리고

已將佳句動龍吟 좋은 시를 가지고서 용의 소리로 읊조린다.

憑欄有思無人識 난간에 기대 가진 시름 아는 이가 없고

段段離愁夜向深 마디마디 이별의 근심 밤은 깊어만 가네.

 

 

 

 

 

 

 

박제상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