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가야문화유적 답사- 2023년 7월 9일 증보
■ 구지봉(사적 제429호)
김수로왕 탄생설화의 현장이다.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龜首峰이라고도 한다.
수로왕비릉이 있는 쪽이 거북의 몸이고, 서쪽으로 뻗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거북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곳을 잘라 도로를 내는 바람에 끊어졌다가 근래에 육교를 만들어 이었다.
지금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으로 건너갈 수 있다.
구지봉에는 1907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고, 구지봉 아래 <구지가>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천지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我刀干 · 汝刀干 · 피도간 · 오도간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後漢의 世祖 光武帝 建武 18년 壬寅(서기로는 42년이다) 3월 계욕일(3월 첫 뱀날)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龜旨(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殷나라 天乙(탕왕)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漢나라 高祖(유방)와 같다.
눈썹이 팔자로 채색이 나는 것은 唐나라 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虞나라 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首露(가장 높은 사람이란 뜻)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은 諡號다)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이라 하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낙동강), 서남쪽은 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위에 인용한 글은 <삼국유사>, 제2권 紀異 제2에 실려있는 駕洛國記라는 제목의 글이다.
저자 일연스님은 “高麗 文宗朝 大康(遼의 興宗의 연호) 年間에 金官知州事(김해) 文人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고 註를 달았다.
그러니까 <삼국유사-駕洛國記>는 1076년 금관주의 행정관인 知州事가 편찬한 책으로 一然이 그 일부를 <삼국유사>에 옮겨 적은 것이다.
■ 伽倻, 駕洛, 弁韓의 '변'은 모두 가라, 갈의 음훈차자인데 가라는 '分, 岐'의 뜻이다.
마한이 남한, 진한이 동한임에 대하여, 변한은 '가라한' 또는 '가라신한[弁辰]'으로 호칭되었는데,
‘변한, 가라’ 제국은 원래 진 · 마한의 中分적 위치에 있거니와 특히 낙동강 하류 분기지대에 있음으로 이 칭호를 얻은 것이다.
낙동강 하류는 강류가 여러 갈래로 분기됨으로 歧音江[가람, 강의 고어, 가람은 이에 연원됨]의 칭이 있다.
양주동, <고가연구>, 일조각, 1970,349쪽.
'加羅'는 城邑을 뜻하는 '가라로'의 표기로 보았다.
이는 '고구려' 또는 '구려'가 성읍의 이름에 기원하는 것과 한가지다. 가야는 가라가 구개음화한 것이다.
이병선,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 형설출판사, 1982, 81쪽.
■ 구지봉은 옛날에는 바다에 가까운 나즈막한 산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만을 막아 간석지로 만들어 지금은 그 앞에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 축제를 벌이기 좋은 곳이다. 신성한 제사터이자 신나는 놀이터였을 것이다.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에는 부족장들의 묘지였을 것이다. 지금 구지봉 머리 부분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고인돌 덮개돌에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구지봉석"으로 보아 조선시대 사람들이 고인돌에 대한 지식이 없어 구지봉 제단의 床石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구지봉은 뱀이 서려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뱀은 거북의 머리와 함께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성기신앙은 다산과 풍요를 비는 마음에서 나왔다.
따라서 이곳은 제의 장소로 알맞은 곳이다.
3월 계욕지일에 이곳에서 春耕祭나 풍어제를 지냈을 것이다.
이때 벌인 굿판은 출산에 대한 의례도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아이(수로)가 처음 나라를 열었다고 했다.
한 종족의 시조신, 또는 나라를 처음으로 연 왕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그들이 토착민이 아니고, 이주민이라는 것이다.
그 이주민이 토착 집단을 완전히 장악할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토착집단의 부족장[九干]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은 하늘에서 알로 내려온 신라 시조 혁거세가 6촌장들에 의해 추대된 점과 같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환웅천왕은 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늘에서 신단수를 타고 수직하강한다.
환웅으로 대표되는 고아시아족은 북방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북방유목민의 신화는 시조신 또는 시조왕이 하늘에서 수직하강,
남방농경민의 신화는 알로 태어난다.
하늘에서 알로 내려오는 것은 유목민이 농경민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서로 협력하여 나라를 연다는 것을 뜻한다.
1. 천손계 신화는 하늘, 산(나무) 등 높은 곳에서 낮은 인간세계로 수직하강한다.
몽골, 브리야트, 에벵키족, 스키타이 지역의 여러 종족 등 북방 유목민의 신화로 적석묘, 석관묘와 같은 지역이다.
2. 난생신화는 알, 바가지, 상자, 배로부터 나온다.
대만의 파이완족, 인도네시아 자바족, 타이족, 인도의 문다족 등 동남아 농경민, 황하문화권으로 지석묘와 같은 지역이다.
신라왕들은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등 유목민계 적석묘에,
동남아적인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다.
혁거세, 알지는 천손신화이면서 난생신화이다.
신라는 육촌으로 시작한다. 정씨, 손씨, 최씨, 배씨의 조상은 모두 산에서 내려온다.
이씨의 시조인 알평은 표암으로 내려온다.
표암은 표주박 모양의 바위로 난생신화 계열이다.
그러므로 천손계 5인과 난생신화계 인물 하나가 초기 신라 주민 구성비이다.
첫 임금을 양산 나정에 붉은 말이 알을 놓고 간다.
탄생지가 알평의 동네인 나정이다. 난생신화 계열이다. 메신저는 백마이다.
소수의 통치자들이 다수의 주민을 거느려야 할 때 말썽이 없으려면 통치계급이 백성들의 사유세계 내지는 사상체계를 흡수해야 한다.
로마식은 사상 체계가 아래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것이고, 게르만식은 그 반대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상이 들어올 때 로마식을 취한다. 주몽, 혁거세, 김수로 등이 그 예이다.
■ 낙동강 하류 지방에 있던 변한 12국에서는
서력기원 전후한 시기 철기문화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연맹왕국이 출현한다.
이들이 6가야로 불리는 가야연맹이다.
6가야연맹의 중심세력은 김해에 자리잡은 금관가야(구야국 또는 본가야)였다.
그 시조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금관가야국을 열고 왕위에 올라 다섯 가야를 통솔하여 초기 가야 연맹체를 이끌었다.
금관가야가 6가야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은 이 지역에 鐵이 많이 생산되고,
벼농사가 잘 되었으며, 해상교통을 이용한 대외무역이 활발한 까닭이었다.
특히 일본의 규슈[九州]지방과 가까와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소국들을 건설하였는데,
이들은 倭라는 이름으로 가야지방에 왕래하면서 교역활동을 전개하였다.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금관가야는,
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호태왕(391~412 재위) 군대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에 낙동강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했던 대가야는 고령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맹주로 떠오른다.
이때부터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전기가야와 구별하여 후기가야라 한다.
신라 제23대 법흥왕(514~540 재위) 19년(532),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제10대 구형왕 김구해(521~532 재위)가 왕비와 아들 셋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금관가야는 42년 나라를 세워 520년 만에 망한다.
금관가야로부터 주도권을 이어받았던 대가야도,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와 백제의 전쟁의 틈에 끼여 신음하다가,
낙동강 유역을 장악한 신라의 공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라 제24대 진흥왕 23년(562)에 망한다.
신라에 통합되었던 가야 사람들(김해 김씨) 중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주도한 큰 공을 세운 김유신 같은 인물도 있다.
구지봉에 수로왕을 비롯한 5가야의 시조가 알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알 5개와,
9간을 상징하는 용 9마리가 돌에 조각되어 있었는데, 수로왕릉으로 옮겼다.
지금은 이런 이상한 돌이 서있다.
■ 고인돌
깬돌 너덧개로 가로, 세로 2.5m, 두께 0.3~0.4m쯤 되는 뚜껑돌을 받친 바둑판식 고인돌이 한 기 있다.
뚜껑돌에는 “龜旨峰石”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 한다.
고인돌 덮개돌에 한석봉이 "구지봉석"이라 쓴 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고인돌에 대한 지식이 없어,
구지봉 제단의 床石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구남문은 수로왕비릉 정문이다.
■ 수로왕비릉(사적 제74호)은 수로왕릉과 조금 떨어진 구산동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둘레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조선 인조 25년(1647)에 세운 비와, 제사를 지내기 위한 몇 채의 건물들이 있다.
비에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 썼다.
■ 허황옥
建武 24년 戊申(48) 7월 27일에 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留天干에게 명해서 빠른 배와 준마를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神鬼干에게 명하여 乘岾(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사진은 MBC TV 드라마 <철의 제왕 김수로>에서 빌렸다.
망산도(진해시 용원동)/ 이건 필자의 사진이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許이고 이름은 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蒸棗(신선이 사는 곳에 있는 좋은 과일)를 찾고,
하늘로 가서 蟠桃(반도는 곧 仙桃, 이 복숭아는 3000년 만에 한 번씩 열린다고 한다)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신(신부를 수행하는 하인)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이 가까웠다.
왕후는 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 비용으로 쓰게 했다.
공주가 타고 온 배의 돛과 깃발은 붉은색과 주황색이었다.
당시 가락국 사람들은 돛은 원색으로 하고, 깃발은 달지 않았다.
인도의 종파들은 자기 집단을 표시하기 위해 붉은색과 주황색 깃발을 주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수로왕과 허황옥이 처음 만나 하는 대화에는 상당한 지식과 교양이 어우러져 있다.
신부 허황옥은 공주에 걸맞는 품위를, 신랑 수로왕은 왕자의 위엄을 보이고 있다.
또 수로왕은 신랑으로서 궁궐에서 나가 신부를 맞이했고, 신부는 대등한 위치에서 혼례를 치른다.
이들 신혼부부는 첫날밤을 임시 궁궐에서 지냈다.
이틀밤과 하루 낮을 보내는데, 이것은 유교식 혼례의 三日于歸를 지킨 것이다.
"삼일우귀"란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른 뒤 신랑이 먼저 떠나고 신부는 사흘 뒤 시집으로 오는 절차를 말한다.
공주 일행이 예물로 가지고 온 물건들은 비단, 능라 같은 옷감과 금, 은, 옥 같은 보배였다.
초기 철기문화가 시작되는 후진적 농경사회인 가락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물건들이다.
수로왕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토착세력과의 결혼을 거부한다.
이것은 왕위가 안정되고 지배권이 강화되었음을 뜻한다.
궁궐을 짓고 제도를 정비한 뒤에 간집단을 신하로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 허황옥은 자신을 阿踰陁國의 공주라고 소개했다.
Ayodhia는 갠지스강 상류인 Sarayu강변에 있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태양왕조가 있었다.
수우리야(태양 왕조)의 군주 Manu가 마련한 이 도시는 그의 아들인 힌두교 중흥 시조 Rama 탄생지이다.
정복할 수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땅의 주민들은 서기전 6세기 경 Khosal(Kosala)이란 왕국을 세우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성은 물고기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가락국 수로왕 비머리/ 가운대 태양이 보인다.
BC 317년에 일어난 마우리아 왕조(4~2C BC)가 갠지스강 중하류에 있는 파트나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당시 16개 나라를 통일하였다.
아소카왕 때에 이르러 북으로 아프가니스탄부터 남으로 마이솔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화권이 된다.
서기전 186년 숭가 왕조가 새로 일어나면서 수도를 아요디아로 정한다.
코살라국에 이어 두 번째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서기전 165년 쿠산왕조라는 기마민족 연합 집단인 박트리아인이 북으로부터 침입하여,
숭가왕국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아요디아는 2세기 동안 무정부 상태가 된다.
쿠산이 지배하게 되자 원래 이 지방을 지배하던 司祭 계급과 왕족들은 쫓겨나게 된다.
서기 78년 불교신자인 카니시카왕의 등장으로 다시 불교가 지배하게 된다.
9세기 회교도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는 힌두교 성지로 유명하다.
김병모 교수는 쿠산 왕조의 지배시에 쫓겨난 아요디아의 왕족,
사제 계급의 사람들은 중국의 서남쪽 보주 땅으로 이주하였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崇善殿誌>의 기록과 “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란 비문(현재의 비석은 仁祖 25년(1647년)에 세웠다)과 보주땅의 쌍어문이다.
그리고 서기전 3세기 때 아소카가 운남 지방 대리국에 왕자를 보낸 일,
보주에 허씨 집성촌이 현재에도 있는 점을 들고 있다.
태국의 도시 Ayuthya는 13세기에 생긴 도시라 하여 부정하고 있다.
* 보주는 지금 사천성 안악현 땅이다. 허황옥의 생존 기간인 1~2세기에는 後漢이었고, 蜀이라 불렀다.
▪ 보주지방에도 쌍어문이 있다.
사천지방 제기 받침, 운남성에서 발견된 한 나라 때의 벽돌(사원 건축에 쓰인 것), 무창의 구리로 만든 그릇 바닥 등에 보인다.
■ 허황옥은 AD 32년에 태어났다.
BC 165년쯤 허황옥의 6대 또는 7대 선조들이 고향인 아요디아를 떠났을 것이다.
이들은 사라유강을 따라 하류로 흘러 내려가 갠지스강 본류를 거쳐 갠지스강을 동류하여 뱅골만으로 해서 동뱅골에 이르면,
아삼 지방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온 Jamuna강과 만난다. 이 강의 상류는 중국 서남부인 운남성이다.
허황옥의 조상은 이 강줄기를 타고 대리국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後漢書>에, “광무 23년(47년) 촉 땅에서 토착민(南蠻)이 봉기하여 한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반란군 세력이 강하여 정부는 진압군을 파견해 진압하였다. 반란의 주동자와 700명을 江夏界(오늘날의 무창 지방)로 이주시켰다.”
“50년 후 또 토착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 주모자가 한군에게 항복했는데 그 주모자 이름이 許聖이다.”
'許'는 성이 아니고 세습되는 직업 무사이다.
※ 허황옥은 첫 번째 반란이 실패했을 때 강제 이주당한 지도자급 가계의 여인으로 그들은 정착했던 양자강 중류의 무창지방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상해 지방으로 간 다음 바다를 건너 김해의 가락국으로 갔다고 보았다.
허황옥이 도착한 곳은 主浦란 곳이다.
김해부 남쪽 40리 지점이라 하였다. 山外別浦津頭는 후일 별포로, 다시 주포로 승격된다.
지금 녹산면 생곡리 장각나루이다. 이곳에서 益山山城이 보인다.
■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예물로 바치는 행위는 한국 민속에는 없는 辟邪 행위이다.
이것은 미혼을 청산하고 결혼하려는 통과의례이다.
인도에서는 처녀들은 바지(kameei) 위에 원피스(salwal)를 입다가 성숙한 처녀가 되면 저고리(sattai)에 긴치마(pavadai)를 입는다.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폐백을 드린 곳이 高嶠이다.
<삼국유사>에 綾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명월산 줄기라 하였는데, 지금 명월산의 위치는 알 수 없다.
파사각
■ 능 앞 작은 전각 안에 파사석탑이 있다.
금관국에 있는 虎溪寺 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世祖 수로왕의 비 허황후 황옥이,
東漢 건무 24년(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하는데,
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바다를 건너 편하게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珠玉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곳을 主浦라 한다.
그리고 맨 처음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현이라 하고……
탑은 모진 4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은 매우 奇妙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神農本草>에 말한 ‘닭의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삼국유사> 제3권 塔像 제4 金官國 婆娑石塔.
파사석탑은 물론 파사석으로 만든 석탑이다.
<本草綱目, 명나라 李時珍이 1596년에 지은 책>, 石部에 “선박들이 이 돌이 나는 산 밑을 왕래할 때 그 돌을 사랑하여 더듬어 잡는다는 데서 摩裟石이라 한다.……파사석과 유사한 것이 있으니 돌을 물에 갈아 닭 벼슬의 피에 담아보아 물이 되는 것이 진짜다.……태우면 유황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이 점은 허명철이 이미 실험하여 진짜 파사석임을 증명하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불교> 참고)
탑은 현재 가장 아래층은 방형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나머지는 그저 돌덩어리를 쌓아둔 것 같은 모습니다.
이 탑은 鎭風塔이라 하여 후대 사람들이 이 탑의 돌을 가지고 항해나 고기잡이를 하면 파신의 노여움을 싸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몰래 조금씩 떼어가 이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일연스님은 이 탑을 보고 그 모습이 “매우 기묘”하다고 적었다.
수많은 탑을 본 일연스님이 기묘하다고 한 것은 까닭이 있다.
파사석탑은 파사석으로 만든 축소형 스투파이거나 스투파 상단 입주일 것이다. 원래 스투파는 거대한 봉분 모양이다.
인도 석굴 사원의 스투파라면 상단 부분이 넓고 하단 부분이 좁으므로 이 파사석탑은 거꾸로 엎어야 한다.
축소형 불상이 조각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불상시대(BC 5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의 것으로 보인다.
탑을 재배열 하면 구성과 형태가 인도의 스투파와 같다. 이점은 허명철님이 밝혔다.
차이티야(예배굴) 내부의 모습이다. 가운데 스투파가 있다.
파사석탑은 원형의 스투파 꼭대기에 있는 방형의 상륜 모습일 것이다.
이 탑은 원래 虎溪寺(고종 10년 1873년 폐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가, “허황후께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니,
허황후 능 곁에 두어야 한다.”고 하여 허황후 능 앞으로 옮겼다.
■ 수로왕릉(사적 제73호)
수로왕릉 정문 숭화문
홍살문을 지나,
2층누각, 가락루로 들어간다.
친절하게도 "東門入 西門出"이란 글을 써 두었다.
바라보아 오른쪽을 동쪽으로 친다.
가락루를 들어서서 내다보면
영신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숭신각 안에는 김수로왕 신도비가 있다.
"駕洛國首露王" 비 머리에 태양 무늬가 있다.
이 무늬는 아유타국 상징 무늬한다.
수로왕릉의 정문인 納陵正門
納陵正門 좌우 협칸 공포 사이 화반처럼 놓인 부재에,
가운데에 인도식 스투파를 두고,
두 마리 물고기가 머리를 마주하고 있다.
똑같은 구성의 그림들이 세개의 문 위마다 한 조씩 있고,
崇仁門에도 앞뒤에 3조씩 6조가 있다. 神魚라 한다.
왕릉 이외의 대부문의 건물들은 제사를 위한 시설이다.
숭정각 안에는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의 영정이 있다.
숭정각 안에 모신 수로왕과 왕비의 영정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에게 음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도산씨의 딸이 하나라 우에게 시집가서 우왕을 도왔다)이 夏를 돕고, 당원(唐媛-요임금의 딸 항아와 여영. 이들은 순임금에게 시집가서 순의 후예인 교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교씨를 일으킨 것과 같다.
중평 6년 기사(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지내고……",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후한 헌제 입안 4년(199)에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세우니 높이기 한 길이며 둘레가 300보인데 거기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首陵王廟라 했다."
"수로왕의 아들 제2대 거등왕(199~253 재위)으로부터 마지막 왕 제10대 구형왕(521~532)까지 330년 동안 매년 정월 3일과 7일, 8월 5일과 15일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구형왕이 나라를 잃은 뒤 문무왕 원년까지는 60년 동안에는 더러 제사를 빠뜨리기도 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 원년(661) 3월 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의 시조 구형왕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세종(구형왕의 맏아들)의 아들인 솔우공의 아들 서운잡간(김유신의 아버지 舒玄각간)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이에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 제사를 지내게 하라.'
그리하여 사당에 가까운 곳에 있는 좋은 밭을 내려 王位田이라 하여 제사와 사당 관리에 필요한 재물로 쓰게 했다.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 떡과 밥 - 차- 과실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 5일을 그대로 지켰다."
김수로왕(42~199 재위)과 왕비 허황옥(33~189)은 제도를 정비하고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이들 부부는 2대왕 거등왕을 비롯하여 아들 열, 딸 둘을 낳았다.
허왕후는 189년 157세로, 수로왕은 199년 1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수로왕릉은 흔히 볼 수 있는 원형봉토분이다. 왕릉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문종 때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고,
조선 세종 때 정비했다. 선조 13년(1580) 당시 영남관찰사이던 허엽이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조일전쟁 때 도굴당했고, 그뒤 다시 봉토를 높였다.
인조 25년(1647) 왕명으로 능 앞에 묘비를 세웠으며,
고종 15년(1878) 나라에서 숭선전을 중수하였다.
■ 봉황동 유적(김해패총과 함께 사적 제2호)
"그(김수로왕)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자였다.…….
(수로왕) 즉위 2년 癸卯(4년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新沓坪(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신답평이라 했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과 전당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과 옥사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甲辰(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 새 궁궐을 짓고 부지런히 정사를 보살피고 있을 즈음 수로왕의 왕자리를 빼앗으려는 도전자가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꾀 많고 교활한 사나이 석탈해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하니 왕(수로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뤄 보려는가?"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 봉황대는 금관가야의 왕궁터라 한다. 지금 이곳에 왕궁터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봉황동 일대는 중간에 우뚝 솟은 봉황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조개더미가 분포되어 있어 가락국 초기 생활 중심지였음은 분명하다.
■ 여의각은 여의라는 낭자의 정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사진/ 백일봉
여의각 안에 여의의 영정이 걸려있다.
여의각은 1973년 회현동 주민들이 이 사당을 건립하여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지낸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봉황동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보수정비하였다.
여의낭자와 세장군의 애틋한 사랑의 사연이 전한다.
금관가야 제9대 鉗知王(492~521 재위) 때 출정승의 딸 여의와 황정승의 아들 세가 살고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인 두 정승은 여의와 세를 낳기 전에 이미 사돈간이 되기로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그후 지체와 세력이 더 높아진 출정승은 마음이 변해 딸 여의를 사내아이처럼 꾸며 세와 함께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여의는 사내아이처럼 꾸몄지만 자라면서 여자임을 감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세는 여의를 의심하여 여의에게 소변 멀리 누기와 멀리 뛰기 시합을 제의했다. 이를 눈치 여의는 자신의 본색을 감추기 위해 달아나 버렸다.
결국 여의는 세에게 자신이 여자임을 털어놓았고,
둘은 사랑하게 되었다. 출정승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둘을 약혼시켰다.
그후 어느날 세가 가락국을 침입한 신라군에 맞서 싸워 나라에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왕은 세를 사위로 삼았다.
세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으나 왕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의는 왕의 사위가 된 세를 잊지 못하였고 그 괴로움에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세 역시 여의를 잊지 못하다가 곧 죽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세의 아내인 공주 역시 세상을 비관하고 출가하여 불도를 닦다가 세상을 떠났다.
여의각 현판에
"菁南濟峯"이란 관지가 있다.
또 사람들은 여의와 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어 여의목과 황세목이라 이름지었고,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를 얹어 여의돌과 황세돌이라 했다.
황세돌과 여의돌
그리고 두 사람과 인연이 있는 곳을 기리며 망해대라 하던 산 이름을 여의대로 고치고 제각을 지어 위령제를 지냈다.
여의대라는 산은 이제 봉황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김해패총은 김해 회현리패총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봉황동이지만 옛 이름은 회현동이다.
김해패총은 190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처음 발견하였다.
그후 1914년부터 1935년까지 6차례나 발굴하였다.
1914년부터 17년까지 3차례 발굴하여 보고서도 내지 않고 있다가 1920년 다시 조사하여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돌로 만든 유물, 짐승 뼈로 만든 유물, 토기와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貨泉이란 新나라(8~ 25) 王莽이 10년에 발행한 화폐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김해지역은 가락국 성립이전부터 중국과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김해패총을 1세기경에 형성된 것이라 하였다.
또 석기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었으므로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이론은 광복 후에도 줄곳 인정되어 오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밝혔다.
또 조개무덤 속에서 탄화된 쌀도 한 주먹 나왔다.
한반도의 쌀농사가 시작된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요다.
1935년 발굴조사에서는 조개무지 아래층에서 고인돌과 독무덤, 돌널무덤, 움집자리 등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김해패총은 앞선 시기의 무덤터와 이후 조개더미로 이루어진 생활유적지 등 2개의 문화층이 겹친 삼한시대의 유적지임이 밝혀졌다.
김해패총
아곳에서 출토된 김해토기
■ 수릉원에는 "茶祖 普州太后 許黃玉像"과,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차나무인 '장군차' 나무가 있다.
차[茶]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2대 흥덕왕 3년(828)> 조에,
"……12월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김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하였다.
차 마시는 풍속은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곳은 지리산 쌍계사 근처이다.
허황옥이 차나무를 가지고 왔음이 분명하다.
騎馬人物形土器(국보 제275호)
騎馬人物形土器(국보 제275호)
높이 23.2㎝, 폭 14.7㎝, 밑 지름 9.2㎝/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분산성(사적 제66호)
항아리, 또는 화분처럼 보여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만장대는 봉수대다.
대원군의 글씨 萬丈臺
왼쪽의 대원군 낙관
해은사 대왕전에 모신 수로왕과 왕후의 영정
이 그림은 지금은 없어진 聖祖寺에서 가지고 왔다 한다.
남방불교의 스투파다.
불상 아래쪽에 있는 부조들은 힌두교의 신들이다.
우리나라 탑의 상층기단에 있는 팔부신중과 같다.
MBC 드라마 <철의 제왕 김수로> 촬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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