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산~동래읍성 우중도보-2010년 7월 28일 수요일
도시철도 장전동역에서 시작했다.
* 윤산전망대에서 본 회동수원지
■ 윤산
안개 속에서 새참 파티를 열었다.
* 시시골 쪽에서 본 윤산
■ 동래읍성터(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 안락동 · 명륜동 · 칠산동 · 명장동에 걸쳐있다.
<고려사> 兵志 조에, 현종 12년(1021)에 동래군성을 수리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이 동래읍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동국여지승람> 읍성 조에, 李瞻의 記를 인용하고 있는데, 고려 우왕 13년(1378) 元師 朴葳라는 사람이 8월 19일 축성에 착공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했다고 하였다. 왜구의 침탈이 심해지고 동래현도 여러 번 침탈을 겪게 되자 박위는 일찍이 김해부사로 있을 때 망산성을 쌓아 왜구를 크게 물리친 경험을 바탕으로 성을 수축했다고 하였다.
이때 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 우물이 6개가 있다고 했다.
그 전에도 성은 있었을 것이다.
삼한시대 동래 지역은 변한 12국에 속하는 거칠산국 · 장산국 · 독로국 등 성읍국가가 있었으니 성도 있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운포에 고읍성이 있었는데. 남쪽은 석축, 서북은 토축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동래읍성은 여러번 왜구의 침입을 겪었다. 이에 따라 대대적으로 수축되었다.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 제1권에, 특히 경상도에 성을 많이 쌓았다고 했는데, 그 중에는 동래성도 들어있다.
1594년 4월 14일 일본군이 동래성으로 밀려들었다. 성 안에는 경상좌병사 이각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군사를 지휘했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기와 식량을 불태운 뒤 도망쳤다. 이각은 적이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고는 양산군수 조영규에게 군사 수백 명을 주고 나가 막으라고 지시하자 조영규는 적의 군사는 수만 명이어서 도저히 맞서 싸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이각은, “부사는 성을 지키시오. 나는 나가 원병을 보내리다” 하고는 재빨리 도망쳤다.
일본군 선발대 100여 명이 남문 밖에 글자를 쓴 팻말을 세웠다.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열어라"
송상현은 "戰死易, 假道難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고 나무 팻말에 써서 성 밖으로 던졌다.
조총을 쏘아대며 달려드는 2만 명과 활과 돌멩이로 맞서는 2천 명의 싸움은 결과가 뻔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판단한 송샹현은 객관으로 나가 전투복 위에 관복을 걸치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꿇어앉아 아버지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부채에 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大鎭不救 진을 구할길이 없사옵니다.,
君臣義重 군신간 의가 무거우니,
父子恩輕 부자의 정 소홀히 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송상현은 마침내 칼에 맞아 쓰러졌다.
지휘관이 죽은 뒤에도 여자들까지 나서서 기왓장을 던지며 마지막까지 분투했으나 모두 죽음을 당하고 성은 적의 손에 들어갔다.
* 동래부순절도(보물 제392호)
효종 9년(1658) 동래부사 민정중이 조일전쟁 당시의 전황을 그리기 위해 모아둔 자료를 숙종 35년(1709) 권이진 부사가 보충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어떤 화공이 그렸다.
동래부순절도는 그후 해가 거듭하면서 퇴락해가자 영조 36년(1760) 부사 홍명한이 화공 卞璞을 시켜 다시 모사하게 하고 장정한 후 충렬사에 남겼다. 현재 이 그림은 육군사관학교에 소장하고 있다.
하루 전인 4월 13일 새벽,
첨사 정발은 일본군의 규모가 큰 것을 보고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전선마다 구멍을 뚫어 침몰시켰다.
적은 부산진을 포위하고 정발에게 서신을 보내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했다. 정발은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성 안에는 군사들은 활을 쏘고 여자와 아이들은 화살을 날라오고, 돌멩이를 던지고 뜨거운 물을 퍼부었다.
해질 무렵 정발은 머리에 일본군의 조총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전열은 무너지고 일본군의 반격이 거세 끝까지 이곳을 지키던 군인과 백성 1천 명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조일전쟁 이후 성을 보수할 겨를이 없었던 듯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영조 7년(1731) 당시 동래부사 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이 성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관찰사와 함께 본디 있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둘레가 3.8km였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 구릉지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역인 평지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과 암문이 있다.
서문을 心成樓, 남문을 無憂樓, 暗門을 隱逸樓라 했다. 남문에는 일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洗兵門 과 뒤쪽의 朱鳥門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개 문에도 옹성을 만들었다.
장대와 망루도 세웠다.
성이 현재 남아있는 성터는 이때 쌓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었고, 서문과 남문 부근의 성곽들도 파괴되었다.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과 북문 주변에 복원된 성터가 남아있다.
북문 · 인생문 · 동장대 · 서장대 ·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 여장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 동래읍성 북문이다. 옹성이 성문을 두르고 있다.
밖에서 본 옹성
* 북문 아래에 장영실 공원이 있다. 장영실의 발명품인 측우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성을 따라 북장대로 간다.
* 북장대
북장대에서 본 복천동고분군
■ 3·1운동기념탑은 1995년 8월 15일 착공, 1996년 3월 1일 완공하였다.
1919년 부산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부산광역시에서 세웠다.
부지 2,310㎡ 탑 전체의 높이 21.5m, 좌대는 842㎡, 독립운동 모습을 새긴 원추형군상도의 높이는 6m다.
* 동래읍성 인생문의 누각은 한 칸이고 옹성에 한 칸짜리 보루가 있다.
일제강점기 없어진 것을 2005년에 복원하였다.
조일전쟁 때 이 문을 통해 피난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는 전설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문이라는 뜻에서 인생문이라 했다 한다.
편액은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에 있는 門名石을 탁본한 것이다.
복천동고분군으로 가는 길이다.
■ 복천동고분군(사적 제273호)
한국전쟁 때까지 이곳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그후 판자촌이 들어서고 주택지로 바뀌었다.
현재 외형상 고분의 흔적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주택 밑에 수많은 고분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서쪽 경사면은 1969년 9월부터 4년에 걸쳐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고분 10기를 발굴했고, 능선 동쪽 경사면은 1974년 9~10월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4기, 능선정상부는 1980년 9월부터 1081년 2월까지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27기를 발굴했으며 이후 지금까지 모두 113기 고분을 조사하였다.
대형 고분과 소형고분, 또 각각 형식이 다른 5종의 무덤 양식이 섞여있어 복잡한 양상을 띠고있다. 또한 가야 지역의 다른 고분군, 예를들면 창녕 교동고분군, 함안 아라고분, 고령 지산동고분군, 김해의 고분군들 보다 무덤양식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난다.
이곳의 무덤들은 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발전하는 양식을 보인다.
고분군이 있는 구릉 유리돔 안 야외전시관 53호고분은 구덩식돌덧널무덤, 54호는 딸린덧널이 있는 덧널무덤이다. 38호고분은 딸린덧널이 있는 덧널무덤으로 가야 무덤 중 순장이 확인된 가장 오래된 고분이다. 90, 91호는 독널무덤, 65호는 앞트기식돌방무덤이다.
축조시기로 보면 소형단곽묘, 대형다곽묘와 토광묘가 가장 빠르고, 그 다음이 석실묘와 토광묘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대형다곽묘가 만들어졌으며, 가장 늦게 소형수혈식석곽묘와 대형석실묘가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나온 유물은 9200점에 달한다. 토기 2500점, 금속기류 2720점, 유리구슬을 포함한 장신구 4010 점 등이다.
복천동고분군은 경주 다음 가는 남부지방 최대의 고분군이며, 경주 다음 많은 양의 유물이 나온 곳이다.
유물로 보아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기 전인 4~5C의 고분들로 보인다.
이 고분을 축조한 사람들은 BC 2C 이후 삼한시대 동래 지역은 변한 12국 중 독로국 · 거칠현국 · 장산국 · 내산국에 속했다가 금관가야에 속한 정치집단이었을 것이다. 이후 점차 신라에 영향권으로 편입되었다.
53호고분은 구덩식돌덧널무덤이다. 발굴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해 두었다.
* 복천동고분군 중 제7호 무덤에서 출토된 말머리장식뿔잔[馬頭飾角杯](보물 제598호)을 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각배란 본래 소의 뿔과 같은 동물의 뿔로 만든 것을 말하지만, 넓게는 흙이나 금속 등으로 뿔잔의 형태를 본떠 만든 것도 포함시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 · 가야 지역의 무덤에서는 여러 형태의 뿔잔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 뿔잔은 그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이다. 큰 것이 높이 14.4cm, 길이 17cm, 작은 것은 높이 12.1cm이며, 길이는 둘다 17cm다.
뿔잔의 밑부분 끝에 말머리를 만들어 붙였다. 날카로운 도구로 눈틀 간단히 그어서 만들었는데 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있다. 그 뒤쪽으로 조그만 다리를 2개 붙여 넘어지지 않게 하였다.
5~6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고, 사산왕조(226~651까지 번성된 이란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유물은 리이톤이라 하여 중동지역에도 많이 출토되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고분군과 박물관은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다.
박물관 입구에 이런 유물이 있다.
담벼락에 이런 설명이 있다.
■ 복천박물관은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복천분관이다.
복천박물관은 1996년 10월 5일에 개관했다.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부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2010년 1월 현재 7,568점을 전시하고 있다.
■ 동래읍성역사관
동래읍성 모형도가 전시되어 있다. 선으로 둘러싸인 곳이 성안이다.
* 동래읍성 서장대
이곳에는 여장(성가퀴)이 제대로 복원되었다.
치성이다. 지나오는 길에 3군데의 치성을 보았다.
暗門인가 생각했더니 아니란다.
■ 동래향교 정문 번화루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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