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경주남산 답사도보(2차)-2010년 6월17일

추연욱 2010. 6. 18. 00:00

경주남산 답사도보(2차)-2010년 6월17일

 

백일봉님, 비주류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남산 등산과 주변 문화유산을 답사했다.

오늘부터 제주도에서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는 비는 오지 않고 무더웠다.

 

 

나정(사적 제245호)

蘿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다.

기원전 57년에 여기에서 신라가 건국되어 935년 망할 때까지 993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2000여 년 전 한족과의 투쟁에 밀린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조선족의 이동 결과, 북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나라가 형성되었고, 남에도 칠십여 나라가 생겼다.

 

경주에도 이들 유이민이 들어왔다. 신라의 전신인 六村도 조선족의 이동 결과 생긴 한 집단이었다.

그 촌장들이 경주 일대를 지배하였다. 

이들 육촌의 촌장들은 국가의 필요성을 느껴 閼川 언덕에 모여, BC 57년 朴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하고 斯盧國(서라벌)을 건국하였다. 사로국은 6촌을 6부로 개편해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여 진한 12국의 맹주국이 되었다. 국왕을 선출한 알촌 언덕의 회의를 和白이라 하여, 촌장과 그 자제들이 참가하여 만장일치로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구로 성장하였다.

 

사로국이 형성될 무렵 경주 인근지역에도 소국이 형성되었다. 소국의 크기는 오늘날 군 규모 정도였다. 안강 · 흥해 · 기계 · 영천 · 경산 · 청도 등지에 음즙벌국 · 비지국 · 다벌국 · 초팔국 · 골벌국 · 압독국 · 이서국 등의 소국이 성립되면서 독자성을 유지해 나갔다. 이들 소국들은 철기를 사용하는 사로국에 의해 2세기부터 4세기 초까지 차례로 복속되었다.

 

사로국의 발원지인 경주는 낭산을 중심으로 사방이 금강산 · 선도산 · 남산 · 토함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그리고 북천과 남천, 형산강이 동서와 남북으로 흐르며 넓은 퇴적지가 발달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육부의 영역은,

월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북쪽에 있는 瓢岩을 포함한 경주평야의 중심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알천 양산촌이 있었다. 우두머리는 謁平이며,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왔다. 及梁部 이씨의 시조이다.

閼英井, 蘿井 등을 포함하여 그 남쪽에 펼쳐진 평야에는 돌산 고허촌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蘇伐都利로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왔다. 沙梁部 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나머지 촌들은 알천 양산촌을 기점으로 하여 그 서쪽에는 무산 대수촌이 있었는데, 우두머리는 俱禮馬로 하늘에서 伊山으로 내려왔다. 漸梁部 또는 牟梁部 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동남쪽에는 취산 진지촌이 있었는데, 우두머리는 智伯虎로 하늘에서 花山으로 내려왔고, 本彼部 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동쪽에는 금산 가리촌이 있었는데, 우두머리 祇陀는 漢岐部 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북쪽에는 명활산 고야촌이 있었다. 우두머리는 虎珍으로 하늘에서 금강산으로 내려왔다. 習北部 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신라의 육촌은 지금의 행정구로서는  경주시의 전역과 울주군의 斗東, 斗西, 農所, 울산시의 일부, 그리고 영일군의 烏川, 迎日 등이 포함되는 지역으로, 비옥한 토양과 하천, 그리고 산지와 해안을 아울러 갖는 곳으로 원시 국가의 발상지로 좋은 입지조건이었다.

 

<삼국유사>에 신라 건국신화가 전한다.

전한 지절 원년 임자 3월 초하룻날, 6촌의 촌장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에 모였다.

무리가 높은 언덕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에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샘 옆에는 흰 말 한 마리가 상서로운 그 빛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아이를 동천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그후 아이가 열 세살 되던 해(BC 57년) 어느날(<삼국사기>에는 4월 병신, <삼국유사>에는 3월 1일) 진한의 육부 촌장들이 모여 여섯촌을 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아이를 왕으로 받들었다. 이로서 새 나라 ‘서라벌’이 탄생한 것이다. 서라벌은 ‘아침해가 맨 먼저 비치는 성스러운 땅’이라는 뜻이다. 첫 번째 임금은 박혁거세 거서간이다. 표주박같이 생긴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혁거세라 하였다.

대궐은 나정 남쪽 위 지금의 창림사터에 세웠다.

 

소나무 숲 속에 있는 나정에는 아기의 몸을 씻었다는 우물과 기념비가 있었다. 뒤에 우물 위에 팔각의 제사시설 건물을 지어 지금 우물은 볼 수 없다.

기념비는 조선 순조 2년(1802년)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나정은 지금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인 황량한 곳이다.

발굴을 하고 복원은 하지 못한 채 여러 해 그런 모습으로 있다.

 

양산대와 나정 사이에 이 여섯촌 시조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 양산재이다. 

 

 

 

 

나정에서 본 나무들 

 

 

 

 

 

 

 

남간사터  

남간사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남간사에 살던 一念이란 스님이 元和(당나라 헌종의 연호) 연간에 <觸香墳禮佛結社文>이란 글을 지었는데 이차돈이 순교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이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 原宗興法 厭觸滅身에 그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 남간사터 당간지주(보물 제909호)

높이는 3.6이다.

 

예전에는 논 가운데 있었는데 지금 구역을 정비하여 평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당간지주의 뿌리를 볼 수 있었다.  

 

 

 

 

창림사터

이곳은 본디 박혁게세의 궁전이 있었던 곳이다. 그때 왕궁은 초가집이었을 것이다.

뒤에 절을 지어 창림사라 했다. 이 쌍귀부 바로 뒤에 누군가 버젓이 무덤을 썼다. 

과거에는 타래란도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쌍귀부 머리 하나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 창림사터 삼층석탑

높이 6.5m로 남산에서 가장 큰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 팔부신중상 

 

창림사터 삼층석탑 앙화- 경주박물관 

 

허물어진 절터에는 여기저기 주춧돌만 흩어져 있다.

 

 

남산길

 

  

 

 

 

 

 

 

해목령 바위 

 

 

 

 

 

 

 

 

 

 

 

 

 

상서장 

孤雲 崔致遠(857~?)의 발자취는 영호남의 여러 곳에 남아있다.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며 지냈는데, 어느날 아침 집을 나간 뒤 숲속에 갓과 신만 남겨놓고 사라졌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入山'이란 시를 지었다.

 

僧乎莫道靑山好 스님이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

山好如何復出山 산이 좋다며 어찌 산에서 나오려 하시는가

試看他日吾踪迹 뒷날 내 자취 보시게나

一入靑山更不還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

 

<삼국사기> 열전에 전기가 있다.

최치원은 경주 사람으로 자는 孤雲, 海雲이며 육두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최견일은 경문왕계 왕실과 친밀하였는데, 당시 왕실은 유학과 불법을 존숭하면서 宿衛학생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최치원은 경문왕 8년(868) 12세에 당나라 유학한 가장 어린 유학생이다.

 

신라의 사회적 모순은 전에 없이 격화되었다. 왕위를 빼앗으려고 살육전이 벌어지고, 사치와 낭비가 극심했고, 백성에 대한 수탈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민심은 신라를 등지고, 국력이 약회되었다.

육두품 지식인들은 체제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한 방법으로 당나라에 가서 빈공과에 응시해 그곳에서 재능을 발휘해 진출하는 길을 찾고자 했다.

 

열두 살 때 당나라에 보내면서 아버지가 “가서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당나라에서, 태학에서 儒學을 익혔고, 6년 뒤에는 국자감 학생으로서 진사의 대우를 받는 생도시의 賓貢진사시에 합격하였다. 876년 말단 지방관직인 선주 율수현위에 임명되었지만 고급 관료가 되기 위해 1년만에 사임하고 입산하여 시부와 策文을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경제적인 어려움과, 황소의 약탈을 피해 회남절도사 高騈의 휘하에서 4년 동안 감찰과 문한의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討格黃巢文>으로 문명을 날린다.

 

그러나 당나라에서의 출세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세계제국의 국제인이면서도 변방의 이국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최치원이 느꼈던 소와와 고독은 심각했다.

이국인의 차별을 뼈저리게 느끼고 고국에 돌아가 뜻을 펼치겠다는 생각으로 헌강왕 11년(885) 28세에 귀국하였다.

 

巫峽中峰之歲 내 나이 열두 살에

似入中華 살같이 갸날프게 중황에들어와

銀河列水之年 스물 여덟 살에

錦還故國 금의환향하는구나.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 최치원 조에,

 

최치원은……같은 연배인 顧雲과 좋은 벗으로 지냈다. 최치원이 귀국할 때 고운은 시를 지어 송별하였는데, 요약하여 말하면,

 

我聞海上三金鼈 내 들으니 동해 바다에 세 마리 금자라가 있고,

金鼈頭戴山高高 금자라 머리 위에는 높은 산이 있다고 한다.

山之上兮 珠宮貝闕黃金殿 산 위 구슬 궁궐에는 황금 궁궐이 있고 山之下兮 千里萬里之洪濤 산 아래는 천만 리 큰 바다가 있다네.

傍邊一點鷄林碧 그 곁에 한 점 계림이 푸르른데,

鼈山孕秀生奇特 금오산 정기가 뛰어난 인물을 낳게 하였구나.

十二乘船渡海來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文章感動中華國그 문장이 중화국을 감동시켜 놓았으며,

十八橫行戰詞苑 열여덟 살에 사원에 글재주를 겨루어

一箭射破金門策 한 번에 금문 급제하였구나.

 

처음에는 상당한 환영을 받는 듯했다. 이후 국왕의 측근인 시독겸 한림학사를 맡아 왕실이 일으킨 불교 행사의 각종 발원문과 왕명으로 <사산비명>을 지으며 경문왕계 왕실의 왕권강화에 참여하였다.

또 병부시랑이란 벼슬을 받고 뜻을 펴보려고 했지만 나라는 썩어 들어가고 시기하는 무리들은 그를 괴롭혔다. 889년 그는 중앙 정계를 떠나 大山郡(지금의 태인) · 부성군(서산) · 천령군(함양) 등지의 지방관으로 나갔다. 군수 시절 수리시설, 기민구제 등 민중의 고통을 풀어보려고 노력하였다.

 

894년 2월 時務策(귀족의 부패, 타락 폭로) 10여 조를 올려 시급히 개혁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시무책을 지은 곳이 바로 상서장이다. 이로인해 阿湌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조정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난세에 뜻을 잃고, 벼슬을 버리고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며 누대를 짓고 나무를 심고 시를 읊었다.

 

후삼국이 이미 쟁패가 벌어졌는데, 신라를 위하여 끝까지 애써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후백제니 고려를 택할 용단을 내릴 수도 없는 어정쩡한 처지에서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지식인이고, 사상가이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은 아니었다. 현실에 참여할 의지도 용기도 없었다.

그의 발길은 경주 남산, 가야산 해인사,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등지에 닿았다. 문경의 가은에 있는 백운대에도 최치원의 글씨가 있다.

 

 

 

 

 

임해전지(안압지 사젹 제20호)

문무왕 14년(674)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섬 3개, 동쪽으로 봉우리 12개를 만들었다. 이것은 신선사상의 삼신산과 무산십이봉을 상징한 것이다. 섬과 봉우리에는 진기한 동물을 기르고 아름다운 꽃을 심었다.

못가에는 임해전과 여러 건물들을 세워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하였으며,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귀한 손님을 맞이하면 연회를 베풀었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에 걸쳐 발굴한 결과를 근거로 정비한 것이다.

 

 

 

 

 

  

 

안압지 수구

 

 

반월성

반월성은 성곽을 두르고 전이나 궁을 세운 궁궐다운 최초의 궁궐이다.

제5대 婆娑尼師今 22년(101)에 2월에 궁성을 쌓아 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금성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궁성에는 여러 문과 月上樓, 望恩樓, 鼓樓 등의 누각과, 南堂, 乾元殿, 崇禮殿, 平議殿과 같은 堂殿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훨씬 후인 문무왕 때에는 더 많은 전각들이 지어져 안압지 일곽과 연결되어 전각, 官衙 등의 건물들이 즐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성 안에는 영조 14년(1738)에 축조된 석빙고가 있다.

 

이 성의 일대는 원래 瓠公의 집이었다.

석탈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계교를 써서 빼앗아 살았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보통 아이가 아니라 여겨 사위로 삼았다.

석탈해는 그후 4대 임금이 되었다. 탈해가 왕이 되자 이곳을 왕성으로 정하고 파사왕대 석벽을 쌓아 왕성을 마련하였다.

 

瓠公은 왜 땅에서 바가지를 허리에 매달고 바다를 건너와 ‘호’자를 붙여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왜에서 몸을 숨기려고 망명했을 것이다. 탈해 이사금은 즉위하자 호공을 大輔로 삼았다. 탈해와 호공 체제는 6부우두머리들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와 왕권을 강화하는 게기가 되었다. 

탈해가 서라벌에 왔을 때, 호공은 신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한에 사신으로 간 기록이 있다. 

 

하늘에서 본 반월성

 

 

 

반월성 둘레길

 

 

 

 

 

 

 

 

 

 

반월성 나무들 

 

 

 

 

 

 

  

 

 

 

 

  

 

 

 

 

■ 계림

 

계림 안에 <찬기파랑가> 시비가 있다.

 

열치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좇아 떠남이 아니냐, 새파란 내에

기랑의 모습이 있어라, 이로 냇가 조약에서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자.

아아, 잣가지 높아 서리 못누올 화판花判이여

 

하늘에 높이 뜬 달로 기파랑(기랑)을 상징했다. 시의 화자는 물에 비친 그 모습을 사모하여 냇가 조약돌에서 기랑이 생전에 지니셨던 마음의 한 끝자락이라도 따르고자 한다고 했다. 

"이로"는 지명인 듯하다. 거기서 지난날 기파랑과 추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파랑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고, 그래서 더욱 간절하다. 

달은 항상 보이는 달이 아니다. 구름을 열쳐야만 나타나고, 흰구름과 함께 떠나버린다. 

마지막 줄에서 기파랑의 정신이 무엇인가 밝혀진다. 그것은 높은 "잣가지"다. 또 기파랑은 화판이다.

화판은 꽃잎이거나. 고깔이거나 화랑을 상징할 것이다. 화판에는 서리로 비유한 시련이 닥칠 수 없다는 확신을 나타냈다.

 

기파랑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화랑임은 틀림없으며, 고매한 인격을 지녀 널리 숭앙받았을 것이다.  

 

경덕왕(742~765 재위) 때 승려 충담사는, 이미 죽은 화랑인 기파랑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은 숭고하다.

그러나 화랑은 이미 쫓겨났다. 그러니 이 숭고한 이상은 이루어질 수 없다.

화랑의 고매한 이상은 비장하게 표현하였다.

 

 

계림의 나무 

 

 

 

동부지구 사적지 

 

 

 

대릉원

대릉원에는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을 포함해서 23기의 고분이 있다. 이 무덤들은 모두 적석목곽분이다. 아마도 초기 김씨왕들의 무덤자리일 것이다.

본디 무덤 자리가 수없이 많았는데, 봉분이 있는 것만 남기고 지워버렸다.

1970년대 공원화 하였다.

 

* 황남대총은 동서 80m 남북 120, 높이 20mm의 낙타등 모양으로 북분, 남분이 연결되어 있다.

1973년 7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조사하였다.

남분에서 24,900여 점, 북분에서 16,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릉원 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