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동해안 1/ 불영사 · 망양정- 2021년 2월 14일
망양휴게소, 10시
부산 교육대학 앞에서 2시간30분을 달려왔다.
울진~ 현동 간 36번 국도 변에서 불영계곡
1. 불영사
불영사 일주문, 10시 45분.
■ 불영계곡 군립공원(명승 제6호)은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까지 15km의 계곡이다.
맑은 계곡과 기암괴석, 숲이 어우러져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적송이 많다.
근처에 천연기념물 제157호 굴참나무군락지가 있다.
불영교
이 바위 상단에 丹霞洞天
단하동천 丹霞洞天
"丹霞"는 해질 무렵 피어나는 아름다운 붉은 노을",
"洞天"은 산이나 내로 둘러싸인 경치가 아름다운 곳.
불영사 부도와 부도비
불영사 부도는,
조선 시대 불영사 주지를 지낸 養性堂 惠能 선사(1621~ 1696)의 사리탑이다.
그 옆에 있는 부도비에는 혜능선사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영조 14년(1738)에 세웠다.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면 작은 고개,
이 깊은 산골에 이런 넓고 아늑한 평지.
遊山西村
陸游(1125~ 1209)
莫笑農家臘酒渾 농가의 섣달 술이 탁하다고 비웃지 말게나,
豊年留客足鷄豚 풍년이라 손님 머물면 닭고기 돼지고기 풍성하다네.
山重水複疑無路 첩첩 산중, 겹겹 강물이라 길이 없나 했더니,
柳暗花明又一村 버들 그늘지고 꽃 밝은 마을도 있네.
부처의 형상이 비치었다는 연못을 주변으로 절집들이 평화롭게 펼처져 있다.
불영사 사젹비
■ 불영사는 울진군 서면 하원리 천축산 기슭에 있다.
동쪽에 삼각봉, 아래에 좌망대 · 오룡대,
남쪽에 향로봉 · 청라봉 · 종암봉,
서쪽에 부용성 · 학소대,
북쪽에 금탑봉 · 의상봉 · 원효굴 · 용혈 등 뻬어난 경관들이 빙 둘러 싼 너른 평지에 있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 의상대사(625~ 702)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때 의상은 26살이었고, 당나라 유학하기 전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믿기 어렵다.
경내에 남아있는 대웅보전의 기단, 삼층석탑 등 유물로 보아,
적어도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기에는 불영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379년 柳伯儒란 사람이 지은 <天竺山佛影寺記>라 책에 불영사 창건설화가 전한다.
의상대사가 서라벌에서 동해안을 따라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이곳 丹霞洞에 들어와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그 모습이 마치 당나라에서 보았던 인도의 천축산의 모습과 같았다.
또 맑은 연못 위에 다섯 부처님의 떠 오르는 형상이 보여, 금탑봉에 올라보니,
연못에 용 아홉 미리가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의상대사는 이 용들에게 법을 설하여 그들을 떠나게 하고 그곳에 절을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용들이 듣지 않으므로,
신통한 주문을 외니 용들은 비로소 바위를 뚫고 도망쳤다.
의상은 그리하여 이곳에 토굴 삼 칸을 짓고 구룡사라 하였다.
절 서편에 우뚝 솟은 바위가 연못에 비친 모습이 부처의 환영과 같아 후에 절 이름을불영사라 하였다.
이때 연못에 부처의 형상으로 비친 절 서편에 우뚝 솟은 바위를 佛影巖,
용이 산을 뚫었다는 곳은 龍穴
용이 살던 것을 오룡소라 하고,
불영사를 휘감아 도는 光川 계곡은 九龍계곡이라고도 한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이 다시 불영사를 향해 가다가 仙사촌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 오셨구나" 하면서 기뻐했다.
그뒤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이 돌아오신 곳이라 하여 불귀사라 했다.
의상은 이곳에서 9년을 살았으며,
뒤에 원효대사도 이곳에서 의상과 함께 수행했다고 한다.
조선 태조 5년(1396) 불이 나 나한전만 님고 몽땅 불타 버렸다.
그 뒤로도 여러 번 불이 나고 중건하기를 거듭하다가,
조일전쟁 때 극락전과 응진전만 남고 모두 불탔다.
광해군 원년(1609) 성원법사가 재건하면서 다시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그때 지은 것이다.
응진전, 대웅보전, 극락전, 관음전, 명부전, 조사전, 산신각, 칠성각, 황화당, 범종루 등 건물이,
부처의 모습이 나타났다는 못가로 빙 들러서 있다.
불영암
대웅보전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은 정면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대웅보전 벽 탱화에 "雍正三年乙巳"란 화기가 있다. "옹정 3년"은 조선 영조 원년(1725)이다.
이로 보아 대웅보전 건물도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선조 35년(1602)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고,
인조 7년(1629)에도 중수하였으며,
숙종 46년(1720)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1년(1750)과 순조 10년(1810)에 서까래를 보수한 이후,
몇 차례 수리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큰 변화은 없었다.
안에는본존 석가모니불과 문수 · 보현보살을 좌우 협시로 모셨다.
이 삼존불은 불영사의 600년 된 은행나무로 만들어 2002년에 새로 모셨다.
불영사 영산화상도(보물 제1272호)
석가여래 삼존불 뒤에 영산회상도가 걸려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을 그린 불화이다.
그림의 중앙에 법화경을 설하는 석가모니 부처를 크게 그리고,
그 주변으로 십대보살 · 십대제자 · 범천과 제석천 · 사천왕 · 신장 등이 둘러 선 구도로 그렸다.
이 영산회상도는 조선 영조 원년(1725) 광원 · 명준 · 순일 등 6명의 화원과,
스님들이 조성하였다고 화기에 기록되어 있다.
대웅보전 천정에는 옛 단청이 그대로 남아있다.
대웅보전 기단 아래에서 다섯 층 계단 양쪽 소맷돌에 돌거불 한쌍이 새겨져 있다.
마치 거북들이 대웅전을 짊어지고 힘을 쓰고 있는 듯하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불영사가 있는 이곳에는 火山이어서 기 불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물의 신인 용왕을 모신 것이라 한다.
대웅보전 벽화에 동자가 학을 타고 날아가는 그림,
그낭 지나칠 수 없다.
황화전
종무소
종무소 까만 대나무 담장이 있고,
안에는 백매화가 활짝 피었다.
대웅보전 앞 마당 가운데 있는 삼층석탑은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본디 황화당 옆에 있던 것을 197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창건 당시에 세운 것이라 하지만 삼층석탑의 전형양식에서 규격화한 모습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 세운 탑으로 생각된다.
높이는 3.21m로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제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산신각
명부전
의상전
응진전
응진전(보물 제730호)은 경내 서쪽에 남향하여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양 옆에 박공을 댔다.
자연석을 되는 대로 쌓은 듯한 기단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고,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중 가운데 칸에 문이 나 있고, 양쪽 두 칸은 벽으로 꾸미고 빛과 바람이 통하게 살창을 달았다.
안에는 중앙 한 단 높은 곳에 본존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죄우에 흙으로 만들어 구운 16나한상을 모셨다.
1984년 해체 · 보수할 때 마룻도리(기둥과 기둥을 가로질러 연결한 도리 가운데에서 가장 위에 놓인 도리) 밑 장혀(도리 바로 밑에 평행으로 받혀지는 부재)에서,
1716년에 쓴 상량문이 나왔다. 상량문에 따르면,
이 건물은 선조 11년(1758) 이후 다섯 차례 걸쳐 보수되었다.
그러니 그 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상량문에는 이 건물을 영산전이라 했다.
본디 영산전인 이 건물이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때부터 영산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범종각
칠성각
극락전
12시 40분, 불영사 일주문, 불영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仙遊亭
불영계곡을 끼고 달리는 36번 도로.
2. 망양정
망양정 주차장, 1시 20분.
■ 망양정은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에 있다.
望洋亭은 성류굴 앞으로 흐르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를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있다.
고려 때는 여기서 15km쯤 아래쪽인 기성면 망양리 해변 언덕에 있었다.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중종 13년(1518)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 부탁하여 중수하였고,
조선 철종 1년(1858) 울진현령 이희호가 郡承 임학영과 함께 현재의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으로 옮겨지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어수선한 시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57년 울진교육청이 지역인사들의 도움으로 1959년 중건하였다.
1979년 보수 정화하였다.
1994년 다시 보수하였으며, 2005년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망양정"의 ‘望洋’이란 이름은, 겉으로 드러나는 뜻은 ‘바다를 바라본다’이지만
깊은 속뜻이 있다고 한다.
<장자>, 秋水편에,
가을 물이 때가 되어(물은 봄에 나서 가을에 성하게 된다고 한다) 모든 냇물이 황하로 들어오니,
탁한 물결이 멀리 넘쳐흘러, 양쪽 기슭에 놓아먹이는 마소들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이에 河伯(황하의 神)은 기뻐하여 천하의 장관이 모두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北海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동쪽을 바라보니 그 물끝을 볼 수 없었다.
하백은 비로소 얼굴빛을 고치고 멍하니 若(북해의 신)을 향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골말에 ‘백쯤의 道를 듣고 천하에 자기만한 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니,
그것은 나를 두고 한 말인가 하오.
또한 나는 일찍 仲尼(공자)의 학문을 적게 여기고,
백이의 義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더니,
이제 당신의 그 끝없음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니,
만일 내가 당신의 문 앞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길이 大方家(大道를 얻은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소.”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우물에 구속을 받기 때문이요,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때(여름)를 굳게 믿기 때문이며,
옹졸한 선비에게 도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敎(墨子 등의 가르침)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자네는 냇물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자네의 못난 것을 아니,
자네와는 더불어 큰 이치를 이야기할 만하구료.
천하의 물로서 바다보다 큰 것은 없으니 모든 냇물은 끊임없이 여기로 들어와도 찰 줄을 모르고,
尾閭(바다의 동쪽에 있다는 바닷물이 새어 나가는 곳)로 끊임없이 새어 나가도 마를 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또 봄이나 가을을 따라 변하지 않고,
장마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니 이것은 저 江河의 물보다 많아서 그 수량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김달진 편, <莊子>, 고려원, 1989.
여기서 ‘望洋之嘆’이란 성어가 나온다.
‘망양지탄’은 ‘지금까지 알지 못한 위대한 것을 보고 감탄하며 자신의 좁은 소견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망양정은 예로부터 관동팔경 중에도 경치가 으뜸으로 꼽혔다.
고려 말 李穀(1298~1351)의 <東遊記>,
조선 광해군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李山海(1539~1609)의 <아계유고>,
古山子 金正浩가 1861~1864쯤 간행한 <大東地誌> 등 여러 문헌에 그 아름다운 경치가 소개되어 있다.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 제일가는 곳이라 하여 숙종(1674~1720 재위)은 “關東第一樓”라는 친필 편액과,
시를 내렸다.
肅宗大王 御製詩
列壑重重逶迤開 뭇 멧부리 첩첩이 둘러 있고
驚濤巨浪接天來 집채만한 파도는 하늘에 닿아있네.
如將此海變成酒 만약 이 바다를 술로 만들 수 있다면
奚但只傾三白盃 어찌 한갓 삼백배만 기울이랴.
正祖 大王(1776~1800 재위)의 어제시
元氣蒼茫放海溟 일기 창망한 때 바닷가로 내쳐지니,
誰人辯此望洋亭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恰如從目仙尼宅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을 구경하는 듯,
宗廟官墻歷歷經 종묘며 관창 담들이 뚜렷이 구분되어있구나.
登望洋亭看月 망양정에 올라 달을 보다
梅月堂 金時習
十里沙平望大洋 십리 평평 모래에서 넓은 바다 바라보니,
海天遼闊月蒼蒼 바다 하늘 아득한데 달빛 푸르네.
蓬山正與塵寰隔 봉래산 인간세상과 격하였으니,
人在浮藜一葉傍 사람은 물 위에 뜬 마름 한 잎에 사는 게지.
望洋亭
李山海(1539~ 1609)
枕海危亭望眼通 바다를 낀 높은 정자 전망이 탁 트여,
登臨猶足盪心胸 올라가 보면 가슴 속이 후련히 씻기지.
長風吹上黃昏月 긴 바람 황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
禁闕玲瓏玉鏡中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
조선 선조 13년(1580) 송강 정철(1536~1593)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이때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이어 동해안 관동팔경을 따라 내려오면서 그 마지막 여정에 망양정을 찾는다.
……
하늘의 끝을 못내 보아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이나 성난 고래, 뉘라서 놀라게 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고.
은산(銀山)을 꺾어내어 육합(六合)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곧 밤이 되니 풍랑이 고요해져,
부상 지척에 명월을 기다리니,
천길 서광이 보이는 듯 숨는구나.
……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바라보니 깊이를 모르니 끝인들 어찌 알겠는가.
명월이 천산만락에 비추지 않는데가 없구나.
<관동별곡>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1745~?) 등 조선시대 화가들도 그림을 남겼다.
단원 김홍도는 금강산 주변의 네 개 군을 그려 <금강산 사군첩>이라 하였는데,
관동팔경이 모두 들어있다.
이 <망양정도>는 현재의 자리로 옮기기 전, 기성면 망양리 해변에 있을 때의 모습이다.
■ 관동팔경
대관령 동쪽의 여덟 경승지로 동해 바다를 배경을로 한 정자, 누대, 절 등이 포함되어 있다.
북쪽에서부터
① 통천의 三日浦 ② 고성의 叢石亭 ③ 간성의 淸澗亭 ④ 양양의 洛山寺
⑤ 강릉의 鏡浦臺 ⑥ 삼척의 竹西樓 ⑦ 울진의 望洋亭 ⑧ 평해의 越松亭
등이다.
월송정 대신 흡곡의 侍中臺를 넣기도 한다.
시중대는 江原道 통천군 흡곡면에 있는 대이다.
이들 여덟 경승지가 언제 관동팔경이란 이름으로 정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때 안축의 <관동별곡>과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에서 그 연원을 찾기도 하지만,
'8경'으로 요약된 것은 아니다.
송강 정철은 '관동팔경'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산중을 매양 보랴 바다로 가자스랴"라 하면서 위의 '팔경' 중 월송정은 없고, 의상대가 들어 있다.
17세기 사대부 사회에서 기행의 풍류가 크게 일어나고,
18세기 기행문학이 보편회되면서 항간에서 '8경'으로 굳어진 듯하다.
겸제 정선(1617~1759)과 단원 김홍도는 관동팔경도를 그렸다.
겸재는 여덟 폭 화첩으로 그렸고,
망양정 현판은, 蔚珍文化院 附設 蔚珍歷史硏究所長 金成俊의 고증으로,
울진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李台榮이 1962년 초에 썼다고 한다.
<울진문화 제16호>
이에 앞서 망양정을 현재의 장소로 옮겨짓기 전에는,
숙종 16년(1690) 전에는 숙종대왕이 현판을 써서 眼原君에게 보내 달게 했다.
그런데 <大韓每日申報> 1910년 4월19일자 기사에 따르면 “망양정의 현판 글은 숙종대왕이 御製했는데,
그 정자가 훼손되어 철거한 후 그 현판을 고을 객사에 두었더니,
원산의 재무감독국 임원인 일본인 슈등정부(사이또 마사히로)가
재무 시찰차 왔다가 그 현판을 구경하고 가져갔다”고 하였다.
1시 45분, 망양정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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