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안동 나들이 2/ 월영교, 안동호반 나들길, 안동민속촌, 의성 김씨 종가 - 2021년 1월 24일

추연욱 2021. 1. 29. 19:20

 

 

안동댐, 여기서 늦은 점심, 2시

 

 

 

 

 

 

 

 

 

 

월영교

 

 

 

 

 

 

 

 

 

 

 

 

 

 

 

 

 

낙동강 한가운데(월영교 한가운데) 있는 월영정

 

 

 

상량문에 癸未年二月 二十七 日立柱上樑"

 

 

 

 

 

 

 

 

안동호반 나들길

 

 

 

 

 

 

 

 

안동대학교 뱍물관, "450년만의 와출" 전에서는

19989월부터 시작해서 19996월 말까지 “450년만의 외출전에서는,

안동시 정상동 고성 이씨 집안의 묘를 이장할 때 나온 부장품을 정리한 것이다.

시신이 거의 완벽한 미라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던 만큼 부장품인 옷가지와 주머니, 표주박, 실타래 등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를 선보였다.

 

특히 이응태의 묘에서는 형 몽태가 요절한 동생을 애도하여 부채에 남긴 시와 글,

"원이 아버지에게로 시작되는 부인이 남편에게 보낸 <사부가> 등 출토된 11건의 편지 가운데 상태가 좋은 7점을 전시했다.

 

2003128이응태부인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이응태의 묘 - 안동시 정상동

李應台는 명종 11(1551) 고성이씨 이요신의 아들로 무반가문에 태어났다.

본디 철성 이씨였는데,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고성 이씨로 바꾼다.

이응태는 키는 180cm 정도. 31세인 1586년에 죽었다.

 

유물 미투리(머리맡)는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다.

신발을 싼 한지에 내 머리 버혀……이 신 신어 보지도 못하고……로 보아 병든 남편의 쾌유를 빌며,

머리를 잘라 신을 삼았는데, 신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0년 전 시신을 덮은 한글 편지는 원이 아버지로 시작한다.

 

이응태의 부인은 옷으로 보아 키 160cm의 체격이다. 아들원이는 당시 5~6세였다.

이밖에 형 몽태가 쓴 11편의 시. 아버지가 몽태에게 주는 편지가 나왔다.

 

당시 전렴병이 돌았다.

매 사냥을 즐겼다.

응태는 장인을 모시고 살았다. 이응태는 죽기 직전 본가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편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넘편에게 편지에 자네라 썼다.

자네라는 말은 14번 나온다. 다른 곳에는 이런 예를 볼 수 없다.

이로보아 임란 전에는 부부가 모두 자네라는 말을 썼다.

이는 부부간 대등한 위치임을 말한다.

 

아들 성희(원이)는 진보 흥구리로 옮겨 살았다. 외가인 듯하다.

이곳에 성희의 무덤이 있다.

아래쪽에 무덤이 있는데, 어머니의 무덤인 듯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정상동에서 이응태 할머니의 미이라가 나왔다.

관에 회칠, 시신과 함께 넣은 향주머니 때문에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

 

정상동의 귀래정에 고성이씨 종택(임청각)이 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자손에게 재산을 균분상속하였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기 지배하는 17세기부터 남녀 차별 상속하게 된다.

제사는 아들 딸이 번갈아 가며 지냈다.

해남 윤씨에게서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법적(경국대전), 제도적으로 남녀평등이었다.

 

금계리에 김성일 종가 임청각이 있다.

 

김성일도 장모를 모시고 살아 처갓집을 물려받았다.

옥산서원이 있는 경상북도 옥산은 이언적의 처가이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장자이면서도 밀양의 처가에 산다.

아들 김종직의 고향이 된다.

 

임진왜란 후까지 처가살이가 일반적이다.

아이가 크면 본가로 돌아온다.

 

 

 

 

 

 

 

 

 

 

 

 

 

 

 

 

 

 

 

 

 

 

 

 

 

 

 

안동 만속촌

 

 

 

 

 

 

 

 

 

 

 

 

 

 

 

 

 

 

 

1976년 안동 다모목적댐이 준공됨으로 물에 잠기게 된 집들 가운데,

민속자료로 가치가 있는 집 12채를 옮겨 왔다.

 

교리댁은 19세기 양반집이고, 다른 집들은 다 서민의 집이다.

이곳의 집들은 안동지역의 독특한 살림집의 특징을 보여준다.

초가집들은 도토마리집 · 겹방집 · 까치구멍집 · 통나무집 · 토담집 등이 그것이다.

 

 

 

 

 

 

 

 

 

 

 

 

旌孝閣

 

 

 

전통문화 체험장

 

 

 

 

 

 

 

 

 

 

 

 

 

 

 

 

 

 

 

 

 

 

까치구멍집

 

 

 

■ 까치구멍집은 겹집으로 집 안에서 취사와 난방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창문도 없고, 출입문은 하나뿐이라 연기가 집 안에 가득 차면 빼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집 안의 연기를 빼고 빛을 들이기 위해 지붕 용마루의 양쪽 끝에 구멍을 내어 이엉을 얹는다.

이때 연기는 빠져나가고 빗물은 들지 않도록 그멍의 형태나 벌어진 각도 등을 매우 세심하게 고려해서 만드는데, 이 구멍을 까치구멍이라 하고, 이런 집을 까치구멍집이라 한다.

 

와룡면 가류리에 있던 집들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  

 

 

안동의 초가는 내륙산지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산지형 구조를 보인다.

강원도, 경상북도 태백산맥 일대의 집들은 겹집, 겹방 구조가 그 특징이다. 겹집이란 一자집과 달리,

방이 한 줄로 나란히 있지 않고 앞뒤로 연해 붙어있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집을 내려다 보면 田자 모양을 이루고 있어 집 안에 부엌, 외양간 등이 다 들어있다.

이것은 추운 지방에서 보온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이다.

 

 

 

 

 

 

 

 

 

 

 

 

 

 

 

 

 

 

 

 

 

도토마리집은 가운데 칸에 부엌이 있고, 양끝에 한 칸짜리 방이 있는 모습이 마치 베틀에서 실을 자아 감는 기구인 도토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도산면 의촌리에서 옮겨 왔다.

 

 

초가토담집(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4호)는 정면은 목가구식이지만 나머지 삼 면은 토담으로 만들었다.

흙담의 두께가 30cm쯤 되어 보온과 방풍효과가 좋다. 창문은 구멍처럼 작게 만들었다.

임동면 마경리에서 옮겨 왔다.

 

 

■ 통나무집은 통나무를 엮어 지었다.

진흙이나 볏집 같은 재료보다 나무를 구하기 쉬운 산골에서 주로 지었다.

정면과 양 벽면이 네 귀퉁이에서 만나 물려 쌓은 귀틀집이다.

영양군 석보면 삼의리에서 옮겨 왔다.   

 

 

宣城縣 客舍(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객사는 관아 건물로 외지에서 온 손님이 목던 곳이다.

1712년에 중건되 이 객사는 중앙 세 칸이 박공이 있는 지붕으로 높으며,

양 익사는 팔작지붕으로 각 삼 칸씩 당시의 규범을 충실히 따라 지어진 건물이다.

도산면 서부리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

 

 

■ 석빙고(보물 제305호)

예안 현감 이매신이 1737~ 1740년 사이사이에 전에 있던 빙고를 돌로 개축한 것이라 한다. 

도산면 서부리에 있었으나 안동댐으로 물에 잠기게 되자 본디 자리보다 높은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는 삼한시대에도 있었다.

옛날에는 얼음이 어는 겨울에 강에서 얼음을 따다가 이런 빙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여름에 쓰곤 했다.

빙고는 얼음뿐 아니라 얼음을 이용해서 다른 것을 저장하는 냉동고이기도 했다.

 

이 석빙고는 이 고장의 특산물인 낙동강 은어를 잡아 저장했다가 왕에게 진산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저장을 잘 하기 위해서는 빙고의 온도를 일전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빙고는 삼국시대 돌방무덤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빙실 전체읲 길이는 12.5m, 너비는 6.1m, 높이는 5.4m이다.

석실을 이렇게 쌓은 뒤 그 위에 흙을 덮어 거대한 움집을 만들었다.

내부 기온 조절을 위하여 위쪽에 환기공도 두었다.

빙고 안에 저장한 얼음이 녹으면 물을 흘려 내보내야 하므로 강 쪽으로 약간 경사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축조 연대가 거의 정확하고 구조가 튼튼한 18세기 전형적인 석빙고이다.

 

 

 

 

 

 

 

 

 

 

보월루

 

 

 

 

 

 

 

 

 

 

煙霞門

 

 

乘雲門

 

 

 

 

 

 

 

 

 

 

 

 

 

 

 

 

 

 

 

 

 

 

 

 

 

 

 

 

의성 김씨 종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