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영화

영화 <Kirschblüten-Hanami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추연욱 2018. 10. 1. 20:13


                          

 

 

 

영화 <Kirschblüten-Hanami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Doris Dörrie 감독, 2008년 작품이다.


독일어 원 제목 <Kirschblüten>은, 영어로 옮기면 <Cherry Blossoms>이다.

일본어 제목 <Hanami 花見>는 꽃구경이란 뜻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벚꽃놀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말로 번역한 제목은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번역이라기보다는 내용상 새로 제목을 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남편 Rudi: Elmar Wepper

아내 Trudi: Hannelore Elsner

일본소녀 Yu: Aya Irizuki

딸 Karolin: Brigit Minichmayr

Karolin의 친구 Franzi: Nadja Uhl

막내아들 Karl: Maximilian Brückner

큰아들 Klaus: Felix Eitner  

며느리 Emma: Florian Daniel

 

 

영화는 아내 트루디의 독백에서 시작한다.

 

"남편과 후지산 벚꽃을 보러 일본에 가고 싶다. 남편 없이 하는 구경은 상상할 수 없다. 그건 구경도 아니다.",

"루디는 매일 아침 7시 28분 바일라임 행 기차를 탄다. 매일 오후 한 시 내가 싸준 샌드위치와 사과를 먹는다.

'사과 하나면 의사는 필요없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독일의 시골 도시에 사는 루디와 트루디 부부. 이들은 초로에 접어들었다. 자식들은 직장따라 떠나 살고 부부만 남았다.

남편 루디는 직장과 집 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퇴근하면 어김없이 무슨 기계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보다 한 세대쯤 앞 시대라면, 100점짜리는 몰라도 적어도 90점은 넘는 남편일 것이다. 

 

"전에는 우체국에서 일했고, 지금은 폐기물 관리국장이다.

20년간 단 한번 아팠다. 1991년 독감에 중이염으로."

그는 건강한 사람이다. 

 

막내아들 칼은 직장따라 동경에 살고있다.

트루디는 동경에 가서 아들도 만나고 벚꽃- 사쿠라꽃이라 하는 게 더 좋겠다- 그 일시에 피었다가 일시에  무슨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사쿠라꽃과, 일본 현대무용 부토를 보고 싶어한다.

남편을 졸랐지만 남편은 언제나 시큰둥했다. 

 


 

 

의사는 말한다. 

"부인께 상의드리고 싶었습니다.

남편이 이걸 받아들일 수 있을지. 다들 반응이 달라서요. 병이 어떻게 진행될 진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한 동안 증상이 없을 수도 있구요.

뭔가 함께 해보길 권합니다. 여행이나, 작은 모험을." 


청교도같이 깨끗하게 살아온 이 사나이에게 일찍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그이는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동경에 있는 아들 칼에게 전화한다. 

"삐- 하거든……."

"여긴 별일 없다. 또 연락 하마." 듣는이도 없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들 보러 베를린에 안 갈래요?"

- "글쎄."

"일본에 가는 건요?"

- "후지는 그냥 산일뿐이야." 

"그래도 칼을 볼 수 있잖아요."

- "녀석이 오는게 더 쌀 걸."


  

 


남편을 설득해 베를린에 간다.

 

 

트루디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선글라스로 감춘다.

남편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 기막힌 '정보'를 아들 딸,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몽땅 혼자의 몫으로 간직해야 한다. 

  

 

 

역에 내렸지만 마중 나온 아들과 엉뚱한 곳에서 서로 기다린다.

촌사람이 대도시에 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도시에 사는 아들 딸, 그들은 나름대로 살기 바쁘다. 

갑자기 찾아온 부모가 반갑지도 않고, 살기 바쁘다 보니 남매끼리 서로 미룬다.

 

딸과 며느리의 귓속 말.

"언니, 무슨 바람들이시래. 이렇게 불쑥. 얼마나 계실 건데. 난 시간 없어."

"우린 있는 줄 아세요."


자식들에게도 이방인이다.

 

손자,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관심이 없고 게임에 빠져있다.

 

 

  

 

자식을 은 모두 바쁘고,

그래서 카롤린의 친구 프란찌의 안내를 받으며 시내를 구경한다. 

 

"나 집에 가구 싶어."

"한 놈도 시간 있는 놈이 없다잖아."

 

그래도 딸 카롤린은 늙어버린 부모에게 죄송한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트루디가 보구 싶어 했던 일본 현대무용 부토 공연을 본다.

부토 무용은 일본 히피운동과 함께 형성되었다.

존재와 소멸, 탄생과 죽음을 반복적으로 표현하여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부토 무용가 Tadeshi Endo가 보여준다.

 

 

 

그녀는 부토 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남편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루디는 부토 춤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격하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부토 춤을 추지 말기 바란다.

공연을 보지 않고 밖에서 기다린다.  

 


트루디는 무용을 공부했다. 특히 일본 무용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남편과 자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

남편과 자식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로 생각하는 우리 어머니 세대와 비슷한 의식을 가진 부인이다.

 

트루디는 발틱해로 가자고 한다. 어쩐 일인지 루디는 선선히 따른다.

물이 있는 곳 발틱해, 자궁과 같은 곳이다.

그녀는 모태로 돌아간다.

 

 


"내 뼛가루는 바다에 뿌렸으면 해."

-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냥, 당신은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정말 난 항상 생각해. 우리 살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 "앞으로 얼마 못 산다면 당신은 뭘 하고 싶어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지만 뭘 해? 난 아무것도 다른 건 안해.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당신이 있는 집으로 와야지."

 

"집에 가자. 베를린도 봤고, 발틱도, 애들도 봤으니 집에 가야지."

 

그날밤 그녀는 싫다는 남편을 이끌고 부토 춤을 춘다. 루디는 아내가 주책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트루디는 잠들기 전 자신의 모습을 본다.

 

 

 

 

엉뚱하게도 부인이 발틱의 호텔에서 죽는다.


이 죽음은 상당히 당혹스럽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그러나 작품세계는 복잡하고 무질서한 현실세계를 통합된 원리에 따라 구성하기 때문이다.

운명을 다루는 작품들에는 대개 우연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가 그런 작품이다.


이 부인의 죽음도 운명에 따른 것으로 이해하야 할 것이다.

 

"아빠, 칼이 왔어요."

"바다가 너무 조용해."

 

 

 

 

 

혼자 남은 아버지를 모시는데는 모두 손을 든다.

 

"이렇게 갑자기 갈 줄 알았으변 좀 더 잘 해 주는 건데." 

그의 이런 처절한 고백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평생 직장에 충실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 일에는 소홀했다.

어쩌면 누나 같기도 한 아내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간이든, 부모를 모시고 살든 살아있을 때 잘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렵지 않는가. 

 

텅빈 집으로 돌아온다.

 

 


혼자 옷을 갈아입는다. 평생 처음일 것이다.

아내의 빈자리를 이렇게 작은 것을 통해서 보여준다.

여성 감독 도리스 되리의 섬세한 연출이 관객들로 하여금 울먹이게 한다. 

 

 

아내를 묻고,  

 

아내의 부토 춤 사진을 보고, 

  


 

평생 의지하고 살아옸던 아내가 없다. 루디는 아내가 없는 빈 자리가 이렇게 클 줄을 몰랐을 것이다.

무기력해진다. 혼이 빠진 사람같다.  

 


죽은 아내가 남긴 것, 그것을 찾아 동경으로 간다. 

 


동경의 어느 공항. 아들 칼은 일에 바빠 아버지를 기다리게 했다. 

  

 

 

"너 하는 일이 정확히 뭐니?"

"5년이나 지나 물어보시다니. 전  숫자와 씨름해요. 아빠가 쓰레게 요금과 하는 것과 같아요."

 

아버지는 아버지다. 아버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루디는 없다. 그는 아내 트루디로 동경에 온 것이다. 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항상 엄마가 네게 보내던 거. 일본엔 이런 빵은 없지. 소시지도. 그리고 이거 두 가지 맛."

 

칼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빠 저 사무실에 가야해요. 6시에 올께요."

 

독일의 시골 사람, 거대한 도시 동경에서는 이방인이다. 

감옥에 갇힌 신세와 다름이 없다.

 

어머니 트루다가 아들에게 보낸 엽서.

  

"멈춰, 그건 살생이야. 그런 잔학한 짓은 안 돼. 그 하루살이는 짧은 하루밖에 없어.

고통의 단 하루. 오 거기 떠돌게 놔두렴.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의 천국은 영원하고 그 보상인 그 생은 단 하루."라 쓰여있다.


파리를 잡는 아이들에게 트루디가 한 말이다. 

 

이런 사고는 서양인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마음이 아주 여리거나, 일본 무용에 심취하여 형성된 사고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동양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일본식 잠옷을 입는다.

 

이말은 루디도 자주 들어서 외고있다.

 

 

"왜 두 분이 한 번도 안 와 보셨어요."

"시간이 있을 줄 알았지."

  

 


"네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걸 내가 빼았았어. 죽음에겐 해 줄 수 있는게  없느니."

아내 트루기가 하고 싶었던 춤, 동경에 가서 벚꽃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것, 그 어느 하나도 이루어주지 못했다. 

아내가 가고 없으니 그것이 뼈저린 회한으로 남은 것이다.

   

 

맥주를 마시며 칼을 기다린다. 오래 기다렸다. 기다리다 밖으로 나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메다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손수건으로 표시한다.

 

 

표시해둔 손수건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평생 집과 직장만 알고 살던 사나이,

평생 처음 이런 곳을.

 


 


칼의 아파트 앞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하룻밤 한데잠을 자고,

  



아들 칼을 화나게 한다. 

칼이 자기를 찾아다닐 때 쓰던 것을 목에 건다. 자학적인 모습이다.

 

 

핸드폰 쓰는 법을 기르쳐 준다.

  

 

텔레비죤에서 부토 무용을 본다. 과격해서 싫어했던 부토.

 

 


벚꽃놀이 하나미[花見].

영화 중반부부터 벚꽃은 계속 등장한다. 벚꽃은 그들의 삶, 아니 인간의 삶이 덧없음을 암시하는 소재이다.  

칼은 벚꽃놀이 중에 한껏 취한다.

자식들 중 가장 사랑을 받고 자란 칼, 그래도 아버지에게 맺힌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재워주시는 건 처음일 걸요. 다들 항상 아빨 챙겨야 하고 아빠만 항상 중심이셔야 하죠. 너무 열심히 일해 사무실 뜨기도 힘드셔.

진짜 엄만 알지 못하고. 바보같은 아빠. 쓰레기 차에나 가요. 거기 소속이니까."

 

칼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두 가지이다.

1. 아버지는 자기밖에 모른다.

2. 어머니의 꿈을 무시했다.


영화에서 아버지가 권위적인 것 같지는 않다.

어머니도 자기의 꿈을 포기하고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인생을 바친 것에 그다지 불만이 있는 같지는 않다.

회한으로 남는 것은 벚꽃구경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루디는 "시간이 많은 줄" 알고 미루고 미루었던 것이다.   

 

아침을 먹여 보내려 하지만 칼은 바쁘다고 먹지 않고 출근한다. 도시락을 싸준다.

이제 루디는 루디가 아니고 트루디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싸 주는 도시락이기도 하다.

  

 

 

 

퀭한 눈으로 아내의 모습을 본다. 

아내의 옷을 입는다. 아내가 되어 집을 나온다. 아내에게 동경을 보여주어야 한다.

 

 

칼이 제 누나에게 전화하는 것을 엿듣는다.

"날 미치게 하셔. 종일 앉아만 계시고. ……할말은 아니지만 정말 걸리적거리셔.

이상하시고. 아빠가 현금을 몽땅 가지고 오신 거 알아. 엄마 옷도 가져 오셨어. 치료가 필요하신 것 같아.

나도 못 견디겠어. 누나가 좀  맡아줘." 


자식도 타자이다.

 

 

"조금만 더 여기 있게 해주렴. 부탁이야."

아직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마지막 할 일이 남았다. 벚꽃이 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자, 엄마의 요리다."

 

 

"자 여보, 당신을 위한 거야."

  

 


부토 춤을 추는 소녀 유를 만난다.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부토는 그림자 춤이예요. 내가 아니라 그림자가 추는 거예요.", 

"난 그림자가 누군지 몰라요. 다들 살아있으며 죽어있어요. 나는 죽은 사람과 춤춰요."

-"그게 누군데?"

"우리 엄마요."

-"언제?"

"일 년전 어제요. 엄만 전화를 좋아하셨어요. 분홍전화기요. 항상 통화 중, 가족들과요."

-"집사람도 엄청 전화했지. 애들 셋, 항상 통화중."

"이제 전 엄마와 통화중이예요. 엄만 저쪽에 있어요. 느껴보세요.",

"느껴보세요. 예전의 추억. 그리고 만발한 꽃을 봐요. 그림자를 붙잡고 그림자를 느껴요."

루디는 유의 의식세계로 점점 빨려들어간다.

   

  

소통의 도구 전화기는 마법의 전화기다. 그녀는 죽은이와 교통하는 영매다.   

그녀의 마스크는 죽음을 표현한다. 

 

"코트 벗고 춤을 추어 보세요."

루디는 아내의 스커트와 스웨터를 입고있다.

- "이건 내가 아니고 내 아내야."

그가 그 자신이고, 그의 아내이기도 하다.  

 

 

양배추 말이 요리를 유에게 준다.

 

 

이렇게 몸으로 만든다.  

 

 

집에 돌아와 청소하다가 유에게서 배운 부토 동작을 흉내내 본다.

  

 

춤을 추다가 쓰러진다. 몸이 예사롭지 않음을 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아들이 잠든 사이 집을 나온다.

 

 

이미 유의 뒤를 밟아 거처를 알아두었다. 그녀는 집이 없다. 텐트에서 산다.

 

유의 텐트 옆에서 한데 잠을 자고, 아침이다.

"내 아내가 여행하고 싶어해. 너도 같이 갈래?"

유의 인도로 후지산을 찾아간다.

  

 

코트 안에 아내의 스커트를와 스웨터를 입었다.

여행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아내가 하는 것이다. 

 

 

후지산이 잘 보인다는 여관에 든다. 후지산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후지산은 좀처럼 모습을 들어내지 않는다. 

 

 

이제 그의 몸도 다됐다. 마치 巫病에 걸린 것처럼 앓는다. 죽음이 가까이 왔다.

 


3일 째 밤. 한밤중에 잠이 깼다. 아내 트루디가 불렀을 것이다.

후지산이 모습을 나타냈다.

 

 

물가의 제단에서 신성한 죽음의 의식을 벌인다.

 

 

 

죽음의 길에 아내가 마중나왔다.

 

 

 

 

그 역시 모태로 돌아간다.  

 

 

루디는 아내와 소통하게 해준 영매 유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남긴다.

"널 위해", 루디.


 

 


 

 


유는 말한다. "할아버지는 이제 행복해요."

 

 

 

 

 

 

캐롤린- "반년도 안돼 우리는 고아가 됐네."

"다 꿈만 같아. 죽은 엄마를 따라 가시다니. 여관에서 열 여덟 살 여자 애와. 여자옷을 입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프란지- "그래도 결국 행복하셨을 거예요." 그녀의 생각은 객관적이고, 너그럽다.

 


종결부는 이렇게 여운을 남긴다.  

 




'여백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1987>  (0) 2019.05.22
영화 <Bucket List>  (0) 2018.10.01
영화 <東方不敗>  (0) 2018.10.01
One Week, Bucket List  (0) 2018.10.01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0) 2018.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