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도보여행 후기

문수산-2010년 2월 27일

추연욱 2010. 2. 28. 23:35

문수산-2010년 2월 27일

 

▴ 문수산(599.8m)은 청량산이라고도 한다. 청량산은 중국에도 있다. 중국 산서성 오대현에 있는 오대산의 별명으로 5개의 봉우리가 솟아있고 꼭대기에는 나무가 없어 흙을 모아 놓은 대처럼 생겼으며, 여름에도 덥지 않으므로 청량산이라 한다.

문수산은 산세가 청량하고 아름다워 신라 때 문수보살이 여기에 살았으므로 처음에는 청량산으로 부르다가 다시 문수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청량산 또는 문수산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얻어와 우리나라 오대 적멸보궁에 안치했다는 설화와 관련있을 것이다. 신라땅을 불국토화하려는 이념에서 이런 설화가 만들어지고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이정 편 <한국불교 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에 우리나라에 문수사 또는 청량사라는 이름의 절이 19개가 수록되어 있다.

 

문수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구 청량면 율리 문수산에 있다.

신라 때 창건되었다. 그 뒤의 연혁을 알 수 없다. 1799년에 편찬된 <梵宇攷>에 절이 존재한다는 기록이 있다.

1984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이 시주하여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절 이름도 문수암에서 문수사로 바꾸었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15교구 본사이다.

 

 

 

 

 

 

문수사에는 동전이 붙는다는 바위가 있다. 알바위에 돌을 문질러 동전이 붙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알바위이다.

알바위는 알[卵] 모양의 구멍들이 있는 바위라는 뜻이다. 이 구멍들은 작은 돌로 문질러서 둥글고 오목하게 파인 것으로 性穴이라고도 한다. 성혈은 지석묘의 덮개돌에 많이 나타나는데, 여근을 상징하는 것으로 풍요와 多産을 기원하는 주술적 행위이다.

바위의 주술적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했거나,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문수산성(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4호) - 울주군 범서읍 전상리

문수산(599m)의 8부 능선에서 정상을 따라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성애에서 수습된 토기조각, 기와조각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울산 언양 일대를 방비할 목적으로 쌓은 산성으로 추정된다.

체성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서로 물리는 방식으로 夾築(성벽 안팎을 수직에 가까운 석벽)으로 쌓았다. 그 단면은 사다리꼴이다. 현재 남아있는 체성은 길이 800m, 높이 50~143m 정도인데 타원형이다. 남쪽에 문터 시설이 있고, 서쪽에는 언양방면을 감시하는 별도의 석축시설이 남아있다.

屈火산성이라 전하고 있으나 문헌상에는 전하지 않는다.

 

임도를 따라 정상을 향해 오른다.

 

 

가지 두 개가 붙은 소나무가 있다.  

 

 

문수산 정상

 

 

 

청송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구 청량면 율리 문수산에 있었다.

유물로 보아 신라 때 창건된 절이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48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절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5C 후반 이후에 페사된 것은 분명하다.

이곳 사람들은 청송사가 있던 청송마을 전체를 절골이라 한다. 원래 매우 큰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부도 3기가 남아있다.

 

청송사지 삼층석탑(보물제382호)

2중기단 위에 높이 5.5m의 3층 몸돌을 올렸다.

매우 낮은 하층기단 면석에는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 두개씩을 새겼다. 덮개돌 아래쪽에는 두툼한 각형 받침이 있으며, 윗면에는 2단의 굄을 두어 1층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상하층 기단의 덮개돌이 매우 얇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몸돌에 비해 2, 3층 몸돌이 유난히 낮다. 지붕돌은 처마가 짧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가파르다. 전각에 반전이 있다. 지붕돌의 처마의 층급은 5단이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다소 변형된 점이 있어 지방화 하는 과정의 석탑으로 보인다.

 

1962년 탑을 해제 복원할 때 상층기단에서 청동사리함이 나왔는데 사라함 안에는 청동여래입상 1점을 비롯하여 우리, 구슬, 옥 등 30여 점이 들어있었다.

 

 

 

청송사지 부도(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 3기가 나란히 서있다.

 

 

 

바라보아 왼쪽의 부도는 높이 3m로 지대석, 기단, 연꽃대좌, 몸돌을 차례로 쌓았다. 높은 방형의 기단 위에 복련석과 앙련석을 올렸다. 기단 면석 앞면과 뒷면에는 방망이를 들고있는 인왕상이, 좌우 옆면에는 큼직한 꽃 한 송이씩 조각되어 있다. 기단 각 면에는 귀기둥도 조각되어 있다. 석종형 몸돌 아랫부분에는 범어를 돌려 새겼고, 어깨 부분에는 삼산형 꽃잎 모양을 큼직하게 돌려 새겼다. 꼭대기에는 보주가 튀어나와 있다.

 

 

가운데 부도는 높이 2.2m이다. 몸돌에 “瑞應堂眞洽大師”라는 명문이 있다. 왼쪽 부도보다 약간 작고 각 부재에 조각된 장식의 종류와 기법이 다를 뿐 왼쪽 부도와 같은 양식이다. 기단 면석 각 면에는 꽃송이가 네 개씩 새겨져 있고 앙련과 복련석 조각도 왼쪽 부도와 비슷하다. 석종형 몸돌 아랫부분에는 당초문으로 장식된 점은 왼쪽 부도와 다르다. 어깨 부분에는 아무 장식도 없다.

 

오른쪽 석종형부도는 높이 1.2m이다. 기단이나 받침대가 없고 몸돌만 남아있다. 몸돌에는 아무 장식이 없다.  

 

이 밖에 부도의 부재, 꽃무늬가 새겨진 석재, 비석받침 등 여러 개의 부재들이 널려있다. 

 

청송사지 삼층석탑에서 부도밭으로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 석조물의 부재인 듯한 것이 버려져 있다.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청송사지 부도 기단의 무늬와 비교해 보면 인왕상으로 보인다.

 

 

망해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다.

<삼국유사-제2권, 기이 제2, 처용랑 망해사> 조에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제49대 헌강왕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 d용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r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아내를 삼아 머물러 살도록 하고 또 급간이라는 관직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뺏으려니 어찌할고.

 

그뒤 역신은 모습을 나타내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멩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그려 문에 붙여서 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인내 靈鷲山 동쪽 기슭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라 했다. 또는 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이후 망해사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주군 조에 “望海臺가 망해사에 있다”는 것만 남아있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석조부도 2기와 절터에서 발견되는 통일신라 하대와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는 각종 기와 조각들로 미루어 창건 이후 맥을 이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기와 중에 ‘嘉靖 23년’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종 39년(1544)에 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뒤 조일전쟁 중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7년 주지 影庵이 중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망해사 담장 위에 석등의 부재인 듯한 석물이 얹혀있다.

  

 

처용에 대해서는 국문학 ‧ 민속학 ‧ 종교학 ‧ 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처용은 용, 또는 용의 얼굴, 무당의 이름, 사람의 이름, 신라에 살고 있는 외래인의 이름, 우리말 ‘중’을 한자로 음역한 것 등 여러 설이 있다.

 

향가 <처용가>는 노래와 춤으로 역신을 물리쳤다는 점에서 處龍戱의 한 과정에서 불렀던 노래이며, 처용은 처용의 역할을 맡은 무당이라는 것이 국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9대 헌강왕 조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5년(879) 3월에 왕이 동쪽 지방의 주 ‧ 군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전에 나타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는데, 그들의 모양은 괴상하고 의관도 다르므로 (形容可駭 衣巾詭異)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산이나 바다에 사는 정령(山海精靈)이라 했다.”

 

위의 기록으로 보면 이상하게 생긴 사람은 신라사람이 아닌 외국사람일 것이다. 어떤 경로인지는 몰라도 신라에 와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보다 150년쯤 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는 이 사실이 설화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편에는 연극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역신을 물리치는 儺禮儀式으로 발전하여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다.

 

아라비아의 문헌을 읽을 수 있는 정수일(한국 속의 세계, 창비, 2005)은 처용은 아리비아에서 온 무슬림 상인이라 한다. 그는 당시 울산은 수도 배후의 항구 도시로 산업, 상업이 발달한 국제무역항이며, 내륙 교통의 요지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남해를 통한 동서교역의 주역을 맡은 아랍 무슬림 상인들과 서역인들이 빈번히 드나들었고 신라에 정착해 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용은 동해를 통해 울산에 상륙했거나 표류한 서역계통의 상인일 수도 있다.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앞바다 가운데에 처용이 바다에서 나왔다는 처용암(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이 있다. 

 

조선 성종 24년(1493)년에 편찬된 <악학궤범>에 실려있는 처용의 형상을 보면 신라인은 아니다. 당시 동양에서는 아리아계나 터키계 인종을 深目高鼻(눈이 푹 들어가고 코가 높다)라 묘사했다. 괘릉 무인석상, 제22대 성덕왕(702~736)릉, 제42대 흥덕왕(826~835)릉의 무인석상,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28점의 흙인형 등의 얼굴은 삼목고비의 아리안계 사람의 얼굴이다.

 

처용상(악학궤범)

 

괘릉의 무인석상

  

 

향가 <처용가>는 고려속요로 전승되어 <악학궤범>에 전한다. 고려속요 <처용가>도 향가 <처용가>와 마찬가지로 처용이 역신을 몰아내는 내용이다. 처용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항가와는 달리 처용이 역신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처용희는 신라 ․ 고려 ․ 조선시대에 걸쳐 전승된 驅儺儀式의 춤이며 연극적 요소도 지니고 있다.  

 

고려와 조선의 처용희는 궁중에서 거행되는 세말 나례에서 공연되었으며, 민간에서도 공연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의식무의 성격보다는 놀이로서의 성격으로 확대되었다.

처용희는 영조 이후 중단되었다가 1920년경 <악학궤범>에 의거하여 다시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용무는 2009에는 강강술래 · 남사당놀이 · 영산재 · 제주칠머리당영등굿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재되었다.

 

처용무-조선 시대 경로잔치 기록화 부분

  

 

망해사지 부도(보물 제173호)

팔각원당현 부도 2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있고 동쪽에 작은 석종형부도 하나가 있다. 

 

 

서쪽의 것은 높이가 3.3m이다. 장방형 판석 여러 장을 깔아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기단부를 올렸다. 팔각의 기단부는 상 ‧ 중 ‧ 하대석으로 되어있다. 하대석은 돌 2개로, 중 ‧ 상대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팔각의 하대석 받침에는 안상을, 하대석에는 고사리모양의 큼직한 귀꽃이 솟아오른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짧은 중대석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하대석 윗면에는 중대석을 받치기 위한 굄이 4단으로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 위에도 역시 중대석 받침 굄과 대칭되는 각형 받침을 조각해 몸돌을 받치게 했다. 상대석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장치로 상하로 된 둥근 굄을 두 단 얕게 조각하고 그 아래위로 다시 각형 굄을 다시 1단씩 새겼다.

상대석 위에는 아래쪽에 별도의 부재를 만들어 넣었는데, 각 면마다 꽉 차게 안상을 하나씩 새기고 그 윗면은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팔각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을 새기고 윗쪽에는 창문 모양을 새기고 8면 가운데 하나씩 건너 4면에 문을 새겼다. 문 위에는 반원형의 테두리를 둘렸다.

지붕돌은 처마가 얇고 넓다. 전각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 풍령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지붕의 우동마루가 모이는 윗쪽에는 8각 굄을 마련하여 상륜부를 받치게 했다. 상륜부는 없어졌다.

   

 

동쪽의 부도는 일부가 무참하게 깨졌다. 일찍이 무너져 땅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0년 11월에 다시 세웠다. 

 

규모는 매우 크지만 안상이나 연꽃 등이 매우 얕게 조각되어 있어서 크기에 비해 섬약한 느낌을 준다.

절을 창건한 헌강왕 때 세웠다고 전한다. 조각 수법이 다소 형식화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덤으로 문수경기장

 

 

조팝나무 잎이 돋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