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신경림. 갈대, 이쯤에서, 다시 느티나무가, 당당히 빈 손을, 몽유도원, 설중행, 강마을이 안개에 덮여

추연욱 2016. 9. 19. 18:24




신경림의 시
 
갈대

신경림(1935~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1956년 문학예술)
申庚林 시집, <農舞>, 창작과 비평사, 1979.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청룡흑룡 흩어져 비 갠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마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이쯤에서
  
신경림(1935~ )
  
이쯤에서 돌아갈까보다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
터벅 터벅 걸어서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찻집도 기웃대고 술집도 들러야지
낯익은 얼굴들 나를 보고는
다들 외면하겠지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테다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으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다
내 손에 들린 가방이 텅 비었더라도
그동안 내가 모으고 쌓은 것이
한줌의 모래밖에 안된다고
새삼 알게 되더라도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다시 느티나무가

신경림(1935~)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심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당당히 빈손을

신경림(1935~ ) 

버렸던 것을 되찾는 기쁨을 나는 안다.
이십면 전 삼십년 전에 걷던 길을 
걷고 또 걷는 것도 그래서이리.
고목나무와 바위틈에 내가 버렸던 것 숨어 있으면 
반갑다 주워서 차곡차곡 몸에 지니고.

하지만 나는 저 세상 가서 그분 앞에 서면
당당히 빈손을 내보일 테야.
돌아오는 길에 그것들을 다시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으니까.
찾았던 것들을 다시 버리는 기쁨은 더욱 크니까.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윤무 輪舞

신경림

하늘과 초원뿐이다.
하늘은 별들로 가득하고 초원은
가슴에 자잘한 꽃들을 품은 풀로 덮였다.
낮에는 별이 피하고 밤에는 꽃이 숨어 
멀리서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지만, 새벽이면

밤새 하늘을 지키느라 지친 별들이
눈을 비비며 은하를 타고 달려내려온다.
순간 자잘한 꽃들도 자리를 박차고 함성과 함께 뛰쳐나와
마침내 초원에서는 화려한 윤무가 벌어진다.

언제가 될까, 내가 그 황홀한 윤무에 끼여 
빙빙 돌아갈 날은.   



초원 草原

신경림

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 
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든 말똥에서 
마른 풀 냄새가 난다.

짙푸른 하늘 저편에서 곤히 잠들었을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재회

신경림

그는 아마 밤새 초원을 달려왔을 테다.
내게 말고삐를 넘기는 그의 머리칼에 반짝, 아침 이슬이 빛났을 게다.
그리고 백년이, 천년이 지났겠지 우리가 만난 것은.
몸짓도 목소리도 이토록 낯이 익다.
이 먼 도시에서 두 나그네가 되어 만나면서.

말고삐 대신 카메라를 내게 넘기고 활짝 웃는 
그의 하얀 팔과 긴 머리칼이 이슬비에 젖어 촉촉하다.


황홀한 유폐 幽閉

신경림(1935~)

네 눈을 통해 나는 네 내부 깊숙한 곳으로 잠입한다.
거기 푸른 숲도 있고 하얀 길도 있고 붉은 꽃밭도 있어 우리는 함께 걷기도 하도 누워 별을 보기도 하고 진종일 뒹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는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을 안다.
나는 놀라 문을 두드리고 발버둥치지만 너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완강히 나를 일상 속으로 되돌려보내기를 거부한다. 

나는 황홀하다.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호수

신경림(1935~)

짙푸른 네 눈 속으로 풍동 뛰어들 것 같다
곧장 헤엄쳐가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닥에 이르겠지

나는 애들처럼 물장구도 치고 자맥질도 해야지
구석구석 헤집고 다녀 너 깔깔대고 웃게도 하고
자지러져 깊은 탄식을 토하게도 해야지

나는 나오지 않고 여기저기 흡반을 꽂고
기생충처럼 붙어살 거야

별나라에서 네모진 창구로 지구를 내려다 보듯
네 짙푸른 눈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면서
이 세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먼 옛날의 일인 듯

아득히 그리면서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강마을이 안개에 덮여

신경림

안개는 많은 것을 감추고 조금만 보여주어
빈 쪽배가 보이고 산 넘어가는 오솔길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는
저 쪽배를 타고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저 오솔길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쉬엄쉬엄 요령 소리에 얹혀 넘어가던 길이다

이윽고 쪽배도 오솔길도 덮으면서
한개는 안개만을 보여준다



설중행 

신경림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니 산이 있고 논밭이 있고 마을이 있고,
내가 버린 것들이 모여 눈을 맞고 있다.
어떤 것들은 반갑다 알은채를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섭섭하다 외면을 한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버렸다고 강변하면서,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가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내가 버린 것을 속에 섞여 버려져서 행복하고 나로부터 버려져서 행복하다. 




담담해서 아름답게 강물은 흐르고

신경림

폭풍이 덤벼들어 뒤집어놓기도 하고
짐승들이 들이닥쳐 오물로 흐려놓기도 하는
강물이 어찌 늘 푸르기만 하랴
산자락에 막혀 수없는 세월 제자리를 맴돌고
매몰찬 둑에 댕겅 허리를 잘리기도 하는
강물이 어찌 늘 도도하기만 하랴
제 속에 수많은 사연과 수많은 아픔과
수많은 눈물을 안고 흐르는 강물이 어찌 늘 
이슬처럼 수정처럼 맑기만 하랴
그래도 강물은 흐르니 세상에
마실 것도 주고 먹을 것도 주면서 
노래도 되고 얘기도 되면서
강물이 어찌 늘 고요하기만 하랴
자잘한 노여움과 하찮은 시새움에 휘말려
싸움과 죽음까지도 때로는 안고 흐르는
강물이 어찌 넓기만 하랴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의 힘을 빌려다 마을과 들판을
눈물로 쓸어버리기도 하는 강물이
제 몸까지 내던지며 하늘과
땅을 한바탕 뒤집어놓는 강물이
어찌 늘 편안하기만 하랴

강물이 어찌 유유하기만 하랴
강물이 어찌 도도하기만 하랴
그래도 강물은 흐르고
담담해서 아름답게 강물은 흐르고 


옛 나루에 비가 온다

신경림

백성이 낸 세금으로 오히려 나라가 나서서 
강을 파헤치고 산을 허물고 있으니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는다는 옛 시구절은 이제 허사가 되었다.

불도저가 파헤치고 있는 것이
강바닥이 아니라 제 심장이라는,
다이너마이트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바위너설이 아니라 제 팔다리라는,
오랜 촌로들의 항의 따윈 한낱
힘없는 넋두리로만 들리는 강마을은 서럽다.

댐 공사를 반대하는 시위를 마치고 마치고
민물생선집에 모여 밥과 술을 먹는 우리는 
몯두 서울서 온 뜨내기들이다.
너희들이 여기서 살아보았느냐고 대드는
팔 하나가 없는 중년 앞에 머쓱해 있다가 
상에 나온 민물고기를 놓고
우스개를 주고받는다.

발파 소리도 불도저 소리도 그친 옛 나루에 비가 온다.
시위도 끝난 옛  나루에, 나룻배 대신 관광차가
줄지어 서 있는 옛 나루에 
모두들 비웃듯 추적추적 철적은
비가 온다.   



몽유도원 夢遊桃源

신경림

훌흘 옷을 벗어던지고 그 여자는
하얀 몸을 물속에 숨긴다, 날렵한 인어다.
정신이 어지럽다, 주저한다.
저 옷을 감추어 그 여자를 지상에 묶어둘거나.

그러나 내 번민은 부질없다, 잠시 뒤
물속에서 나온 그 여자
옷 아무렇게나 버려둔 채
꽃같이 웃으며 나를 향해 걸어오니.
세속의 어지러운 바람에 취했으리.

새와 벌 나비 일제히 날아오르고
복사꽃 온 들판에 활짝 핀다.
땅과 하늘이 온통 빨갛게 물들 때
나 어찌 두럽지 않으랴, 그 여자 문득 깨어나
주섬주섬 옷 찾아 입고
훨훨 하늘로 날아오를지도 모르는데.

나는 깨지 않으리 이 꿈에서,
비록 이 꿈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라도.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강마을이 안개에 덮여

신경림(1935~ )

안개는 많은 것을 감추고 조금만 보여주어
빈 쪽배가 보이고 산 넘어가는 오솔길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던 아이는
저 족배를 타고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저 오솔길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쉬엄쉬엄 요령 소리에 얹혀 넘어가던 길이다

이윽고 쪽배도 오솔길도 덮으며
안개는 안개만을 보여준다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설중행 雪中行

신경림(1935~ )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니 산이 있고 논밭이 있고 마을이 있고,
내가 버린 것들이 모여 눈늘  맞고 있다.
어떤 것들은 반갑다 알은체를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섭섭하다 외면을 한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버렸다고 강변하면서,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가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버려져서 행복하고 나로부터 버려져서 행복하다.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