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박시은/ 껍질을 깨며, 물드는 것, 저울질 한다, 그때 그 시절, 그대로

추연욱 2016. 12. 4. 23:49



껍질을 깨며


박시은


모래바람소리

강물의 속 깊은 생채기가 앓고 있는

고독한 신음소리

은하 흐르는 별들의 묵언이

새벽이슬로 열리는 빛나는 떨림

지난한 겨울이 응축한 납매臘梅

향기를 터뜨린다.


보내려고도 안으려고도 않겠다는 마음 다지는

허방 같은 불면의 속살

온갖 상념들이 널뛰기 한다 


잎사귀 한 장 남기지 않은 관목의 끝자락에서

꽃망울 감싸고 있던 두터운 껍질들

깨어나려고

실금을 그으며 눈치를 본다


박시은 시집, <햇빛에 물드는 바람소리>, 작가마을, 2016.



물드는 것


박시은


떠돌던 구름도

온 산에 수묵화를 그리던 안개도

후미진 바위의 이끼도

굽이굽이 제 길을 가고 있다


불멸을 담금질하던 뜨거운 여름날도

허전한 모퉁이를 허물어 낸다

너럭바위 위의 적멸은 노을초차 머무르게 한다

물들어 가면서

나에게 초록이 아닌

다른 색이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계절이 내 안에 꽃을 피우고

기대가 곤두박질치고

무성했던 번뇌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아픔들

소용돌이치던

세상살이가 고즈넉이 잦아들었다


꿈꾸었던 미래

쓸쓸함이 집을 짓는 해말간 가을이 오기까지

나는 나의 빛깔을 몰랐었다

붉디붉게 물드는 것이 핏빛 가슴인 줄을 몰랐었다 


빛을 염원하던 황혼

우수수 내리는 낙엽 되어

굽고 굽은 길에

바람 되어 흩날리고 있다


박시은 시집, <햇빛에 물드는 바람소리>, 작가마을, 2016.



저울질 한다


박시은


수간순간을 접시에 담는다

한 손에 빈 접시를 들고

산만해진 마음도

깊어진 생각도

그리움의 그림자도 골고루 담는다


뭉근히 오래오래 끓여서

자기의 알갱이조차 허물어

어우러진 시간에도 중독 된 듯 쉬지 않고

죽비를 내려치기도 했었다


한때는 너무나 소중했던 것들

싸도 또 겹겹이 싸서 깊숙이

간직했던 것들

아끼다가 싹아버린 것을

흐름의 묘약인 시간 속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버려야 할지

순간순간을 저울질 했었다


아직도 못 버리는

서가 속의 가득한 책들

숨죽이며 나를 보고 있다


버리고 버리다 제 몸마저 버려야 하는데

이제 그만 잣대의 사슬에서 벗어나

물 흐르는 대로

떠밀려 가려 한다


박시은 시집, <햇빛에 물드는 바람소리>, 작가마을, 2016.



그때 그 시절


박시은


삼매에 들고 싶어 애쓰던 적이 있었다

난무하는 번뇌 그칠줄 몰라

면벽을 풀고

휘도는 바람을 따라 나선 적이 있었다

눈앞에서 놓친 시간은 한 점씩 두 점씩 덫을 놓고

언제나 덫 속엔 바람이 일었다

추스르기엔 너무 힘들어 함께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아픔이 있었다

아린 마음은 햇살이 될 수 없음을 한탄 했었다

함정처럼 뚫린 미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비처럼 날아 오르고 싶었던 마음이

멍한 시간으로 머물고 있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박시은 시집, <햇빛에 물드는 바람소리>, 작가마을, 2016.



그대로


박시은


막힌 길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가위에 눌려 꼼짝 달싹 못한 적도 있었다

꽃구름 속에 둥실 떠 있기도 했었다

마음만은 받아 달라고 했지만

뜬 구름은 뜬 채로 지나가 버렸다

망연자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밭에서 실뿌리가 돋아 날 때까지

그대로 서 있고 싶었다


나무가 될 수 있을까

잎이 필 수 있을까

바위가 될 수 있을까

비가 내릴 수 있을까


언제 올 지도 모르는 소식을 기다리며

이끼가 자라는 가슴이 아린다

꿈의 빛깔을 그리며

은빛 파도 일렁이는 생각들이

하늘을 본다


박시은 시집, <햇빛에 물드는 바람소리>, 작가마을, 2016.




다시


박시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윤회하고 싶다

건드려만 보고

핵심도 보지 못했던

호기심과 방랑

문 열고 들어가

남새 맡고 씹어보고 싶다


보고 싶은 사람 너무 많아

윤회하고 싶다

끝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던 그때엔

모든 사슬을 끊고 싶었다

이제

끝자락에 걸린 그리운 사람들

시린 가슴으로 더욱 그리워지는데

놓지 못하는 열망

신주단지처럼 끌어안고 정진하고 싶다

설레임으로

허기진 나를 달래며

푸르러 지며

낙엽 지며

꽃 피우며

  

박시은 시집, <햇빛에 물드는 바람소리>, 작가마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