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도보 여행자료

지리산 둘레길 1

추연욱 2016. 6. 9. 11:55

 

 

 

 

지리산 둘레길 1길-2010년 2월 25일

 

 

 

운봉은 지리산 북쪽 자락 해발 417m 지대로 농업이 발달하여 지리산 인근지역에서는 농업생산이 가장 높다.

지리산 일대는 2~3C 경에는 마한의 영역이었다. 고대국가가 완성되는 4~5C에는 섬진강 남원 일대는 백제의 세력이 진출하였다. 6C 초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후 신라와 백제가 쟁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삼국시대에는 모산현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때 운봉현, 고려시대 운봉군이었다가 1914년 남원군에 편입되었고, 1955년 남원시에 통합되었다.

통일신라 때는 남원에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 진주에 9주의 하나인 康州가 설치되어 지방통치의 거접으로 삼았다.

 

근대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특히 여원치와 팔랑치가 유명하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영호남의 문물이 어우러져 독특한 생활양식을 이루었다.

 

지리산은 높고 험하지만 화전민도 천석을 한다는 정도로 골이 깊었다. 지리산 사람들은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풍족하였다. <택리지>에 "중이나 세속 사람들이 대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서 수고하지 않아도 생계 꾸리기가 족하며 농부와 장인들이 또한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충족하다. 그래서 이 산에 사는 백성은 풍년 흉년을 모르므로 부유한 산이라 부른다. ……경상좌도는 땅이 모두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지만 우도는 기름지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 지역은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물산이 비교적 넉넉하였다. 그리고 남북의 관문과 산길을 비롯하여 섬진강 남강 등을 따라 발달한 수운과 장시 등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① 서림공원

 

 

■ 서천리 서하동 돌장승(중요민속자료 제20호)

남원에서 운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림공원이 있다. 이곳에 서림숲 또는 선두숲이라고 하는 당산이 있다.

당산거리 거리 양쪽에 남북으로 防禦大將軍과 진서대장군이 마주보고 서있다.

왼쪽 방어대장군은 2.2m로 깔대기 모양의 모자를 쓰고있다. 퉁방을 눈, 콧방울이 좌우로 넓게 벌어졌고 입술은 일자로 다물어 험악한 인상이다.

진서대장군 2.07m로 베레모 비슷한 모자를 쓰고있다.  퉁방울 눈에 눈동자를 이중으로 새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 다섯 개를 양각하였다.

<남원군지>에 의하면 진서대장군이 여자로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한테 얻어맞아 목이 부러졌다고도 하고,

두 장군이 서로 싸우다가 목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목이 부러져 연결된 자국이 있다.

어디로 보나 남장승이지 여장승은 아니다.

 

언제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상사 장승과 닮아 약 300년 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진서대장군은 1989년에 도둑맞았다가 다시 찾았다.

 

이곳은 지리산 자락임에도 불구하고 농업생산이 풍부하여 삼한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여러 세력들이 겨루던 장소였다.

왜구들이 진주를 거쳐 쳐들어오던 통로이며, 항상 외래 세력의 침입에 마음 졸이며 살던 운봉 사람들에게는 장승은 풍요를 빌고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 일대의 장승들은 농사로 사는 건강하고 굳센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림공원의 장승은 눈을 부라리고 사악한 존재가 들어오는가 살피고 있다.

운봉은 풍요한 농업생산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삶은 풍족하였다. 그들의 공통체가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다소 배타적인 마을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 마을에 들어가려면 약간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남의 마을에 들어가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디로보나 좋은 태도이지 비난할 일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영악해서 인가. 장승은 억지로 무섭게 장승은 보이려는 듯해 무섭기 보다 좀 우습다. 장승은 나에게 '어서 오시게. 여기까지 온다고 힘들었지.' 하고 넌즈시 속삭이는 듯하다. 

 

 

 

■ 박봉양 기념비 

운봉 사람 박봉양은 1894년 갑오농민 전쟁 때 민보군을 조직하여 김개남 부대의 운봉, 함양 등지로의 진출을 막아낸 것을 기념하는 비이다. 높이 2.5m 너비 1m 폭 30cm 정도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흔적이 보인다. 갑오농민전쟁이 평정된 뒤 이를 평가하는 역사적 시각이 달라 쓰러지기도 하고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하나의 역사적 유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농민군(김개남 부대, 김개남은 없다)은 지리산 북부 영호남의 요충지인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군은 11월 남원 산동방 부동촌까지 나아가 진을 쳤다. 운봉의 민보군 2천여 명은 관음재에 진을 치고 맞섰다. 농민군과 민보군의 싸움은 11월 14일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이 싸움에서 수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농민군은 남원으로 퇴각한 뒤 3천여 명의 병력으로 남원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박봉양은 전주 병영의 지원을 받아 군세를 강화한 뒤 11월 25일 운봉을 출발하여 반암방 ‧ 원촌에 진을 치고 남원성 공격의 기회를 살폈다. 이를 알아차린 농민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 28일부터 민보군의 남원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민보군은 남원성의 네 성문을 포위한 채 남문을 주공격 목표로 삼았다. 민보군은 성 주변에 섶을 쌓고 불를 질렀고, 대나무 사다리를 통해 성위로 올라 공격했다.

이로써 성이 함락되고 농민군은 북문을 통해 달아나 흩어지고 말았다.  

 

 

 

서하동 당산제당이라는 석물도 있는데, 음력 정월 초하루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비받침에 알터를 만들었다.

 

  

감사 허후윤 청덕비 비머리에도 여러 개의 알터가 있다.

감사의 비에 누가 감히 아런 짓을 했을까? 어쩌면 그 자손들이 조상의 비에 알터를 만들고 조상에게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빌었을 것이다.

  

 

② 서림공원을 지나 양묘장~남천변을 끼고 걷는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남천은 엄천강으로 이어지고, 다시 경호강과 만나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행정리 왼쪽 국도 변에 수백년된 노송 30여 그루가 늘어선 송림공원이 있다.

 

 

 

행정마을숲으로 간다. 

 

 

■ 행정리 서어나무 군락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 유한킴벌리가 공동 주최한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전국의 마을숲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했다.

평소 주민들의 적극적인 숲 보호 노력, 자연과 사람이 공생하는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게 한다는 점이 인정되어 선정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탁 트인 들판에 자리잡아 겨울에는 매서운 북픙으로 마을에 냉기가 감돌고 마을의 좋은 기운은 밖으로 빠져나가 풍수상으로는 좋지 않았다. 한 스님의 권유로 마을의 허한 부분을 비보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마을 숲으로 등록되어 있는 450평의 서어나무 군락, 나무들의 수명이 200년은 훨씬 넘었을 것이라는 설명에 그 역사가 말해주는 웅장함과 장대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나무들은 서어나무 수피의 특색인 회색에 검은 얼룩이 섞여 마치 보디빌더의 팔뚝 근육처럼 울퉁불퉁 튀어나와 일명 머슬트리(Muscle Tree), 즉 근육나무라 불리는 모습 그대로이다.

식물의 천이과정 마지막 단계에서 적당한 습도와 온도를 가진 토양위에서 안정된 산림 군락을 이루는 것을 극상림 이라고 한다.

산림 생태계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극상림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가 바로 서어나무이다. 그런 서어나무들이 마을 입구에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행정리 마을의 축복일 것이다.

 

 

여름의 서어나무

  

 

 

 

 

 

임권택 감독이 200년에 만든 영화 <춘향뎐>의 춘향이 그네 타는 장면을 여기서 찍었다고 한다.

 

 

④ 가장마을

호남지방에는 두레와 관련된 모정이 많다.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은 여기에 모여 마을의 문제들을 의논하고, 피곤한 농사일 도중 쉬기도 한다. 요즈음에는 초가는 없어지고 대부분 기와지붕으로 뀌귀었고, 유리창운도 달았다.  

 

 

가장마을을 지나

 

 

 

⑤ 덕산저수지를 왼쪽으로 끼도 돈다. 오른쪽으로 호화분묘 동복오씨 묘원이 있다.

 

 

 

  

 

 

 

 

 

⑥ 행정마을에서 5㎞쯤 가면 노치마을이다. '노치'라는 이름은 '고개길 가의 마을' 정도의 뜻일 것이다.

노치마을  입구에 돌무더기서낭이 있다. 이런 모습은 서낭당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다. 훗날 중국의 영향으로 성황당이라 하여 당집을 짓고 신체를 상징하는 위패나, 영정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서낭신은 토지신이고,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사람들은 출입할 때마다 절을 하고, 일년에 한두 번 서낭제를 올리고 공동체의 풍요와 화합을 기원한다. 

꼭대기에 있는 선돌은 본디 남근석을 올렸다. 강원도 강릉에는 남근석을 올린 돌무더기 서낭당 여러 곳에 있다. 당집을 지어 감추어 둔다.

  

 

 

 

 

노치마을은 바로 백두대간 주능선이 지나가는 마을이다.

마을앞 도로가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노치마을에는 요즈음 보기 드문 샛집이 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초가집과 함께 흔했다.

농촌에서는 볏집을 구하기 쉬우니 볏짚으로 지붕을 이었지만, 산촌에는 볏짚을 구하기 어려워 당연히 주변에 흔한 억새를 베어 지붕을 인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들에게는 명물이 되었다.

또 운봉지역에는 눈이많이 내려 지붕의 경사가 급하다.

 

조일전쟁 때 이곳에 숨어든 왜군 패잔병들이 처음 샛집을 짓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쨋든 일본의 정통 가옥과 닮았다. 

 

텔리비젼 안테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것같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이런 집들이 많았다. 전쟁 중에 많이 타버렸다.

지금 남아있는 집들은 한국전쟁 후 다시 지은 집이다.

 

 

 

 

10분 거리에 회덕마을이 있다. 

 회덕마을의 옛이름은 모데미이다. 사람들이 모였던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고, 지나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요기하며 쉬어간 마을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다니던 살아있는 길이었다.

 

회덕에서 구룡치를 넘어 내송마을(안솔치)로 이어지는 길은 그윽한 숲길이다. 걷는데 2시간쯤 걸린다. 이 길은 오르막이 별로 없어 걷기 편하다. 반대편인 내송~회덕 쪽으로 가면 1시간 내내 오르막길을 가야 한다. 회덕마을은 해발 520m, 구룡치는 580m, 내송마을은 220m다.

 

 

이 길은 옛적 장꾼들이 장보러 다니던 길이다. 남원이나 달궁에서 하루 종일 걸어 회덕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구룡치를 넘어 남원으로 간다고 한다.   

 

  

 

 

회덕마을 정자나무 쉼터, 2012년 4월 29일

 

 

 

회덕마을에서 지리산 둘래길 갈라져, 

구룡폭포 순환길을 따라간다. 

 

 

 

 

⑧ 구룡폭포

 

 

⑨ 비폭등

 

 

 

 

 

⑩ 육모정

 

 

⑪ 춘향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