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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하늘재

추연욱 2016. 4. 12. 13:18



 


백두대간 하늘재


 

아래 글은,  

"대구방 테마 도보 2번째- 천년 세월동안 잠들어 있는 땅, 계립령과 하늘재- 2010년 1월 10일"에서

추계소문의 후기를 옮긴 것입니다.<편집자 注>

 

 

■ 덕주사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신라 진평왕 9년(587)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본래 월악산을 월형산, 덕주사를 월악사라 불렀으나, 신라의 마지막 왕인 제53대 경순왕(927~935 재위)의 딸 덕주공주가 피난와서 마애불을 조성하고 살았다 하여, 산 이름을 월악산, 절 이름을 덕주사로, 절이 있는 골짜기를 덕주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덕주사는 상 · 하덕주사로 되어있다. 지금의 덕주사는 하덕주사이며, 상덕주사는 정상쪽으로 30분쯤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마애불 주변이다. 절에서는 하덕주사가 있는 곳을 절골, 상덕주사를 윗절이라 부른다. 본래 덕주사는 상당히 큰 절로 상덕주사 자리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국군이 작전상 모두 불태웠다.

마애불 주변에는 조성 연대가 불분명한 우공탑, 환적당, 부용당, 용곡당, 홍파당이라 적힌 부도 4기, 기단 석축 등이 남아있다. 

우공탑은 옛날 스님들이 절 건물을 늘리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소 한 마리가 제목을 싣고 나타났다. 그 소가 마애불 밑에 멈추었므로 거기에 법당을 지었다. 소는 제목을 다 실어 주고는 쓰러져 죽었다. 그 소가 죽은 자리에 탑을 세우고 뼈를 보관하여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하덕주사는 1970년대에 중건되어 지금은 약사전, 지장전, 나한전, 산신각 등이 있다.

약사전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1985년에 옮겨온 고려시대 약사여래불 한 기가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의 꿈에 나타나 발견되었으며, 마을의 재해를 막고 아들을 점지해 주었다는 여러 가지 영험담을 지니고 있다. 약사불의 온몸이 성한 데 없이 긁힌 것은 아픈 사람들이 자기의 아픈 곳과 같은 부위를 긁어다 약으로 썼기 때문이다.

 

또 절 앞에는 남근석 세기가 있다. 그중 한 개는 가운데가 부러졌다. 월악산은 음기가 강한 산이므로 음양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세웠으리라 추측된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들을 바라거나 다른 소망을 비는 사람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 마애불(보물 제406호)은 상덕주사 자리 해발 560m에 있는 남향의 높다란 암벽에 새겨져 있다.

높이는 13m이다. 얼굴 부분만 조금 도드라졌을 뿐 어깨 아래는 거의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었고, 신체 표현에서 조형적 균형은 무시되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려 발목까지 닿은 법의 옷주름 표현도 형식적이다. 이런 점은 고려시대의 거대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다.

 

얼굴과 손, 발이 특히 크다. 소발에 큼직한 육계가 있고, 길쭉하고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 가득히 긴 눈과 코, 입이 과장되었으며 턱은 탄력없이 늘어져 고려시대 거대불상 특유의 불친절한 표정을 하고 있다. 목이 없이 머리와 몸이 그대로 이어져 삼도가 가슴께 표현되어있다. 두손은 가슴까지 들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손등을 보인다. 법의 옷주름 표현도 도식화되어 힘없이 흘러내리다가 양다리에서 몇 겹의 타원을 그리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법의 밑으로 세로선으로 표현된 군의 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왔다. 큼직한 두 발을 옆으로 벌리고 섰는데 발가락이 무척 굵다. 발 아래에는 넓은 연화문을 새겨 대좌로 삼았다.

광배는 보이지 않으며 어깨 위쪽에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목조 전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11C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살진 얼굴과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신체와 옷주름 표현, 규모에 비해 조각 수법이 거친 점 등 고려 초기 거대 불상의 조성 추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마애불 왼쪽 기슭을 올라가면 축대와 계단, 초석 등 옛 건물 자리가 있다.

 

 

 

 

 

▴ 월악산(해발 1,097m) - 제천시 한수면과 덕산면의 경계

백두대간의 죽령을 넘어 두솔봉, 문수봉에서 갈라져 북쪽으로 치달은 암산이다. 북으로는 충주호반이 월악을 휘감고 동으로 단양8경과 소백산, 남으로 문경새재와 속리산이 둘러싸고 있다.

산의 동쪽에는 광천, 서쪽에는 달천이 흐른다. 달천은 남쪽 布巖山(962m)에서 시작하여 월악산을 끼고 흐르는 계곡을 월악계곡 또는 송계계곡이라 한다. 이 두 계곡이 산의 북쪽 탄지리에서 만나 충주호를 거쳐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그 어름에 월광폭포, 망폭대, 학소대, 수경대, 자연대, 수렴대 등 8경과 상봉인 國祀主峰(영봉)이 있다. 영봉은 암벽 높이가 150m, 둘레가 4km나 된다.

 

송계계곡 7km 거리에 문화유적들이 있다. 미륵사지, 덕주사, 이곳에서 3.5km 가면 팔랑소, 다시 1km 가면 龍湫, 용바위, 와룡대가 있고, 그 서쪽 언덕에 빈신사지가 있다.

1984년 12월 31일 20개 국립공원 중 17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10시 30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월악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온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이마에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눈길을 걸었다. 

이 길은 오른쪽에 송계계곡, 앞뒤, 양 옆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앞으로 보이는 산들은 거무스름한 실루엩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걷는 것이 더 좋다.

 

 

■ 덕주산성(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

월악산 산마루와 줄기를 두른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2km이다. 산마루와 그 지맥을 둘러 내성과 외성을 갖추었다. 월악산 남쪽 자락 일대는 충주에서 소백산을 넘어 문경으로, 나라의 남과 북을 잇는 도로의 길목으로 전략적 ․ 군사적 요지이다. 그래서 이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 각 시대에 걸쳐 성이 축조되고 보수되었는데 주요 도로의 목을 쥐는 차단성의 역할을 했다.

하덕주사에서 마애불을 향해 올라가다 도중에 만나는 성벽이 내성이고, 덕주골로 들어가면 만나는 첫 번째 성벽이 외성이다.

화강암 자연석을 대강 다듬어 2m 남짓한 높이로 쌓았다. 지금은 많이 무너졌다. 조선시대 송계계곡을 중심으로 쌓은 동문과 남문 북문의 석축 홍예가 남아있다.

 

* 동문은 덕주사로 들어가는 길이 성벽을 끊고 지나가는 지점에 있다. 이 문은 덕주산성 내성의 정문 구실을 했다. 1980년 수해로 문에 이어진 성벽이 무너져 지금은 홍예만 남아있다. 남문은 만폭대를 건넌 산기슭에 남아있다. 산성의 세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다. 송계계곡의 동쪽을 끼고 있는 암벽과 서쪽의 산기슭을 연결하여 막은 차단성(적의 퇴로를 막기 위한 성)이다. 근래에 목조 문루를 다시 만들고 1.7m 가량 높이의 석축 홍예, 이에 이은 성벽 등을 보수하였다. 북문은 송계리 새터마을 민가 근처에 있다. 북문도 홍예만 남았는데 전반적인 축조양식은 동문이나 남문과 같지만 홍예 마룻돌에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덕주산성도 덕주공주가 피난하여 머물던 곳이란 전설이 있다.

 

* 산성 안에는 月岳神祠가 있었다. <고려사>에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한 뒤 이곳으로 진격하자 관리들과 노약자들이 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몽고군이 닥쳐올 무렵 갑자기 바람과 우레가 치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므로 적병들이 이곳은 신이 돕는 땅이라 여겨 두려워 달아났다고 한다.

 

* 조선 고종 때 명성황후가 이곳에 월악궁이라는 별궁을 마련한 적이 있다. 송계초등학교 안에 그 터가 남아있다.

월악궁은 고종 29년(1892)부터 3년에 걸쳐 각 도의 대목을 동원하여 지었으나 갑오농민혁명 이후 일본군이 들어오고,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면서 자연히 무너졌다. 월악궁의 부재들은 1920년 한수보통학교 교사 건축 부재로 쓰이는 등 흩어져 버렸다.

 

덕주산성 남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보물 제94호) -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유물로 보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설법을 “獅子吼”라 한다. 사자가 소리쳐 울면 모든 짐승들이 겁을 먹고 달아나듯 부처가 설법할 때는 모든 악귀들이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빈신”이란 말은 “奮迅”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맹렬한 기세로 떨쳐 일어선다는 뜻이다.

부처가 불법 삼매에 들어가면 사나운 기세로 위엄을 나타내 불법을 믿지 않는 자와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자들을 항복케 하므로 이를 두고 “사자빈신매”라 일컫는 것이다.

사자빈신사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높이 4.5m의 이 탑은, 하대석의 윗부분에는 두터운 테가 조각되었고, 각 면마다 안상이 세개씩 새겨져 있다. 이 안상들은 아래쪽의 선이 안상의 안쪽으로 말려들어 꽃 모양으로 솟은 고려시대 특유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래층기단은 각면마다 모서리 기둥이 있고 두툼한 덮개돌을 올렸다. 덮개돌의 아랫면 가장자리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윗층기단에는 사방을 경계하듯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네 마리의 사자상을 모서리마다 배치하여 윗부분을 받치고, 그 한가운데 두건을 쓰고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한 구를 배치하였다. 사자들과 비로자나불 모두 아담한 체구에 살집이 통통하다. 비로자나불 뒷머리에 나비매듭으로 묶은 두건끈이 표현되었다. 윗층기단 갑석 아랫면은 아래층기단처럼 완만하게 안으로 깎여 들었고, 비로자나불의 머리 위인 한 가운데에는 활짝 핀 연꽃 한 송이가 도톰하게 새겨져 있다. 윗면에는 연꽃잎 열 여섯장을 엎어 새긴 높직한 굄을 두어 1층몸돌을 받쳤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이다.

탑신부에는 몸돌은 5층까지, 지붕돌은 4층까지 남아 있다. 1층몸돌은 유난히 높고 그 위로는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이 있다. 지붕돌 윗면의 경사는 매우 완만하며, 아래 층급받침은 3단씩이다. 지붕 모서리가 들려 올라가서 전체적으로 경쾌하기는 하지만 가벼운 느낌도 든다.

이런 이형양식은 통일신라시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이 남아있는 최초의 예이다.

아래층기단 앞면에 내력을 밝힌 명문이 10행 79자의 해서체로 적혀있다. “대평 2년(고려 현종 13년, 1022년)에 몹쓸 적이 아주 물러갈[怨敵永消] 것을 기원하며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9층탑을 세운다”는 내용이다. 현종 때는 거란족이 빈번히 침입하던 때라 이 탑을 세워 불력으로 거란족의 침입을 막아 태평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닷돈재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닷돈재는 송계계곡을 끼고 내려가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와 이어지고 다시 남한강의 황강 나루로 간다.

이 길은 물자의 통로다. 하늘재를 넘어온 물건들은 닷돈재를 지나 남한강 물길을 이용해 한양으로 간다.

옛 주막에 하루밤 묵는 값이 닷 돈인 탓에 생겼다고 한다. 하루밤 숙박료로는 너무 비싸다.

도적이 길을 막고 닷 돈씩 통행료를 받았다는 전설도 있다.

 

 

 

▪ 12시 10분에 만수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미륵사터이다.

 

 

 

▪ 1시 50분 미륵사터(사적 제317호)에 도착했다.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이다.

문화재청 공식 명칭은 ‘미륵리절터’이다. 1977년 청주대학교에서 “彌勒堂……”란 명문이 있는 기와를 발굴한 것으로 보아 ‘미륵사터’라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여느 폐사지와는 달리 이곳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언제나 북적거린다.

그러나 겨울에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북쪽을 향하여 서있는 미륵불을 바라보시라.

눈으로, 얼음으로 덮인 절터는, 앞쪽 그러니까 남쪽에서 비추는 햇빛을 받아 모든 색깔을 날려버려 절터 전체는 거무스름하다. 이것이 오히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만 보는 것이 아니다. 천 년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옛날 사람들도 이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처럼 느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절의 내력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① 고려 태조 왕건(918~943 재위)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창건했다.

②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때(927~935 재위) 마의태자가 935년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중 이곳에 절을 짓고 머물렀다.

어느쪽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은 분명하다.

③ 고려 제23대 고종(1213~1259 재위 ) 41년(1254) 몽골의 침입으로 불탔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중건하였고,

④ 조선 제14대 선조(1567~1608 재위) 25년(1592) 조일전쟁으로 불탔다.

18C 경 중건했다.

⑤ 1936년 폭우와 산사태로 매몰, 폐사되었다.

⑤ 한국전쟁이 끝난 어느 때 이곳에 세계사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었다.

이번에 보니 세계사는 작은 절이 아니고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절터 입구에 석조물 부재들이 눈에 덮혀 있었다.

눈을 걷어 내니 눈 속에 이처럼 아름다운 연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당간지주의 부재들이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거북 비받침이 있다.

거북이 지고있던 비는 사라지고 비좌만 뚜렷이 남아있다.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만들었다. 크기로 말하면 길이 6.4m, 너비 1.5m, 높이 0.8m로 거북을 비석 받침으로 쓰는 동양문화권의 최대 귀부이다.

그래도 코와 눈은 사실적으로 만들었다. 거북의 어깨쯤에 위로 오르는 계단과, 새끼 거북 두 마리가 앙증스럽게 새겨져 있다.

옛 사람의 장난기는 멋이 되어 천 년 세월이 지난 우리에게 조용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면 사각석등이 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의 석등이다.

  

 

 

뒤에 오층석탑(보물 제95호)이 있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바위에 단층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올렸다. 그래서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칸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다.

찰주가 굽혀진 채로 있다. 10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높이는 6m이다.

 

 

이어 전형양식의 8각석등이 하나 있고,

 

 

석등 화창을 통해 본존불을 볼 수 있다.

이런 대표적인 곳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화창으로 보는 석가모니불은 참 신비롭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위 위에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이라는 둥근 돌이 있다. 지름은 1.5m쯤 된다.

절에서는 이 돌을 보주탑이라 한다.

 

 

절터 가장 뒷쪽에 석굴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이 있다.  

미륵리 석불입상은 본디 석굴 법당 안에 세워졌으나 법당이 불타고 노천에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석굴법당이 불탔다면 이 불상도 지금처럼 온전하게 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뒤에 얼굴 부분을 다시 만들고 갓을 씌웠을 것이다. 얼굴이 유난히 흰 것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준다.

전체 높이는 10.6m이다. 좁은 어깨는 발끝까지 같은 너비로 이어져 몸 전체가 마치 돌기둥 같다. 가슴 앞에는 왼손에는 연꽃 봉오리로 보이는 것을,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아 위로 올렸다.

 

 

 

 

 

 

▪ 절터 앞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오른쪽으로 院터를 발굴하고 있다.

  

 

다시 남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나그네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고개를 넘어 문경시 갈평 삼거리까지가 하늘재이다.

2시 50분 이곳을 출발하여 이른바 하늘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鷄立嶺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신라 제8대 아달라니사금 3년(156)에 鷄立嶺길을 열었다.

<삼국사기> 45권 제 5 온달전에,

고구려 제26대 영양왕(590~618 재위) 1년(590)에,

온달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라는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그곳 백성들이 통한하여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대왕께서 신을 어리석고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내어 주신다면 한번 나아가 싸워 우리의 땅을 회복하겠나이다” 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은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때 맹세하기를, “내 雞立峴과 竹嶺 의 서쪽땅을 우리 땅으로 돌리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아단성’은 서울 부근 아차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고,

또 고구려때 영춘의 지명이 을아단이었으므로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은 곧 지금의 영춘이라고 보기도 한다.

 

③ 신라 선덕여왕 14년(644)에 김춘추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이때 보장왕은 “痲木峴과 죽령 땅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 하고 김춘추를 연금한다.

 

④ <고려사>에 大院嶺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종 42년(1255)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어……”

⑤ <세종실록 지리지>에 麻骨岾에서 烽燧했다는 기록이 있고,

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계립령을 사람들은 麻骨岾이라 한다.”고 했다.

 

'鷄立嶺'은 우리말 '지릅재'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삼[麻]의 껍데기 벗기면 하얀 목질의 고갱이가 있는데 이것을 '지릅'이라 한다.

뜻을 한자로 옮기면 '麻骨'이 된다. 그러므로 계립령, 지릅재, 痲木峴, 麻骨岾은 같은 말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니사금(154~184 재위) 3년(156)에 "계립령길을 열었다" 할 때의 계립령은 문경시 갈평삼거리에서 오늘날 말하는 하늘재를 넘어 미륵사지를 거쳐 오늘날의 계립령을 지나 수안보까지 길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고려 때 大院嶺이란 이름이 나타난다.

삼각점에 해당하는 미륵사터에 院이 생기므로 이런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참이 전국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것이 고려 때이니 절에 院을 두고 대원사 또는 미륵대원이라 불렀을 것이다. 

미륵대원이 조성되면서 계립령 고갯길이 나누어져 '대원령'과 '麻骨岾'이란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하늘재라는 이름은 언제 생겼을까?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기록으로는 조선 제28대 고종(1863~1907 재위) 19년(1882)에 나온 鄭混의 <進齋集> 3권에 ‘寒喧嶺’이란 이름이 보인다. 하늘재라는 이름을 이렇게 음역했을 것이다.

 

이 고개의 이름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신라 아달라왕 때 열었다는 '계립령'은 오늘날의 문경시 갈평 삼거리에서 미륵사터를 지나 서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꺾여 오늘날 계립령이라 하는 길을 따라 수안보까지를 말했다.

고려 말 미륵사와 미륵대원이 이루어지면서 갈평 삼거리에서 미륵대원까지를 대원령,

미륵사에서 수안보까지를 옛 이름 그대로 계립령이라 하였다. 하나의 고개가 둘로 나누어 진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어느때부터 대원령을 하늘재라 불렀다.

 

여기에는 문경새재가 개척되면서 지름길인 새재는 양반, 관리, 평민들만 다닐 수 있었다. 소나 말, 우마차를 끄는 하층민들은 멀리 대원령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층민들은 그 먼 길을 ‘하늘만큼 먼 길, 하늘만큼 높은 길’이라는 뜻의 하늘재라는 이름으로 그 고통스러움을 표현했을 것이다. 

 

미륵사터에서 하늘재 정상까지 3.2km는 우리가 좋아하는 흙길이다. 아니 지금은 눈길이다. 약간 오르막이다.

 

 

 

 

 

 

 

 

 

 

3시 15분 하늘재 정상(해발 525m)에 도착했다. 하늘재 정상은 좁은 안부이다.

  

 

서쪽 봉우리에 오르니 2009년 4월에 세운 백두대간이라 쓴 돌비가 서있다.  

이곳에는 제법 널찍한 공간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아아들처럼 즐겁게 놀았다.

 

 

 

뒤로 보이는 산이 포암산이다. 이름 그대로 베를 널어둔 모습이다. 

동쪽으로 포암산, 하늘재를 거쳐 서쪽으로 탄항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문경새재 제3관문, 조령산으로 흘러간다.

 

돌비 옆면에 이런 지도가 새겨져 있다. 

    

   

 

3시 50분 버스를 탔다. 여기서 갈평삼거리까지 7.8km이다.

이 길에는 황정, 수새골, 꼭두바위, 중점, 관음, 포암 등 마을이 있다. 이들을 합쳐 관음리라 한다.

황정은 계곡 곁의 정자 이름에서, 꼭두바위는 뒷산 바위에서, 중점은 사기점에서 온 이름이다. 포암은 배바위에서 따온 이름인데, 본디 이름은 門幕이다. 옛날 고구려와 신라의 국영일 때 낮에는 관문을 열고 밤에는 닫았다는 내력이 있다.

 

조금 내려와서 관음리 석불입상을 보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이제 보호각이란 작은 감옥에 갇혀 계신다.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부처님은 심하게 마모되었다.

부처님의 코와 얼굴은 아들을 낳지 못해 고통당하는 많은 여인들에게 아들을 주고, 당신은 이렇게 무아의 경지에 들어 의뭉한 모습으로 서 계신다.

어쩔 수 없이 2003년 11월에 찍은 사진을 올린다.

    

 

내려오면 관음리에 반가상과 약사여래좌상이 있는데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갈평 지서에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185호)이 있다.

■ 갈평(관음)리 오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185호) - 문경읍 갈평리 갈평 지서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관음사와 함께 건립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높이는 2.9m 지대석의 폭은 1.5m이다. 탑신부는 일반 석탑에서 보이는 체감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둔중한 맛을 풍긴다. 기단부의 하중대석과 갑석은 한돌이며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반전되어 있으나 물매가 완만하다. 개석은 전체가 두껍다. 옥개석 받침은 각층 4단이며, 5층은 깨어졌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있다.

 

 

사진은 달마루님, 한계도전님, 두발로님, 은정님, 오션님이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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