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길
충청도 쪽 제3관문 조령관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경상도 땅 제1관문 주흘관으로 향한다.
문경새재 제3관문 주차장에서 한참 오르막길을 걸어야 제3관문에 이른다.
조령관 북쪽은 충청도 땅이다. 동쪽으로 난 길은 조령성의 북문을 거쳐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미륵대원으로 가는 길 곧 계립령과 이어진다.
영남대로 문경구간
문경새재길
새재(632m)
조선시대 한양에 도읍함으로써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산줄기를 넘는 고개들이 중요한 나랏길이 되기 시작했다.
동쪽으로는 대관령이, 동북으로는 오랑캐들이 사는 변방으로 통하는 철령이 있어 관북과 관서가 갈라진다.
한양의 남북으로는 전라도길과 의주길이 있었다.
경상도로 통하는 길로 새로 열린 고개가 문경새재이다. 이 무렵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길은 대략 세 갈래의 큰 고개가 있었다.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으면 황간땅,
풍기에서 죽령을 넘으면 단양,
문경에서 새재를 넘으면 충주땅이었다.
본래 이 지역은 백두대간 산줄기를 따라 호서(충청도를 가리키는 말로 제천 의림지 서쪽이라는 뜻)와 영남(문경 새재의 남쪽인 경상도)으로 갈렸으니 고갯길 역시 백두대간을 가로 지르고 있다.
새재는 고려초에 처음으로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때 새재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죽령이 중심 길이고 계립령은 보조적인 길이었을 것이다.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 문경현 편에 초재[草岾]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현에서 서북 19리 떨어진 충주 통로에 있는데 험로가 7리에 이른다”고 적었다. 부산 동래에서 밀양, 대구를 거쳐 새재를 넘고 다시 충주와 서울로 이어지던 내륙 천 리길을 嶺南大路라 한다. 동래에서 서울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대략 360km쯤 된다.
이 길은 대부분 경부선 철도가 들어앉았다. 현재 경부고속도로는 450km쯤 된다.
영남의 선비들은 이 길을 지나 과거보러 한양으로 갔다. 왜국으로 가는 통신사도 이곳을 거쳐 부산에서 배를 탔다.
또 영남에서 거두는 30만 석의 세곡 가운데 20만 석이 새재를 넘어 충주에 있는 가흥창에 쌓였다고 한다.
■ 조령삼로
경상도 문경땅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충주로 가는 고개는 계립령과 새재와 이화령이 있다.
이 세 길을 합쳐 鳥嶺三路라 한다.
조령삼로 가운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계립령이, 조선시대에는 새재가, 오늘날에는 이화령이 그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나 선비는 지름길인 구새재(곧 문경새재)로, 보부상, 일반인은 큰 새재(이화령), 작은 새재로,
하늘재는 소나 말을 동반은 천민들이 다녔다. 그래서 하늘재를 말이 굴렀다는 뜻이 ‘말구릿재’라고도 불렀다.
새재길은 조선 중기의 전성기를 고비로 쇠퇴하게 된다.
조일전쟁 후 늘어난 도적떼들이 자주 통행인을 습격하였기 때문이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등장하자 새재는 그 사명을 다한다. 또 1925 문경과 충주를 잇는 신작로가 이화령으로 나면서 새재는 역사 속의 옛 길이 되었다. 이제 경부선 철길과 경부 고속도로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1981년 문경새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산책로가 단장됨으로써 산책길, 삼림욕장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된다.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에도 사람들이 모여 여럿이 함께 넘었다고 한다.
또 날이 저물면 아래 마을에서 밤을 지내고 넘는다고 한다. 그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어넘는다는 뜻에서 새재[鳥嶺]가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난 고개길이라는 뜻으로 새재라고도 한다.
조령산(1,017m)과 주흘산(1,106m)의 깎아지른 사이로 난 길이라 ‘샛재’가 새재로 되었다고도 한다. 경상도에서 ‘쌔’라 부르는 억새가 많아서 새재라 부른다고도 한다.
※ 새재[조령] 關門들(사적 제147호)과 유적들
새재길에는, 조일전쟁 직후인 1594년 충주 수문장이었던 신충원이란 사람의 건의에 따라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였다. 그것이 고개 정상 동쪽 10리에 있는 지금의 제2관문 조곡관이다. 이어 숙종 때 정상 가까이에 제3관문 조령관과, 문경에서 새재로 들어가는 넘는 초입에 제1관문 주흘관을 두고 성을 쌓았다.
제1관문 조령관에서 제3관문 조곡관까지는 6.5km쯤 된다.
1. 鳥嶺關
관문은 조선 숙종 34년(1708)에 건립되었다. 세 관문 중 조령관만 북쪽으로 문이 나있다.
숙종 때의 문루는 1907년 의병 항쟁 때 불타고 지금의 홍예문과 그 위의 누각, 좌우의 석성 135m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문경새재 제3관문 조령관
문이 북쪽인 충청도 쪽으로 나있다.
■ 약수터는 1907년 조령을 쌓을 때 발견했다. 사철 수온이 일정하여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 산신각은 약수터 위쪽에 있다. 산신은 호랑이이다.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 태종 때 새재 길을 개척할 때의 일이다. 문경현감이 조정에 급히 전해야 할 중요한 안건이 있었다. 현감은 신체 건장한 역졸을 선발하여 조정에 올릴 장계를 주어 다음 역까지 전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현감의 명령을 받고 가던 역졸은 문경 새재를 넘어가던 중 새재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호랑이에게 변을 당했다. 이 일을 모르는 문경현감은 조정에 올린 장계의 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문경현감에게서 장계가 오지 않았으니 급히 보고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현감은 장계를 가지고 간 역졸을 찾았으나, 그 역졸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감은 역졸의 행방을 찾은 결과 문경새재에서 호랑이가 먹다 남은 신체 일부와 행장을 찾았다. 이에 현감은 다시 장계가 늦어진 사연을 조정에 알리니 태종은 크게 노하여 봉명사를 새재에 내려보내 산신령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봉명사는 문경새재에 도착하여, 산신령을 잡으려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산신각에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낸 후 혜국사에 머물면서 산신령을 잡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은 보름이어서 달이 밝았는데, 삼경쯤 되자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호랑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더니 곧 잠잠해졌다. 이튿날 새재 산신각 앞에 가 보니 큰 호랑이가 죽어 있었다. 봉명사는 왕에게 호랑이 가죽을 바치고 전후 사실을 알렸다.
그후 새재에서는 더 이상 호환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있은 후 錢氏라는 여인이 혜국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나는 새재 산신령이오. 나라에 죄를 지어 아직 용서받지 못했으니 나라에 상소하여 죄를 씻게 해 주시오”하고 간청했다. 그녀는 즉시 새재 산신령 사죄 상소문을 조정에 올려 산신의 죄를 면하게 했다.
주흘산 서낭신
2. 鳥谷關(해발 380m)은 세 관문 가운데 가장 먼저인 1594년에 세웠다. 문루는 1975년에 복원한 것으로 옛 이름은 鳥同門이었다. 지금은 조곡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높이 4.5m쯤 되는 석성이 관문 동쪽으로 400m 서쪽으로 100m 가량 뻗어 있다. 동쪽으로는 조령산으로 서쪽으로는 주흘산으로 연결되는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제2관문 조곡관
■ 이어 동화원터가 나온다.
■ 문경새재 노래비
조곡관을 들어서면 ‘옛 오솔길’을 알리는 나무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조금 올라가면 있다.
<새재 아리랑>의 노랫말은 이렇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좋아 / 큰애기 손길에 다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제 /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에로틱한 사연을 천하지 않은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서민들의 발랄하면서도 역동적인 삶의 모습과, 한편으로 삶의 무거움도 표현되어 있다.
■ 산불됴심비(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26호)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고졸한 필치로 “산불됴심”이라 새겼다. 조선 후기에 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 交龜亭址는 떠나는 관찰사와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곳이라 한다. 신임 관찰사를 맞아 술자리를 벌였던 곳으로 짐작된다.
성종 15년(1484)에 건립되었다.
金宗直(1431~1492)은 교귀정에서 이런 시를 지었다.
交龜亭上傲乾坤 교구정에 올라 하늘땅을 즐기는데
斗覺霜華點鬢根 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
一水宮商風自激 한 가닥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하고,
天岩圖書日將昏 일천바위 그림 같건만 날은 점차 저물어 가누나.
詩因寫景窮飛鳥 시로써 경치를 읊으니 새는 보금자리 찾아 헤매고,
淚爲傷懷讓斷猿 눈물로 회포를 되씹으니 원숭이도 울음을 멈추도다.
南路己銷雙斤堠 남쪽길 두 이정표는 이미 어두워 사라져만 가는데,
今明今夜宿何村 아, 달밝은 오늘밤 어디에서 머물고.
■ 선정비들이 죽 늘어서 있고, 이어 조령원터가 나온다.
■ 조령원터
院은 공무나 사사로운 용무로 지나가는 길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이다.
장방형 터에 돌담을 쌓고 한 곳에 문을 내고 긴 돌을 가로 얹었다.
1977년의 발굴 결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집터가 나왔는데, 옛날 온돌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온돌지” 팻말이 꽂힌 곳은 고려시대 건물 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된 곳이다. 북방에서 내려온 온돌 난방 방법이 고려시대에 이미 이곳까지 내려 왔다는 이야기이다. 온돌 난방 방법이 남부지방까지 일반화된 시기가 조선 중기 이후라는 견해가 일반적인데 비추어 매우 흥미있는 자료이다.
지금은 흙으로 덮어 버리고 팻말만 세워 놓았다.
■ 새재 서낭당
관문을 들어서면 새재 성황신을 모신 성황당이 나온다. 성황신은 아름다운 처녀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숙종 26년(1700)에 세웠고, 현종 10년(1844)에 다시 지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최명길(1586~1647)이 어릴 때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만나러 안동으로 가는 중에 새재를 넘을 때의 일이다. 그때 한 젊고 아름다운 여인 뒤를 따라오면서 말을 걸었다. “험한 산길이라 여자 혼자 무서워서 갈 수 없으니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최명길은 그녀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는 사람이 아니고 새재 서낭신인데 안동에 사는 座首 아무개가 서낭당에 걸린 비단 치마를 훔쳐다가 딸에게 주었기에 죽이러 가는 길”이라 하였다. 최명길은 크게 놀랐으나 태연한 척하면서 “인명이 재천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소.” 하고는 용서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산신은 “공은 머지않아 영의정에 오를 몸이요, 청나라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공은 큰 공을 세울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는 흥하니 청과 화친하여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좌수의 딸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공의 체면을 봐서 벌만 줄 것이니 공은 ‘이렇게 이렇게 하여’ 제 체면을 살려주시오”라고 한 뒤 사라졌다. 최명길이 안동에 이르러 그 좌수의 집을 찾아가니 좌수의 딸은 막 숨이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새재에서 본 서낭신이 좌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일어나며 “이제야 오십니까?”하고 인사한다. 최명길이 좌수에게 “새재 서낭당에서 가져온 비단치마를 불태우고 깨끗한 음식을 차려 서낭신에게 제사지내면 딸은 금방 살아날 것이오.”라 말하자 좌수는 곧 시키는 대로 하니 딸은 살아났다.
새재서낭신
■ KBS 대하드라마 <왕건> 촬영세트장이 있다.
■ 이곳을 지나 주흘관 뒤편에 경북 100주년 타임켑슐기념비가 있다.
3. 主屹關
1708년에 세웠다. 세 관문 가운데 제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양 옆의 석축도 온전하며 개울을 따라 水口도 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성벽 동쪽 높직한 곳에 끼여 있는 큰 돌에 “康熙辛丑” 곧 경종 원년(1721)에 별장 이인성이 개축했다고 새겨져 있다.
서쪽 성벽 높은 곳 두 군데에도 명문이 있다. “光緖 庚辰 改築 別將 申永植”이란 명문은 쉽게 읽을 수 있다. 신영식은 성벽 공사 책임자일 것이다. 光緖는 청나라(1875~1908) 德宗의 연호이다. 광서 庚辰년은 광서 6년 곧 조선 고종 17년 1880년이다. 별장은 <大典會通>에 따르면 지방의 산성, 나루, 포구, 보루, 小島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 무관이다.
제1관문 주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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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 박물관은 제일 관문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다. 주흘실은 문경새재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했고, 조곡실은 문경의 의식주, 민속놀이, 인물, 농기구 등을 전시, 조령실은 문경의 특산물과 관광자원을 소개했다.
충주 사람 신충원(辛忠元)은 문경새재 한가운데에 성벽을 쌓았다. 지금 조곡관이라 부르는 문경새재 2관문이다. 신충원은 충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왜군과 맞선 의병이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그저 새재 개울 앞 매바위 길목만 지키면 적은 병력으로도 나라를 지키리라 믿었다. 매바위 앞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 육군 4만 병력이 무혈로 통과한 길목이었다. 성을 짓네 마네 하고 관료들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신충원은 사람을 모아 성을 쌓았다. 신충원을 찾아가 의지하는 전라·충청도 피란민들로 산중이 가득했다. 1594년, 임진왜란이 터지고 2년 뒤 이야기다. 역사는 이후 황당하게 흘러갔다.
영남대로와 문경새재
개국과 함께 조선 정부는 전국에서 한양에 닿는 고속도로 9개를 건설했다. 이 가운데 부산에서 한양까지 380㎞ 길을 영남대로라고 불렀다. 경부고속도로보다 48㎞ 짧았다. 걸어서 보름이 걸렸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고개였다. 억새가 무성해 새재라고 했고 새도 넘기 어렵다고 해서 새재라고도 했다.

"토끼비리와 새재 사이에 활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매복시켰어도 능히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험한 요새를 버려둔 채 평지에 나와 싸웠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징비록) "대장 신립(申砬)은 조령을 지키지 않고 달천(達川)으로 물러나 주둔하여 한 차례 접전에 1만 군사가 섬멸되었으니, 말을 하자면 참혹하다."(선조실록)
고니시 부대는 그길로 양평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했다. 탄금대 전투를 옆에서 지켜보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용인을 거쳐 같은 날 한양에 입성했다. 342년 뒤인 1934년 8월 27일 조선 총독부는 두 부대가 입성한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 고적 1·2호로 지정했다. 당시 여행 가이드북 '趣味の朝鮮の旅'에는 이렇게 소개돼 있다.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경성에 들어갔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대한민국 국보 1호, 보물 1호다.
새재를 걷다
전쟁이 끝나고 새재 고개에 평화가 왔다. 문경에 부임한 현감들도 태평천국을 누렸다.
신충원이 2관문을 세우고 근 200년이 흐른 숙종 대에 1관문과 3관문이 축성됐다. 구한말 문경에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 토벌대가 새재를 휩쓸었다. 그때 2관문과 3관문이 무너졌다. 1관문은 6·25 때 전화(戰禍)를 겪었다. 2관문 부근 소나무 밑동에는 일제강점기 후반 군용 연료로 송진을 채취한 V자 상처가 남아 있다.
관문들은 1974년 대대적 보수 끝에 복원됐다.
1976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청년 시절 교사로 있던 문경을 찾았다. 그때 포장도로로 계획된 문경새재 개발이 전면 백지화됐다.
지금 새재길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남아 있다. 새재길은 관광공사가 선정한 '걷고 싶은 길' 1위에 늘상 오른다.
다시 신충원 이야기
유성룡에 따르면 새재에 관문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일본군 통과를 저지한 신충원의 인생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충원이 모집한 사람 중에 노비가 많았는데 노예를 잃은 주인들 비방이 자자했다. 신충원 또한 지나치고 거슬리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이 때문에 끝내 금부에 잡혀 형을 백여 차례 받고 사면이 있어도 풀려나지 못했다." 이후 신충원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없으니, 그 인생이 새재 골짜기에 무성한 물박달나무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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