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수덕사

추연욱 2015. 8. 8. 11:00

 

 

수덕사는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德崇山(해발 400m) 자락에 있다.

<寺記>에는 백제 말 崇濟법사가 창건했다 한다.

이어 무왕 때(600~641) 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했고,

고려 공민왕 때(1351~1374) 懶翁 慧勤이 중수했다 한다.

일설에는 599(신라 진평왕 21) 智命법사가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지명은 진나라에 유학중이었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려 충렬왕 34(1308)에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조선 숙종 14(1688)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시절인 19세기까지도 가야산의 가야사(대원군이 중들을 내쫓고 절을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썼다)보다 사세가 약했다.


그러다가 한말에 鏡虛(1849~1912)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1898(광무 2) 경허의 제자 滿空 月面(1871~1946)이 중창한 뒤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다.

현재 우리 나라 4대 총림의 하나인 德崇叢林이 있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현재 충청남도 일원의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백련당, 청련당, 祖印精舍, 일주문, 범종각 등이 있다.

일주문에 '德崇山 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孫在馨의 글씨이다.







범종각에는 1973년 조성된 무게 6,500근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수덕사에는 현재 비구 선원인 定慧寺, 能仁禪院, 비구니 선원인 見性庵이 있다.

견성암은 일엽스님이 수도하던 곳으로, 1928년 정식으로 안거를 시작해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이다.

오랫동안 정혜사 부근에 있다가 1965년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수덕사 큰절 서쪽에 덕숭산 정상 부근(해발 450m)에 있는 정혜사는 1932년 만공이 세웠다.

큰절에서 걸어서 40분 정도 걸린다.

만공은 1905년 수덕사 뒤 덕숭산 중턱에 金仙臺를 짓고 찾아오는 스님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금선대에는 지금 경허와 만공의 영정이 있다. 그러나 몰려오는 제자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그 위에 정혜사를 만들었다.

정혜사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샘물 보호각에 佛乳閣이라는 현판은 만공스님의 글씨이다.

이밖에도 김일엽(1896~1971)이 기거하다가 입적한 歡喜臺가 있다.

 


* 대웅전(국보 제49)

이 건물은 1937~1940년 사이 해체 수리할 때 1308(충렬왕 34) 건립이라는 먹글씨를 발견하여 건립 연대가 정확하다.


봉정사 극락전은 공민왕 2(1363)에 지붕을 보수하였다. 건립 연대는 이보다 100~150년 앞선 시기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공민왕 7년 왜구에 의해 불타고 우왕 2(1376)에 중수했다.

황해도 황주 신원사 보광전은 1374년에 건립했고, 안변의 석왕사 응진전은 1386에 건립했다.

객사문은 14C 말이다. 그러므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장대석을 쌓아 만든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으로 기둥은 뚜렷한 배흘림을 하고있다.

다른 건물들이 대부분 정면이 더 넓은 것에 비해 이 건물은 측면이 더 넓어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다.

정면은 한칸에 문짝이 셋이 달리도록 칸살이 넓고 옆면은 칸살이 매우 좁다.

이처럼 정면이 기둥 높이에 비해 기둥 간격이 넓은 것은 들이 넓어 개방적인 백제계 건물의 특징이며,

측면에서 보이는 유연함에 비해 강건한 힘이 표현되어 고전적인 이원성을 갖는다.




 

  

 

 

앞면과 옆면의 문짝 창살무늬는 마름모꼴의 사방연속무늬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부안 내소사의 화려함보다 더 고상한 품위를 가지고 있다.

내부에는 2열의 고주를 세우고 앞뒤에 퇴칸을 달아, 좌우 대칭일 뿐 아니라 앞뒤로도 정확한 대칭을 이룬다.

여기에 6각형의 불단을 설치하여 내부 공간에 변화를 주어 그 형태가 장중하고 섬세하다.

지금은 마루가 덮여있으나 고려때의 건물들이 그렇듯이 원래는 전돌이 깔려있었다.


공포 구성은 주심포이다. 주심포 양식은 화려하지 않은 건물에 썼으며 고려시대, 조선초기 건물에 주로 남아있다.

공포가 단순하지만 이 건물은 11량이나 되어 지붕이 큰 편이며 그러므로 맞배지붕으로 엄정하게 처리했다. 맞배지붕과 11량의 아름다움은 옆에서 보면 잘 드러난다.

창방 위쪽 기둥머리에는 파련 모양의 받침을 달아서 항아리 모양의 충량을 받았으며 그 위에 다시 파련대공을 얹어 고주가 받고 있는 가로부재를 받게 했다. 그 위에 지붕의 무게를 받는 우미량이 있다. 이런 장치들은 지붕의 무게가 기둥에 골고루 분산하여 전달되도록 고안된 것이면서도 드러나는 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도록 정교하게 치장되었다.

우미량이나 파련대공의 우아한 곡선은 이 건물이 백제계 건축의 맛을 간직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서 가로선과 세로선, 대각선이 빚어내는 세모와 네모의 비례가 황금비례를 이루어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고려시대에는 벽화로 화려하게 치장했을 벽면에는 단순하게 노란 칠이 되어 있어 부재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유홍준은 문화재 관리국에서 세운 안내표지판이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티내는 무형의 횡포"라고 지적하고,

만약 대웅전에 붙일 간결한 안내문을 쓰라면 "이렇게 쓰겠다"고 한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건물로 현존하는 다섯 채의 고려시대 목조건축 중 하나로 충렬왕 34(1308)에 건립된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조용한 가운데 단정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불당으로서 근엄함을 잃지 않고있다. 건물의 모든 결구는 필요한 것만으로 최소화시키고 여타의 장식을 배제하였으며 기둥과 창방의 연결 고리인 공포장치는 단순한 가운데 힘이 넘치며, 마름모꼴 사방연속무늬의 창살은 이 집의 정숙한 기품을 더욱 살려준다. 특히 이 건물의 측면관의 면분할은 안정과 상승의 조화를 절묘하게 보여주며 거의 직선으로 뻗은 맞배지붕의 사선은 마치 학이 내려앉으며 날개짓하는 듯한 긴장이 살아있다. 배흘림 기둥에 기둥과 기둥 사이가 비교적 넓게 설정된 것은 백제계 건축의 특징으로 생각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지붕골이 조금 높고 길다는 인상을 주고있다. 건물 외벽에도 별도의 단청을 가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림보다 더 큰 조형 효과를 자아낸다. 내벽에서는 1943년 대대적인 해체 수리공사 때 아름다운 야생화를 담백한 채색으로 그린 것이 발견되었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106)

 

 


* 대웅전 벽화

예전에는 대웅전 부재들 사이에 작은 벽화가 있었다.

1937년의 해체 중수 꽃꽂이그림, 작은 부처와 나한들, 극락조, 악기를 타는 비천 벽화를 발견하였다. 그림들은 건립 당시의 것이다.

꽃꽂이 그림은 수반처럼 생긴 도자기에 홍련, 백련과 여러 야생화가 한아름 소담스럽게 꽂혀 있는 사실적인 그림이다. 악기를 타는 비천은 풍만한 얼굴에 섬세한 이목구비와 , 유연한 자태와 힘차게 펄럭이는 옷자락 등이 매우 생동하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수리할 때에 모두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갔고, 일부는 모사되었다. 모사된 그림 일부는 일본이이 가져갔고, 떼어 놔두었던 벽화가 한국전쟁 때에 부서져 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없게 되었다. 임천선생이 모사한 야생화 그림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그림은 오선도이며 가운데에 석가여래상과 양편에 보살상, 양쪽 끝에 일월광불을 신선한 색채로 그린 그림이었으나 지금은 서까래에 희미하게 금룡도만이 남아 있다.


*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03) 7층석탑 - 조인정사

문무왕 5(665)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며 여래탑이라고도 불린다. 모서리 일부가 떨어져 나갔지만 균형있는 비례를 갖춘 탑이다.

 

* 미륵불입상 - 정혜사로 오르는 중간쯤

1924년에 만공이 세웠다. 7m 넘는 거대한 체구에 굵은 기둥처럼 몸체를 새긴 것하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이중의 갓을 얹은 모습이 관촉사 미륵불의 계보를 따르고 있다. 불상으로서의 위엄이나 우아함보다는 소탈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 만공탑 만공스님의 부도이다. 팔각기단에 팔각기둥 셋을 받치고 위에 둥근 모양의 몸돌을 얹었다. 만공스님의 제자인 동경미술학교 출신 박중은이 1974년에 세운 현대식 부도이다.

 

경허 만공 일엽

경허(1849~1912)스님은 속성은 宋氏, 법명은 惺牛, 법호는 鏡虛이다. 한말에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이다.

아홉살 때에 과천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한학과 불경을 익혀 1871년에는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었고 따르는 문하가 70~80인에 이르렀다. 서른살 때인 1879년에 길을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났는데 돌림병이 돈다고 마을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에 있는 큰나무 밑에서 밤새 시달리다가 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고 있었음을 깨달아 새로 발심하였다. 이후 한손에는 칼을 쥐고 목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놓아 졸음을 쫓으면서 정진하였다. 그뒤 개심사와 부석사를 오가며 후학을 지도하여 선풍을 크게 떨쳤다. 깨달음이 크므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선의 일상화를 추구하여, 문둥병 걸린 여자와 달을 동침하는가 하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기도 하는 일화를 많이 남겼고 파계승 소리도 들었다.

1904년에는 사찰을 떠나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쓰고 이름도 박란주로 고치고는 서당 훈장노릇을 하며 살다가 1992 4 25일에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만공(1871~1946)스님은 법명은 月面, 속성은 송씨였다. 경허의 제자로 일제강점기에 우리 불교를 지킨 이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게송을 읊다가 문득 깨달아 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수덕사에 금선대를 짓고 참선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함께 가던 중이 다리가 아파서 더는 가겠다고 하자 갑자기 남편과 함께 밭에서 일하던 아낙을 끌어안으니 남편이 소리소리 지르며 쫓아오는 바람에 힘껏 내달아 산을 올랐다. 나중에 중이 그런 짓을 했느냐 질책하자 그게 자네 때문일세. 바람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하며 모든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일깨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일화는 스승인 경허의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이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에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조선 31본산 주지들을 불러 조선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 하자, 총독부 정책에 순응적이던 다른 주지들과는 달리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31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일엽(1896~1971)스님은, 본명은 金元周이다. 출가하기 전에 신여성으로 문필가로 날리던 이였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일본에 건너가 수학하였으며 화가 나혜석과 함께 대담한 행동과 필설로 여자의 사회활동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일깨웠다.

1920년에 문학활동을 시작해 문예지 폐허동인으로 참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 간행하였으며 1962년에 나온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 많이 알려져있다. 20세기까지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1933년에 수덕사에서 입산하여 만공의 제자가 되었다.

 

수덕여관과 고암 이응로

여관 뒤뜰에는 화가 고암 이응로(1905~1992) 새긴 바위그림이 있다. 그림은 이응로가 1960년대에 유행했던 문자추상이다. 넓적한 바위 두채에 새겨진 글들은 한글 자모들이 풀어져 서로 엉키면서도 아름답게 풀려 가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문자추상은 동양화를 했던 이응로가 서양에 건너가 추상미술에 접하면서 동양의 정신을 서양식 방법으로 풀어내려 동도서기의 시도였다. 사군자에서 출발한 이응로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정신과 기법을 접합시켜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개척해 사람이다.

바위그림들은 이응로가 동백림 공작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요양하던 시절에 새긴 것이다. 1968년에 일어난 동백림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당시 유럽에 있던 이응로와 윤이상 문화 예술인이 양아들을 만나는 등의 이유로 북한에 다녀 것을 빌미로 공작원으로 몰아 만든 사건이다.

당시 수덕여관은 부인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응로가 이곳에서 머무를 때는 이미 이혼하고 재혼하여 프랑스에서 삶을 꾸린 뒤였다. 홍성 사람인 박귀희부인은 홀로 수덕여관을 꾸리며 지내다가 남편이 동백림사건으로 잡혀 들어가자 온갖 옥바라지를 하고 이곳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까지 시켰다. 그러나 이응로는 바위그림만을 남긴 다시 파리로 떠나버렸다.

1992 회고전이 열리기까지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나 부인은 여전히 자리에서 홀로 이응로의 그림을 지키고 있다. 이응로는 회고전이 열리던 도중 파리에서 죽었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

국보, 보물의 지정내용은 문화재청장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유형문화재 중요한 것을 보물로 지정할 있으며,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있도록 되어 있다.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특히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거나

제작연대가 오래고 특히 시대의 대표적이거나

제작의장이나 제작기술이 특히 우수하여 유래가 적거나, 형태, 품질, 제재, 용도가 현저히 특이하거나

특히 저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것을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

국보와 보물의 보존가치의 차이점은 없다.


외래품도 국보나 보물이 있다.

예를 들면, 국보 42(송광사 목조삼존불감), 국보 168(백자진사매국문병), 보물 393(전등사종), 보물 559(유문칠우), 보물 560(진솔선예백장동인), 보물 602(이이 수필 격몽요결), 보물 624(유리제대부배), 보물 635(금제감장보검-미추왕릉), 보물 904(그리스 청동투구), 보물 1095-(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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