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조병화/ 가을, 노을, 세월, 겨울

추연욱 2014. 8. 29. 21:27

 

가을

 

조병화

 

전투는 끝났다

이제 스스로 물러날 뿐이다

긴 그 어리석은 싸움에서

그 어리석음을 알고

서서히, 서서히, 돌아서는

이 허허로움

 

, 얼마나 세상사 인간관계처럼

부끄러운 나날이었던가

실로 살려고 기를 쓰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애절한 일이 또 있으랴

 

가을이 접어들며 훤히 열리는

외길, 이 혼자

이제 전투는 끝났다.

돌아갈 뿐이다.

 

 

노을

 

조병화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세월

 

조병화

 

잊어야지

잊어야지

하면서, 잊어지지 않은 채

, 여름, 가을

올해도 어느덧 세월 갈리는

바람의 언덕

밀리며

밀리며

이 인간의 세계

쓸쓸한 건 그 저문 풍경이다

 

가진 사람이나

갖지 않은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은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동행하면서

동행하면서

이 혼자

이 혼자를 견디며

세월을 넘는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이 비밀

하면서.

 

 

겨울

 

조병화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 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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