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안도현

추연욱 2014. 7. 1. 19:33

 

철쭉꽃

 

안도현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열일곱 살 숨가쁜 첫사랑을 놓치고 주저앉아서

저 혼자 징징 울다가 지쳐 잠든 밤도 아닌데

회초리로도 다스리지 못하고

눈물로도 못 고치는 병이 깊어서

지리산 세석평전

철쭉꽃이 먼저 점령했습니다

어서 오라고

함께 이 기찬 산을 넘자고

그대, 눈 속에 푹푹 빠지던 허벅지 놓이만큼

그대, 조국에 입 맞추던 입술의 뜨고운만큼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단풍

 

안도현

 

보고 싶은 사람 때문에

먼 산에 단풍

물드는

 

사랑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가을엽서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기다리는 사람에게

 

안도현

 

기다려도 오지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겨울편지

 

안도현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안도현,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첫사랑

 

안도현

 

그 여름 내내 장마가 다 끝나도록 나는

봉숭아 잎사귀 뒤에 붙어 있던

한 마리 무당벌레였습니다.

 

비 그친 뒤에, 꼭

한 번 날아가보려고 바둥댔지만

그때는 뜰 안 가득 성큼

가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코 밑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돋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안도현

 

그대 떠난 뒤에도

떠나지 않은 사람이여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안도현

 

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대라고 부를 사람에게

그 길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누구 혼자도 갈 수 없는

끝없는 길을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맨 처음 연밥 한 알 속에

 

안도현

 

그대

연꽃이 피는 것을 보았는가

한 송이 물 위로 떠오르며

,

또 한 송이 물 위로 떠오르며

둥둥,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그대 그때 두 귀를 열고 있었는가

 

이 세상이 아파서

이 세상의 모든 상처 위에

상처의 쓰라림 위에 쓰라림의 기쁨 위에

연꽃은 핀다네

뿌리를 뻗어 진흙땅을 다 껴안은 뒤에

꽃으로 하늘을 떠받들어 올리는 꽃

그리하여 향기로

아픈 세상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꽃

 

저 혼자 피는 꽃이 아니라네

여럿이 손잡고 한꺼번에 피는 꽃이

연꽃이라네

연못에서만 피는 꽃이 아니라네

그대의 두 눈동자 속에도 피는 꽃이

연꽃이라네

 

그대

연꽃이 두둥둥둥 피었다고

꽃만 보며 한나절 보내지는 않을 테지

외로운 우주의 중심으로

꽃대를 밀어 올리는 안간힘 속에

맨 처음 땅에 떨어진 연밥 한 알 속에

이미 피어 있는 연꽃도 보고 있을 테지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 

 

 

  

 

그대에게 가는 길 

 

안도현

 

   그대가 한 자락 강물로 내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훌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푸른숲,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