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백월산 · 백월사- 2010년 12월 25일

추연욱 2010. 12. 26. 20:38

백월산·남백월사- 2010년 12월 25일

 

오늘 엄청 추웠다. 30년만에 가장 추운 겨울날이라 한다.

 

백월산 산행을 한다.

늘봄님에게 백월산에 데려다 달라고 많아 보챘다.  

늘봄님, 골든골님, 살자님과 함께 했다.

 

늘봄님의 차로 구포역에서 여기까지 왔다.

창원시 북면 공설운동장,

여기서 시작한다. 10시 20분이다.

 

 

 

처음부터 가파른 길을 올랐다.

 

 

 

능선에 오르니 좁은 등산로에는 낙엽이 깔려있다.

 

 

 

하봉(420m)이다.

 

 

 

내려다 보니 넓은 평야,

 

 

낙동강이 보인다.

 

능선에서는 내내 천주산이 보인다.

 

 

 

 

 

백월산 중봉(426m)이다.

백월산에는 중봉에다 정상석을 세운 모양이다.

사방은 산으로 둘러쌓인 중심이다. 마치 꽃 가운더 있는 씨방 같은 곳이다.

 

 

 

 

 

이 봉우리가 세번째 봉우리다.

 

 

여기서 하산한다. 

 

 

하신길이 매우 가파르다.

 

 

 

 

 

마을로 내려오니 산비탈이 온통 단감밭이다.

 

까치밥이 파란 하늘에 빛난다.

 

 

출발점 공설운동장으로 돌아왔다. 12시 40분이다.

 

점심 먹으러 간다.

다른 곳을 산행하던 아폴론님이 함께 했다.

 

이곳에서 맛있는 국수, 파전을 푸짐하게 먹었다. 

 

 

이곳이 화양고개다. 오고가며 차로 넘었다.

일반적으로 이곳에서 백월산 등산을 시작한다.

 

 

다시 승용차로 남백월사로 간다.

 

현재의 남백월사는 창원시 북면 북계리 백월산 기슭에 있다.

물론 신라 경덕왕 때 지은 남백월사와는 관계가 없고 이름만 빌린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깔끔한 절이 들어서 있었다.

 

처음 지었을 때의 경덕왕 편액을 내렸다는 "현성성도무량수전"은 이름 그대로 있었다.

 

안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그리고 지장보살을 모셨다.

 

 

거기다가 관음전이 새로 생겼고,

관음전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 탱화를 모셨다.

 

 

아기를 안은 관세음보살상도 있었다.

 

 

그러나 미륵신앙과 관계되는 어떤 유물도 보이지 않는다.

 

신라 때의 흔적은 이 기와조각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유물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제법 오래된 것 같다.

 

여기서 바라보는 전망은 대단하다.

 

오른쪽으로 백월산 정상이 가까이 보인다.

 

절 마당에서 앞을 바라본다.

 

 

 

 

▴ 백월산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남백월 이성,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조에, 

 

1. <백월산양성기도기>에 이렇게 말했다. “백월산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있었다. 상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진산이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했다. “옛날에 당나라 황제가 어느 때에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이면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 산이 하나 있고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못 가운데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을 시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를 보내 온 천하를 돌면서 찾게 했다. 사자가 해동에 이르러 보니 그 산에 큰 사자암이 있고 산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花山(산의 몸체는 하나인데 봉우리가 셋이다)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이라 했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 가운데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중국 황제를 빌어 이 산이 여느 산과는 달리 신령한 산임을 말했다. 백월산은 높이나 그 규모로는 대단한 산은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왜 이 산을 신령스런 산으로 생각했는지 범인의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다.

백월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있고, 정상부는 고만고만한 높이의 암봉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은 신령스럽게 바라보았고, 바위산은 수행에 좋다고 생각한다. 불교 이전의 바위신앙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산에 신령이 깃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나라 시인 劉禹錫(772~842)은 그의 긴 시<陋室銘>에서 “山不在高有僊則名 山이 높지 않아도, 神仙이 머물면 名山이요, 水不在深有龍則靈 물이 깊지 않아도, 龍이 머물면 神靈하다 한다.”라는 말은 이런 뜻일 것이다.

 

백월산이란 이름은 ‘밝달’의 한역이다.

우리나라 산 이름에는 백두산을 비롯하여 태백, 소백 기백, 백운, 백암, 백양, 백화 등 ‘白’ 자가 들어가는 산이 많다. ‘백’ 자가 들어가는 산은 여느 산과는 달리 해가 뜨고 지는 신성한 고지를 말한다.

밝음을 숭상했던 선조들의 종교적 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밝음은 빛, 광명만이 아니라 신이나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다. 밝달(밝산)은 바로 신산을 의미한다. 한민족이 사는 곳에는 어디서나 신산을 모시고 그 신산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영위해 왔다.

큰 마을에는 큰 신산이 있고, 작은 마을에는 작은 신산이 있어 그 산을 의지하고 사는 주민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한자가 들어오면서 ‘밝’에 상응하는 글자로 ‘白’자를 썼다. ‘밝산’은 백산으로 번역된다.

부족이 통합되어 더 큰 국가가 성립되면서 여러 신산들이 대소의 차이와 등급이 붙여져 태백, 소백 등으로 나타난다.

 

2. 이 산의 동남쪽 3000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나는 노힐부득이니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 어머니는 미승이라 했다. 또 하나는 달달박박이니 그의 아버지 이름은 修梵, 어머니는 梵摩라 했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 법종곡 승도촌에 옛 절이 있는데 수련할 만한 곳이라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大佛田, 소불전 두 마을에 각기 살았다. 부득은 회진암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壤寺(양진동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도 했고, 박박은 유리광사(지금 梨山 위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편안히 마음을 길러 속세를 떠날 마음을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또 부녀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화장세계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불도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데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풍진 속에 파묻혀 세속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날 밤 꿈에 백호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 같으므로 이들은 모두 한참 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갔다.

 

<사적기>에는 선천촌, <향전>에는 치산촌이라 했다. 선천촌은 한문식으로 바꾼 이름일 것이다. 본디 이름 치산촌은 꽁메마을이었을 것이다. 지금 석산리와 화양리 부근 금산리일 것이다. 琴山도 ‘금메’ 곧 꽁메일 것이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꿩을 꽁이라 한다.

 

박박의 아버지 이름은 수범, 어머니 이름은 범마라 하였다. <미륵하생경>에 미륵의 아버지는 修梵摩, 어머니는 梵摩越에서 따왔을 것이다. 또 부득의 아버지 월장과 어머니 미승은 <阿彌陀鼓音聲多羅尼經>에 아미타의 어머니 月上王, 어머니 殊勝妙顔에서 각각 따왔을 것이다.

박박과 부득의 부모 이름은 본디 그들의 이름이 아니고 성도한 후 성인의 이름을 따 미화했을 것이다.

 

3. 박박은 북쪽 고개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이라 부르고 부득은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磊房이라 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미륵불을 성심껏 구했고, 박박은 미타불을 경례하고 염송했다.

3년이 못되어 기유 4월 8일(709년, 성덕왕 8년) 해는 저물어 가는데 나이 20이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한 낭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行逢日落千山暮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路隔城遙絶四隣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今日欲投庵下宿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慈悲和尙莫生嗔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은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記에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잡념이 없으니 血囊(생식기)을 가지고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낭자는 남암으로 돌아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은 말했다. ……“맑기가 太虛(정적의 경지, 곧 우주의 근원)와 같은데 어찌 오고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비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깨달음)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偈 하나를 주었다.

 

日暮千山路 해 저문 깊은 산길에,

行行絶四隣 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竹松陰轉邃 대나무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溪洞響猶新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乞宿非迷路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요,

尊師欲指津 존사를 인도하려 함일세.

且莫問何人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시오.

 

부득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을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 마침 산고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자리를 준비해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은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고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金液으로 변했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해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화대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관음보살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 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명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절하며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했다.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대우하지 못했으니, 큰 덕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금물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를 이루니 두 부처가 엄연히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 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지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백월산 인근 마을에 살던 두 사람이 같이 출가하여 백월산 남쪽 기슭과 북쪽 기슭에 각각 암자를 짓고 수도했는데 관음보살이 미인으로 변하여 시험한 끝에 남암의 노힐부득이 먼저 합격하여 미륵존이 되었으며, 이 공덕으로 북암의 달달박박 또한 아미타불로 현성성불 했다는 것이다.

 

먼저 관세음보살은 아름다운 아가씨로 변하여 박박달달과 노힐부득을 시험한다.

박박달달은 여인을 물리친다. 산중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힘든 것이다. 박박달달은 수행의 경지가 상당히 높다. 그러나 그는 자기 한몸 파계하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 중생교화라는 불교의 본질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부득은 여자를 받아들인다.

계율은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형식 논리에 얽매이면 그 본질은 보지 못한다. 계율을 정하고 지켜야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방법인가를 비유를 통해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시험은 해산 준비와 목욕이다.

해산과 목욕은 노힐부득이 거듭 태어남을 상징한다. 여인의 육체를 대하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고, 신성하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다. 그런데 노힐부득은 “부끄러움을 애써 참고” 여인을 받아들인다. 그는 중생교화리는 대승불교의 이상을 실천할 만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박박은 “내 마음에 가린 것이 있어 다행히 부처님을 만나고도 도리어 만나지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라 했다. “마음에 가린 것”은 계율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노힐은 이미 세속의 모든 것을 벗어던졌기 때문에 마음에 장애가 없었다. 그만큼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먼저 노힐부득이 해탈하여 미륵존상이 된다. 박박달달은 성도한 미륵의 도움으로 아미타불이 된다. 말을 바꾸면 미륵불이 먼저 성도하고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이 성불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미륵신앙이 아미타신앙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미륵은 법상종의 주불이다. 법상종에는 아미타불도 중요한 신앙 대상이지만 미륵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청정한 계율을 지킬 뿐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중생 구제에는 미륵보다 하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신상은 대승불교의 핵심 신앙이라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보조자로 등장한다. 관세음보살은 본디 아미타불의 보조자이지만 이미 대승불교의 핵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법상종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화엄종에서도 아미타사상을 수용했고 관세음보살은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법상종에서도 관세음보살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신앙대상이었다.

 

이 설화는 대승과 소승의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원효의 불교와 의상의 불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4. 천보 14년 을미(755년) 신라 경덕왕이 즉위하여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남사라 했다. 갑진(764년)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미륵존상을 만들어 금당에 모시고 額字를 ‘현신성도미륵지전’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강당에 모셨는데, 남은 금물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 했다.

 

박박과 부득이 현성성불한 것은 706년이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 지 50년쯤 후에는 이 이야기가 널리 퍼졌을 것이고, 이곳에서 멀지 않는 서라벌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755년에는 경덕왕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경덕왕은 '옳다' 싶었을 것이다. 당시 경덕왕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진골 귀족의 압력으로 왕 16년(757)에 벼승라치에게 월봉으로 주던 보수를 예전처럼 녹읍으로 주게 된다. 이는 신라가 망하게 되는 간접적 원인이다. 경덕왕은 이런 상황을 미륵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화랑 출신 승려 충담사에게 향가 <안민가>를 짓게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이리하여 755년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확인하고 왕 16년(757) 왕명으로 노힐부득이 수도하던 남암을 증축하기 시작하여 왕 23년(764) 7월 15일 완성한다. 금당에는 주존으로 미륵존상을 안치하고 강당에는 아미타상불 소상을 만들어 안치했다.

이때 조성한 미륵불상과 아미타불상은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과 비슷한 양식일 것이다.

 

남백월사는 법상종 사찰이다. 법상종의 주불은 미륵불이다. 8C 법상종 절에는 주불로 미륵불, 강당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염불신앙을 행했는데, 이 신앙은 관음보살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감산사도 이와 비슷하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南月山 서쪽 기슭에 있던 옛 감산사는 성덕왕 18년(719)에 창건했다. 절이 있는 산은 남월산으로 백월산과 닮은 느낌이 든다.

절을 창건한 후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했다고 한다. 감산사 역시 법상종 사찰이지만 금당의 주존으로 미륵불을, 강당의 주존으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두 신앙이 병행했다고 한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와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

 

노힌부득과 박박달달의 현성성불보다 남백월사 창건이 먼저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남백월사 미륵불상과 아미타상을 조성하여 개금하는 과정에 금물이 모자라 주불인 미륵을 먼저 개금하고 남은 금물로 아미타불상을 개금한 사실을 이런 이야기로 만들어 미륵불이 아미타불보다 우월하다는 법상종의 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남백월사는 창건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절 부근에 반야동, 사리터, 중산골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큰 절이 있었던 듯하다.

절은 현재 논으로 변했고, 절터에는 옛날 기와와 토기 조각, 석축의 일부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