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왕릉길- 2010년 12월 14일
고령은 옛날 대가야의 도읍지였다.
고령의 진산인 主山(또는 耳山, 해발 321m)에는 대가야의 왕성인 주산성이 있고, 성안 능선에 지산동 고분군이, 그 아래 펑퍼짐한 곳에 있던 왕궁터는 가야공원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伽倻라는 말의 뜻은?
ⓛ 伽倻, 駕洛, 弁韓의 '변'은 모두 '가라', '갈'의 음훈차자인데 가라는 '分, 岐'의 뜻이다.
마한이 남한, 진한이 동한임에 대하여 변한은 가라한 또는 가라신한(弁辰)으로 호칭되었는데, ‘변한, 가라’ 제국은 원래 진· 마한의 中分적 위치에 있거니와 특히 낙동강 하류 분기지대에 있음으로 이 칭호를 얻은 것이다.
낙동강 하류는 강류가 여러 갈래로 분기됨으로 歧音江(가람)(강의 고어 가람은 이에 연원됨)의 칭이 있다.
양주동, <고가연구>, 일조각, 1970,349쪽.
② 加羅는 城邑을 뜻한다.
이는 '고구려' 또는 '구려'가 성읍의 이름에 기원하는 것과 한가지다.
가야는 가라가 구개음화한 것이다.
이병선,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 형설출판사, 1982, 81쪽.
■ 지산동고분군(사적 제79호)은 고령의 뒷산인 主山에 있다.
뒤로 주산성을 두고 앞에 취락과 평야, 강이 내려다보이는 능선의 정상부에 거대한 봉토를 쌓아 조성했다.
이곳은 왕성과 왕궁 사이에 길게 뻗어내린 능선에 위치한다. 대가야 왕을 비롯한 통치자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된다.
가야 사람들은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며 무덤을 조성했다.
김해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함안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 창녕 비사벌가야의 교동 고분군 등이 모두 그렇다.
높은 곳은 하늘에 가까운 곳이라 하여 주검을 안장했을 것이다.
지산동고분군에는 대형봉토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무덤 200여 기가 있다. 대체로 5~6세기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석으로 짠 상자모양의 돌널에 시신을 안장하는 돌널무덤[石棺墓], 깬돌 또는 깬돌과 판석을 함께 사용하여 덧널을 만든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로 만든 널방에 시신을 안치한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 등이 주류를 이룬다.
정해진 묘역 중앙에 주실을 설치하고 주실 옆에 부곽이나 순장곽을 설치한 다음 원형의 호석을 쌓았다.
무덤 안은 지하에 광을 쌓고 깬돌이나 자연석을 이용하여 네 벽이 서로 엇물리게 쌓았다. 껴묻거리로는 토기등과 피장자가 지배신분인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동관 등 관모류, 갑주류, 목걸이, 금은제 귀걸이 환두대도 등이 있다.
지산동고분군은 20세기 초부터 일본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임나일본부 때문일 것이다. 여러 차례 발굴했지만 출토된 유물들은 행방을 알 수 없고, 보고서도 남기지 않다.
그러다가 1977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가 합동으로 44호분과 45호분을 발굴했고, 이듬해 계명대학교가 중형분 4기, 32~35호분을 발굴 조사하였다. 이 발굴로 무덤의 구조가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구덩식 돌방무덤 등 다양함이 밝혀졌다.
이중 가장 먼저 조성된 것은 35호분, 이후 30호분이 축조되었다.
그후 32호분이 축조되었다. 금동관과 무구류가 출토되었는데, 금동관은 순장 석곽에서 3~11세 사이의 소아가 장착하고 있었으며 주석실 피장자의 노비나 하층계급에 해당하며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왕이 등장했을 것이다. 왕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이런 순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거대한 지산동 44호 45호분 같은 대규모 순장묘를 축조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때가 대가야의 전성기였다.
■ 주산성(사적 제61호)은 고령군 고령읍 중화리 주산의 가장 높은 곳과 동쪽의 능선을 따라 둥그렇게 흙으로 쌓은 내성과, 내성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시작하여 타원형으로 돌로 쌓은 둘레 약 700m의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나 계곡 쪽으로 성벽이 남아있다.
외성 안에는 우물터와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있고, 서남쪽에 연결된 봉우리에 또 하나의 작은 성이 딸려있다. 성안에서는 각종 가야토기 조각과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대가야박물관은 지산동고분군 아래에 있다. 대가야왕릉전시관과 2005년 초에 개관한 대가야역사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1993년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9년 9월에 개관하였다.
국내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주인공이 묻힌 으뜸돌방과 그에 딸린 껴묻거리용 딸린 돌방 2기를 중심으로 하여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한 32기의 순장 돌덧널로 구성된 내부 구조를 복원했다.
발굴보고서를 바탕으로 무덤구덩이에 출토유물과 남아있는 인골 등을 복제하여 넣어두었다.
벽을 따라 출토유물 130여 점을 비롯하여 대가야 다른 고분에서 나온 토기 무구 발갖춤용 관 기타 장신구를 전시해 두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조에,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그 수가 백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조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지증마립간 3년(502) 3월에 “순장을 금지하라고 분부하였다. 이는 전왕(소지왕)이 돌아가자 남녀 각 5명씩 순장하였는데, 이에 이를 금지한 것이다.”
44호 고분이다.
* 금관(국보 제138호)은 고령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유일한 금관이다. 높이는 11.5cm이다.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고 호암미술관에 있다.
이 금관과 함께 금제 팔찌,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오른쪽 봉우리가 주산 정상이다.
창녕교동고분군
함안의 아라고분군
<삼국사기, 제34권, 지리지> 고령군 조에, “본디 대가야국으로 시조 아지아시왕(內珍朱智라고도 함)으로부터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무릇 16대 520년에 이르렀으나 신라 진흥대왕(제24대 540~576 재위)이 이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만들었다.
이를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고 하였다.
김해지방을 근거지로 삼았던 금관가야 건국신화에는 “하늘에서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 여섯 개를 내려주었다. 이중 다섯 개 알은 각 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에 있어서 수로왕이 되었고,
각 읍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가야 쪽의 건국신화는 다르다.
<동국여지승람> 29권 고령현 建置沿革 조에, 최치원의 <釋利貞傳>을 인용하면서, “가야산신 正見母主는 곧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라 하였다. 뇌질주일은 곧 이진아시왕의 다른 이름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다른 이름이다.
정견모주는 단군신화의 웅녀, 주몽신화의 유화, 혁거세신화의 선도산성모 등과 같은 地母神이다.
금관가야 건국신화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는데 비하여 대가야는 토착세력인 가야산신이 건국의 주체로 표현되어 있다.
이 신화는 대가야가 성장하면서 이전의 맹주인 금관가야의 대표권을 넘겨받기 위한 정치적 상징이 있다고 보인다.
삼한시대 고령지역은 半路國으로 불리었다. 이 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적 기반 위에 있었다.
4세기쯤에 이르면 야로면(합천군 야로면) 일대의 철광을 개발하여 힘을 길러 가야의 하나로 성장했다.
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광개토호태왕(고구려 제19대왕, 391~412 재위)의 군대의 공격을 받아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가야 세력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에 낙동강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했던 대가야는 고령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전기가야와 구별하여 후기가야라 한다.
이후 합천지역을 통합하고, 전성기에는 남해안 일부와 아라가야의 영역을 제외한 함양, 남원, 임실, 섬진강 일대까지 영역을 넓힌다.
479년에는 대가야의 왕 荷知가 중국 南齊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으며,
522년에는 대가야와 신라 왕족 사이에 결혼도 이루어졌다. 또 <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는 정견모주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인데, 신라에게 청혼하여 이찬(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를 낳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뇌왕은 곧 뇌질주일의 8세손이다. <삼국사기>에 법흥왕 9년(522) 3월 "가야국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혼인을 청하므로 왕은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을 보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리하여 신라와 가야가 우호관계가 맺어지지만 겨우 7년간 유지된다.
529년 신라는 대가야 지역으로 진출한다.
대가야는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와 백제의 전쟁의 틈에 끼여 낙동강 유역을 장악한 신라의 공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562년에 망한다. 이때의 상황이 <삼국사기>에 제24대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모반하므로 왕은 이사부에게 명하여 이를 토평하게 하고 사다함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이사부가 공격하니 모두 항복하였다.”라 기록하였다.
※ 于勒과 加耶琴
우륵은 대가야 省熱縣 사람으로 嘉實王의 명에 의해 가야금 곡조에 맞는 12곡을 지었다.
그는 그후 나라가 어지럽게 되므로 가야금을 가지고 제자 尼文과 함께 신라의 娘城(지금의 청주)로 가서 진흥왕에게로 귀화하며 가야금을 연주하였다. 이에 왕이 그를 받아들여 國原(지금의 忠州)에 편안히 거처하게 하였다.
551년(진흥왕 12년) 3월에 왕이 그들을 불러 河臨宮에서 악곡을 연주케 하니 각기 그들이 새 가곡을 만들어 올렸다. 이듬해에 왕이 대나마 階古 · 法知와 대사 萬德을 우륵에게 보내어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기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사람이 우륵에게서 이미 11곡을 전해받고 서로 이르기를 “이것은 번다하고 음란하니,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하고, 그것을 요약하여 5곡을 만들었다. 우륵이 이를 듣고 처음에는 노여워하다가 그 5가지의 음조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네가 왕의 앞에서 연주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학업을 마치자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음악을 연주케 하고 이를 듣고 크게 즐거워하였는데, 간신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망한 가야국의 음율은 취할 것이 못됩니다“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가야국이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하였는데 음악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 대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하는 것은 인정으로 연유하여 조절하게 한것이니, 나라의 다스리고 어지러움은 음악곡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하고 드디어 행하게 하여 大樂이 되었다.
가야금은 본래 대가야의 가실왕이 중국의 당나라 악기인 箏를 보고 만들었는데, 중국의 傅玄이 이르기를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가 평평함은 땅을 상징하고, 가운데가 빈 것은 우주에 비할 수 있고 줄의 기둥은 12월에 비겼으니 이것은 仁 . 智의 기구라”하였다. 阮瑀(위나라 문인)는 이르기를 “쟁은 길이가 6척이니 음율수에 따른 것이고, 12줄은 4時를 상징하고, 기둥의 높이 3寸은 三才(天.地.人))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야금에는 두 음조가 있는데, 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가 그것이다.
<삼국사기> 樂志 제1, 新羅本紀 제4 진흥왕조
충청북도 충주사 대문산 기슭에 우륵이 가야금을 타며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탄금대가 있다.
탄금대는 또 조일전쟁 때 신립장군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주산 지산동고분군 오르는 길이다.
이 다리를 건너 소형분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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