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도보여행 후기

구미 금오산/ 채미정 · 맥문동 · 올레길- 2024년 8월 16일

추연욱 2024. 8. 16. 21:07

 

구미 금오산/ 채미정 · 맥문동 · 올레길- 2024년 8월 16일

 

 

 

구포역 7시 9분 출발 무궁화호를 타서,

9시 15분에 구미역에 왔다.

 

 

 

구미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채미정 근처에 왔다.

 

 

지난 7일이 입추, 14일이 말복이었다.

그런데도 금년 여름에는 여전히 한여름이고,

여전히 폭염경보 내려져 있고.

더위에 지쳐 구석구석 들러 보지 못해 많이 아쉬웠다.

 

 

 

채미정

 

채미정 앞 하마비, 9시 20분.

 

 

 

 

그 맞은편에 <회고가> 시비.

조선 정종 2(1400) 조정의 부름에 못 이겨 상경했을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왕조 멸망과 인사의 덧없음과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조이다.

 

 

 

계곡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면 興起門이 나온다.

 

 

 

 

 

 

흥기문이란 이름은 <孟子>盡心章에 나오는 말로, 맹자가 백이의 행동을

百世之下聞者 莫不興起백세 후에도 듣는 이에게 감동을 일으키노라에서 따온 것이다.

 

 

 

안에서 내다 본 흥기문

 

 

 

 

바라보아 오른쪽에 채미정 採薇亭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자다.

정면 3, 측면 3칸의 건물로 한가운데 1칸을 방으로 만들고 자로 우물마루를 두른 건물이다.

 

정자의 중앙에 자리한 방은 온돌로 되어 있고,

방문은 들문의 형식으로 사방에 2짝씩 달려 있는데 모든 문을 들어 올리면 방이 없는 정자의 모습으로 바뀐다.

 

 

 

 

채미정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하는 시기,

두 왕을 섬기지 않으려고 고향인 금오산 기슭에 은거한 야은 길재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길재가 죽은지 350년 후인 조선 영조 44(1708) 선산부사 閔百宗(1712~1781)이 지역 유림들과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그후 1977년 구미시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는 사업을 크게 벌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길재는 고려가 멸망하자 이곳 고향으로 낙향하여 일생을 마쳤다.

이런 길재의 삶이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삶을 마친 은나라의 백이 伯夷 숙제 叔齊 형제의

삶과 닮았다 하여 고사리를 캔다[採薇]는 뜻으로 채미정이라 이름지었다.

 

길재의 충절은 조선 시대 내내 선비들의 기림을 받았고, 역대 왕들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세종대왕을 비롯한 역대 왕들은 길재의 후손에게 세금을 면제하고 관직에 특별 임용하는 특혜가 이어졌다.

숙종은 친히 길재를 기리는 어제시를 짓기도 했다.

 

채미정이 위치한 금오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힘과 기상이 넘치는 바위산이다.

불교를 신라에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 阿道和尙이 이곳을 지나다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金烏]가 나는 것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吉再(1353~ 1419) 호는 冶隱 또는 金烏山人

 

고려말 조선 초의 문인이며 학자이다,

선산 봉계에서 知錦州事 元進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도리사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19세에 상경, 이색 · 정몽주 · 권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개성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고, 그는 성리학을 배웠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하고 이어 1387년 성균관 學正, 이듬해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교육했다.

 

창왕 1(1389) 귀향하여 선산 임천에서 은거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노모의 봉양이었으나 사실은,

고려 왕조가 멸망해 가는 현실로부터 도피였던 것이다.

 

조선 정종 2(1400) 조정의 부름에 못 이겨 상경, 太常博士의 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사퇴하고 다시 귀향했다.

 

 

길재의 太常博士를 사양하는 상소문

 

 

선산에서 후진 교육에 전력,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그에게 성리학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그의 학통이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졌다고 한다.

조선 사대부로부터 節行으로 숭배를 받았다.

 

1400년 상경 시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 시조 <회거가> 한 수가 전한다.

 

고도 개경에 들러 인사의 덧없음과 고려 왕조 멸망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國語國文學事典>, 신구문화사, 1974, 145~ 6쪽.

 

牧隱 李穡(고려 충숙왕 15년(1328)~ 조선 태조 5년(1396),

圃隱 鄭夢周(충숙왕 복위 6년(1337)~ 고려 공민왕 4년(1392),

冶隱 吉再(1353~ 1419)를 고려 삼은(三隱)이라 한다.

하지만 근년에는 길재 대신 陶隱 李崇仁(고려 충목왕 3) (1347~ (고려 공양왕 4(1392)을 넣기도 한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사마천의 <史記>에 전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이 · 숙제는  孤竹 군주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를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아버지가 죽게 되자 숙제는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 했다.

그러자 백이는,

"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아버님의 명이다" 하고 끝내 국외로 달아나 버렸다.

숙제도 또한 제위에 오르기를 즐겨하지 않아 달아나 버렸으므로 中子(백이의 아우이며 숙제의 중형)를 군주로 세웠다.

 

그뒤 백이 · 숙제는 西伯昌(주의 文王)이 노인을 따뜻하게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에 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르고 보니 서백은 벌써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부왕의 木主(위패)를 받들어 武王이라 칭하고,

동쪽의 殷의 紂王을 치려고 하였다.

 

백이 ·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하려고 하니 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된 몸으로 천자를 시살하려고 하시는데 이 어찌 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무왕의 좌우 군사들이 이 두 사람을 베려고 하였으나 太公望(무왕의 軍師인 呂尙)이,

"이 사람은 義人이다." 하고 부축하여 보내게 하였다.

 

무왕은 은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니 천하의 사람들은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러나 백이 ·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周의 녹봉을 먹지 않고,

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마침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아래와 같은 노래를 지었다.

 

오늘도 저 西山(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네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폭력으로 폭력을 보답하고도 그 잘못을 모르는 무왕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 · 순 · 우의 호시절은 자취없이 사라졌구나 神農, ,  忽焉沒兮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我安適歸矣

아아 가자, 죽음의 길로 于嗟徂兮

나의 운명이 다하였구나. 命之衰矣

 

이렇게 해서 끝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史記>, 伯夷列傳.

 

 

 

 

 

 

 

 

 

 

 

왼쪽에 구인재가 대칭으로 서 있고,

 

 

 

求仁齋의 '구인'은 <論語> 述而篇에 나오는 말로,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백이와 숙제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가 求仁而得仁又何怨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후회하겠느냐라 답한데서 유래한다.

 

 

 

 

 

 

그 뒤로 작은 쪽문들이 3개 보인다.

 

왼쪽 쪽문 안에는 경모각

 

 

 

 

 

 

 

 

 

경모각 안에는 길재의 영정과,

肅宗御筆

左司諫吉再 좌사간 길재

歸臥烏山下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淸風比子陵  청렴한 기풍은 엄자릉에 비하리라.

聖主成其美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은

勸人節義興 후인들에 절의를 권장함일세.

 

그 번역글이 게시되어 있다.

 

 

 

 

 

 

 

 

 

 

 

 

경모각 오른쪽, 앞으로 좀 더 나온 편액이 없는 작은 쪽문 안에는 유허비각이 있다.

 

 

 

유허비

 

 

 

야은 역사체험관 수양각에서, 유허비 탁본.

 

 

 

 

 

 

 

 

가장 오른쪽 쪽문 안에는 어떤 건물이 있는지?

채미정 동쪽 쪽문으로 나가 보니 공사 중이었다.

 

 

 

관리사라 한다.

 

 

 

관리사로 가는 문



 

 

 

 

 

구인제

 

 

 

 

 

 

 

 

 

 

 

 

 

 

 

 

 

 

 

야은 역사체험관 앞마당

 

 

 

 

거북(?)이 알을 많이 낳았네.

 

 

 

 

조산백이

 

 

 

造山백이

금오산 서편 자락에 자리한 수점마을 입구와 길 양쪽에 있는 "조산백이"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下堂이라고 하며, 마을 위의 上堂(원당)"과 함께 동제의 대상이다.

지금도 금오산 자락의 여러 마을에 조산백이가 남아 있다.

비보풍수의 의미로 마을 앞이 지나치게 트여 허전하다고 여겨지면 그를 막기 위해 이 조산을 만들기도 한다.

 

조산백이를 설명하는 글을 옮겨 적었다. 편집자.

 

 

 

야은 역사체험관

 

 

 

수양각

 

 

 

 

교지(冶隱先生 贈諡敎旨)

'乾隆'은 청나라 高宗 乾隆帝(1736~ 1795 재위)의 연호이다. 건륭 11년은 1746년이고,

조선 영조 22년이다.

 

조선 영조 22(1746) 조정에서 야은 길재에게 忠節이란 시호를 내린다는 교지이다.

 

내용은 고려 조정의 종사랑 문하주서 본조(조선) 증좌사간 길재에게 忠節로 증시할 것이다.

그 왼쪽에는 충절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성쇠순고 盛衰純固이라 하고, 호렴자극 好廉自克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17391225일에 영조가 賜祭文과 함께 朴璿에게 명하여 치제하였고,

특별히 증시의 은전을 내린 사실이 있다.

 

전시장의 설명을 옮겨 적었다. 편집자.

 

 

 

문화관광 해설사 임경순님과

 

 

 

 

 

 

 

 금오산 맥문동

 

 

 

금오산 맥문동은 채미정 시비가 있는 곳에서부터 금오호텔까지 긴 솔숲산책길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달마루

 

 

 

 

맥문동을 구경하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따라,

 

 

 

 

 

 

 

 

 금오산 올레길

 

올레길 진입구에 우국지사 박희광 선생 상, 11시 20분.

 

 

 

백운교를 건너

 

 

 

 

 

 

 

 

금오정이 보인다. 

 

 

 

많이 가물어 금오지의 바닥이 일부 드러났다.

 

 

 

 

 

 

 

 

 

 

 

 

 

 

 

 

 

 

 

 

백운공원

 

 

 

백운공원은 올레길을 잠깐 벗어나 차도 건너에 있다.

 

 

 

 

 

 

 

 

 

 

 

 

 

 

 

 

 

 

 

 

 

 

 

배꼽마당

 

 

 

 

 

 

 

금오산이 보인다.

 

 

 

 

 

 

 

 

 

 

올레길 전망대

 

 

 

 

 

 

 

 

 

 

 

 

 

 

 

 

 

 

 

 

 

 

 

 

 

 

 

 

 

 

 

 

 

 

 

 

백운교로 돌아왔다., 12시 20분.

 

 

 

경치가 좋은 것 같은데,

대낮 땡볓, 폭염에, 금오지의 물도 많이 빠졌다.

덥고 땀에 온몸이 축축하고,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금오랜드 정류장

 

 

 

국민은행 정류장에 내렸다.

 

 

 

국민은행 정류장에서 구미역은 아주 가깝다.

한데, 왜 '구미역정류장;이 아니고, '국민은행 정류장'인가.

지나칠 뻔 했다.

 

 

구미역에 왔다., 1시 30분.

 

 

 

2시 21분 출발 기차를 타서,

4시 35분에 구포역으로 돌아왔다.

 

 

 

달마루 셀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