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산 솔바람길~ 생태탐방로- 2024년 7월 12일
부산노포 터미널에서 8시 20분 버스를 타고,
9시에 언양 임시 시외버스터미널에 왔다.
언양터미널에서 9시 20분 출발 경산행버스를 타서 운문사 정류장에 왔다., 9시 45분.
3년 만에 운문사를 찾았다.
그 때도 오늘처럼 더웠고,
언양~ 운문사 다니는 버스 시간표도 옛날 그대로다.
큰 버스에서 직은 버스로 바뀌었다.
운문사 매표소
매표소에서 운문사까지 솔바람길,
운문사에서 사리암 주차장까지 생태탐방로다.
오늘 여기서 사라암주차장까지 왕복할 생각이다.
절 구경으로 돌아다니는 것까지 대략 10km쯤 된다.
오래 전의 상처는 아직도.
일제말기, 일제는 전쟁물자 특히 연료가 부족하여,
소나무에 상처를 내 송진을 채취해 기름을 만들었다.
70여년 전 이야기, 그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다.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상처, 그 마음의 얼룩처럼.
오른쪽으로 계곡을 끼고,
운문사 북쪽 담장을 따라,
다시 서쪽 담장 따라.
3년 전에는 없던 건물, 아직 미완성인 듯.
운문사
"호거산 운문사"란 현판이 걸려있는 이 2층 누각이 운문사 정문이다.
2층에 법고와 범종이 보인다.
실은 서쪽으로 나 있는 이 문은 운문사 옆구리 문이다.
누각 아래 통로로 들어가면 왼쪽(남쪽)으로 승가대학 담장이 쳐져 있고,
승가대학과 절을 잇는 불이문은 잠겨있다.
담장 앞에 관음전, 작압전 등 작은 절집과,
오른쪽으로 운문사 처진소나무와 그 동쪽에 긴 절집 만세루,
만세루 오른쪽(북쪽}에 대웅보전,
그 안쪽(동쪽)으로 운문사 동 · 서 삼층석탑과 오백전,
그 북쪽에 비로전(지금은 대웅보전)이 남향으로 서있다.
보물 원응국사 비
圓應國師(1052~ 1144) 學一의 운문사 중창과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고려 인종 22년(1144) 학일 왕사가 93세로 입적하자,
인종은 국사로 책봉하고 원응이란 시호를 내려 비를 세우게 하였다.
비는 높이 2.3m, 폭 0.9m로 비머리와 받침돌은 없어졌다.
현재는 세 조각으로 절단되어 있는 비 조각을 연결하여 하나의 비신으로 구성하였다.
비문의 작성자는 윤언이(1090~ 1149), 글씨는 고려 중기의 명필 坦然 스님(1069~ 1158)이다.
이곳이 승가대학이다.
관음전
항마촉지 석가여래 좌상이 보관을 쓰고있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이런 예가 있다. 이 경우 목걸이, 팔찌 등이 있어 보살같이 표현된다.
인도나 중국과는 달리 목걸이, 팔찌는 없고 보관에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이 목제 불상은 19C에 흔히 만들어진 조선말기 전형적인 항마촉지인 여래상이다.
옷주름도 두세 층으로 나타낸 추상적 형태로 간략화되었다.
치마는 가슴까지 올라가 붙어 아예 허리는 없는 듯 보인다.
상체는 작고 짧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넓고 높다. 상체에 비해 얼굴도 크고 손도 크다.
보관 가운데 화불이 있다. 보관만 보면 관음보살인데 여성의 모습이 아니고 근엄한 부처의 모습이다.
■ 鵲鴨전
지금은 '鵲鴨 작압'이라 불리고 있으나 '오리'는 이 절과 아무 관계없다. '鵲岬 작갑'이 鵲鴨으로 잘못 불렸을 것이다.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의 유래를 알게 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신라 말 고려 초 보양국사가 작탑이라는 전탑 형식으로 초창하였으니,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현재의 형식으로 재건되었다.
'작압 鵲鴨'이라는 말은 보양스님이 까치떼[鵲岬]가 땅을 쪼고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는 작갑사(운문상의 전신)에서 유래한 것이다.
1941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전각으로 바뀌었다.
안에는 보물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 보물 사천왕석주를 세워 두었다.
■ 보물 석불좌상과 보물 사천왕석주
■ 보물 사천왕석주는 지금 석불좌상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나,
원래는 이곳에 세워진 전탑의 탑신 4면이나 혹은 안 벽면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고저를 든 증장천왕, 다문천왕,
불꽃을 든 광목천왕,
칼을 든 지국천왕 등은 천의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서 있다.
신체는 장대하지만 양감이 줄어든 가냘픈 체구, 부드러운 인상 등으로 미루어 보아,
형식미가 진전되었던 신라 말 후삼국 시대 인 900년경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작압전과 관음전 사이로 슬쩍 나타나는 만세루.
불이문 옆에 하늘을 향해 비쭉 솟은 나무를 감고 오른 능소화 한 그루
꽃은 다 졌다.
늘 잠겨 있는 불이문.
■ 보물 동 · 서 삼층석탑과 보물 대웅보전
보물 대웅보전
고려 숙종 10년(1105) 원응국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며, 조선 효종 4년(1653)에 중창하였다.
가운데는 비로자나불을 독존으로, 왼쪽에는 신중탱, 오른쪽에는 삼장탱을 모셨다.
후불벽 뒷면에 관음보살과 달마대사가 나란히 앉아있는 벽화는 보물이다.
서쪽 천장에는 龍架가 매달려 있고, 청의동자상은 악착보살로 불리기도 한다.
운문사에는 특이하게도 극락보전이 두개 있다.
전에는 비로전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언제부턴가 극락보전으로 바뀌었다.
운문사와 오갑사
1. <虎距山 雲門寺 事蹟記>-조선 숙종 44년(1718)에 彩軒스님이 쓴 글-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21년(560)에 한 도승이 지금 운문사 5리쯤 못미치는 곳에 있는 金水洞 계곡에 들어와,
北臺庵터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산과 골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이 우는 소리를 듣고 五靈이 숨어 사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道友 10여 명과 산에서 혈맥을 찾아
‘岬’자가 들어가는 다섯 개의 갑사[五岬寺]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
이때가 567년이었다고 한다.
오갑사는 현재의 운문사인 大鵲岬寺를 중심으로,
동쪽 9000步 지점에 嘉瑟岬寺,
남쪽 7리에 天門岬寺,
서쪽 10리에 大悲岬寺,
북쪽 8리에 所寶岬寺 등이었다.
‘鵲岬’은 ‘까치곳’ 곧 가지산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 註*에 “가슬갑은 혹은 加西, 또는 加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이다. ‘岬’은 俗言으로 ‘古戶(곳)’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호사’(곳절)라고 하니 ‘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9000步쯤 되는 곳에 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嘉瑟峴이라고도 하며,
고개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고 하였다.
* 제4권 意解 제5 圓光西學
오갑사가 세워진 시기는 신라의 발흥기였다.
신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제24대 眞興王(540~ 576)은,
즉위와 동시에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짠다.
우선 각지방별로 세력을 가지고 있던 6부장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힘을 왕실에 묶어두기 위하여 불교를 眞興한다.
왕 5년(544)에는 최초의 국립사찰인 흥륜사를 지어 미륵불을 봉안하였고,.
왕 27년(566)에는 14년 전에 착공한 황룡사를 완성하였다.
불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여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인 단합을 꾀하였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신라가 원래 부처의 나라라는 불국토사상과, 신라왕이 바로 부처라는 王卽佛 사상이 형성된다.
그리고 화랑이란 청소년 단체를 만들어 이들 집단을 통해 전체 국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제23대 법흥왕부터 제28대 진덕왕 때까지를 불교식 왕명시대라 한다.
여기에는 王卽佛 사상이 배경에 깔려있다. 왕실을 석가모니 집안의 환생으로 보는 眞種說을 빌어 와 미화시켰다.
진흥왕은 자신을 불교의 정법을 퍼뜨린 위대한 정복군주인 전륜성왕에 비정하기도 하였다.
전국에 國統, 주통, 군통 등의 승관을 두어 사찰과 승려들을 관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그 뒤 문무왕에 의한 삼국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오갑사의 창건은 이러한 구상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작갑사는 지금 운문사로, 서쪽의 대비갑사만 대비사로 개명하여 남아있다.
다른 갑사들은 폐사되었다.
2. 첫 번째 중창자는 圓光法師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광법사는 진평왕 22년(600)에 隋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황룡사에 있다가,
대작갑사에 와서 3년 머문 뒤 가슬갑사로 왔다.
여기서 화랑 貴山과 箒項에게 ‘世俗五戒’를 내려 주었다.
<삼국사기> 제45권 列傳 제5 貴山 조에,
귀산은 신라 사량부 사람으로……어렸을 때 사량부 사람 箒項을 친구로 사귀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士君子와 교유하기를 기약하였는데,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잘 닦지 않으면 장차 치욕을 면치 못할까 염려된다.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올바른 도리를 듣지 않으랴’ 하였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로 들어가 유학하다가 돌아와서 加悉寺(가슬갑사)에 머물러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예의로써 존경하였다.
이때 귀산 등은 원광법사를 찾아가서 공손한 태도로 말하기를
‘속세의 우리들은 어리석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 가르쳐 주시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겠습니다.’ 하니,
원광법사가 말하기를 ‘佛戒로는 보살계가 있어 그를 十戒로 삼고 있으나,
그대들은 남의 臣子가 되어서 능히 이를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지금 세속에 알맞은 五戒가 있는데,
1은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하고[事君以忠],
2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고[事親以孝],
3은 벗을 사귐에는 신의로써 하고[交友以信],
4는 싸움 마당에 이르면 물러남이 없어야 하고[臨戰無退],
5는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殺生有擇].
하는 것인데,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귀산 등은 말하기를 ‘다른 것은 다 명하는 대로 받아 하겠사오나,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아직 똑똑히 모르겠나이다.’ 하니,
원광법사는 말하기를 ‘六齋날(여섯 齋日 곧 8월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과 봄과 여름 달에는,
산 것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때를 가리라는 것이요,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 소, 닭, 개를 말하는 것이고,
잔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가 한 입감도 못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물건을 가린다는 것이다.
또한 죽일 수 있는 것도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니, 가히 세속의 착한 경계라 말할 수 있다’ 하므로,
귀산은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에는 법사의 주선함을 잘 받들어 감히 실수하지 않겠나이다.’ 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1, 2는 수신에 관계되는 내용이고,
3, 4는 당시 삼국통일 전쟁에서 전쟁의 덕목을 가르친 것이다.
5는 살생을 금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원광법사는 화랑도에게 불교의 다섯 계율이 아닌, 세속의 다섯 계율을 만들어 주고 실천하게 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가르침은 세속오계이다.
원광이 세속오계를 편 것은 불교가 신라 귀족사회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히고,
세속적인 문제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사정을 말해 준다.
통일 전후 시기에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인 단합을 꾀하는 데,
불교가 계속 적극적인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오갑사가 있는 청도군 운문면 일대는 운문산 기슭이므로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다.
그러므로 백제와 고구려에 들키지 않는 은밀한 지점이며 왜구의 침공 위험도 없는 곳이다.
따라서 군사교육장 같은 국가시설을 짓기에 알맞은 곳이다.
이곳은 삼국통일의 뜻을 품은 화랑도들의 수련장이었다.
원광은 이곳에 머물면서 신라의 중견지도자인 화랑의 스승이 되어 화랑도의 이론을 세우고 화랑들을 수련했다.
원광은 호국불교를 제창한 승려이다. 그는 왕실에 밀착한 어용승려로, 뒷날 수나라에 보내는 <乞士表>를 쓰기도 했다.
또 당시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언양과 양산이 이곳에 인접해 있다.
가슬갑사에서 경주로 통하는 산길은 삼계리에서 월성군 산내면을 거쳐 가는 길과,
동쪽 문복산 기슭을 넘어 언양과 산내면을 거쳐 내남면을 지나 경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 주변에는 단련장, 채광지, 숙영지, 소규모 돌성, 도요지 등이 흩어져 있다.
이로 보아 이곳은 교육장이자 수도권방위상의 중요한 곳이었던 듯하다.
3. 통일신라 이후 250년간 오갑사의 사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통일 후 군사시설로서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뒤 후삼국의 싸움으로 일대의 다섯 갑사가 모두 파괴되고 남은 기둥만을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일연스님(1206~1289)은 1277년부터 1282년까지 운문사에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는데,
당시 가슬갑사 절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嘉瑟岬寺遺蹟地>라 쓴 1m쯤 되는 돌비가 세워져 있다.
1970년대 청도의 어떤 인사가 세웠다고 한다.
절터는 1천여 평쯤 되는데, 흙에 묻혀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 쌓은 듯한 축대가 약간 남아있다.
4.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 원광서학 조에, “원광이 가슬갑사에서 占察寶를 두어 常規로 삼았다.
이때 시주하던 여승 하나가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 지금 東平郡의 밭 10여 結이 바로 이것이며,
옛날의 문서가 아직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점찰보는 점찰법회를 항구적으로 열기 위한 기금이다.
대승법회에는 僧俗의 숙식이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금이 필요하다.
원광법사는 점찰법회를 열어 대중 포교 활동을 한 것이다.
잠찰법회는 <占察善業業報經>에 따른 법회이다.
<점찰경>에 의거하여 길흉선악을 점쳐 부정적 결과가 나오면 혹독하게 참회하는 일종의 참법이다.
<점찰경>은 隋代 이전 중국의 민간점복 신앙에 영합한 僞經이다.
<점찰경>은 지장신앙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지장보살은 땅속에 감추어진 것을 인격화한 보살이라는 점에서 여래장교의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신라에 <점찰경>이 들어온 것은 지장신앙과 여래장사상이 들어온 것이 된다.
■ 圓光법사(542?~ 630?)에 대해서는 <續高僧傳>-道宣(667년에 죽음) 지음-,
<삼국유사>에 인용된 <古本殊異傳>에 단편적인 기록이 있는데, 생몰연대가 달라 혼란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신종원, <신라초기 불교사 연구>, 민족사, 1992, 221~ 231쪽)의 추론을 따라 정리해 본다.
원광법사는 진흥왕 2년(542)에 태어났다. 속성은 박씨이다.
출가하기 전인 576년, 35세 때 陳나라(557~ 589)로 갔다. 당시 신라는 진나라와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유학 가는 승려 외에 거의 해마다 진에 조공한 사실을 보면 조공하러 가는 사신들과 함께 선진문화를 섭취하기 위한 유학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원광도 처음에는 이런 부류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는 儒學을 공부하다가 금릉[南京]에 가서 莊嚴寺 僧旻의 제자로부터 불법을 듣게 된다.
그는 진의 황제에게 아뢰어 승려가 됨을 허락받는다.
이로 보면 그는 개인적으로 중국 유학한 것이 아니고 국가의 공식적 입장을 띤 것으로 생각된다.
귀국 후 <乞師表> 등 수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문서를 쓰는 것으로 보아,
유학하기 전부터 文翰의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진나라에서 출가한 뒤, 한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각종 대 · 소승경전을 두루 섭렵했다. 특히 <성실론 ․ 열반경 ․ 四阿含經>을 통달하였다. <성실론>, <열반경>은 당시 南朝에서 가장 유행한 것으로 보아,
이러한 경전을 연구하는 것은 하나의 시대적 조류이다. 이외에도 <반야경>을 강의하는 등 남조 불교에 통달했다.
중고기 신라의 대중국 외교는 선진문물 특히 발전 일로에 있던 南北朝나 隋나라의 불교를 신속히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유학승들의 불교 연구 경향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대부분의 교학에 관심을 가졌다.
통일 후 신라 불교가 종파적 성격을 띠는 것과 달리 보편적 불교 이념의 전파라는 점이 이 시기의 불교의 특징이다.
589년 隋나라로 간다. 수나라 때는 장안에서 眞諦三藏(499~569)이 번역한 <攝大乘論> 연구가 성했다.
그도 섭종론 공부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신라 진평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귀국을 요청하자,
진평왕 22년(600) 신라 朝聘使인 柰麻 諸文과 大舍 橫川을 따라 귀국했다.
그는 신라왕과 귀족의 극진한 공경을 받았다.
왕이 그를 성인처럼 받들며 옷과 음식을 손수 마련하여 공양하였다.
원광은 왕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신라 왕실에 철저히 봉사하였다.
<속고승전> 13권에 따르면 “외교 국서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고,
온 나라가 그를 떠받들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와 도로써 교화하는 방도를 물었다.”고 하였다.
진평왕 30년(608) 왕의 명에 따라 수나라에 고구려를 쳐달라고 <乞師表>를 썼다.
<삼국사기> 진평왕 조에, 이때 원광은 “자기가 살려고 하여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沙門의 할 행실이 아니옵니다. 그러나 貧道가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水草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오리까”라 아뢰고 걸사표를 썼다.
진평왕 35년(613) 7월 수나라에서 사신 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에 百高座會를 차리고,
원광법사로 하여금 강의하게 하였다. 황룡사에서 거국적인 법회가 열릴 때면 언제나 원광은 상수로 추대되었다.
百高座會는 <仁王般若經> 호국품에 근거한 것으로 외적이 쳐들어 오거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 경을 설하여 국토와 중생을 지키고자 하는 의식이다.
獅子座 100자리를 만들고 고승 100분을 모셔다가 그 자리에 앉게하고 설법하는 법회이다.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처음으로 고구려에서 온 惠亮법사가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원광법사 이후 계속 국가적인 행사로 설치되어 고려 때 가장 성했다.
조선 초기에 폐지되었다. 설법 때 쓰여지는 經에 따라 仁王般若百座講會, 百高座藥師道場 등으로도 불린다.
당시 귀산과 추항이 평생 가질 가르침을 청하므로 세속오계를 가르쳤다. 세속오계는 화랑도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진평왕 52년(630) 황룡사에서 89세로 입적했다.
국가에서 왕의 장례와 동등한 葬具를보내 주었다.
명활산에 장사지내고 삼기산 金谷寺에 부도를 세웠다.
저서로 <如來藏經私記> 3권, <大方等如來藏經疏>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대웅보전
기존의 대웅보전이었던 현재의 비로전에 늘어난 대중을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1994년에 새로 건립하였으며, 현재 조석예불을 모시는 주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상단에는 과거 연등불, 현재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인 삼세불과, 대세지, 보현, 문수, 관음의 사대보살을 모셨다.
왼쪽에는 신중탱, 오른쪽에는 53선지식 탱화를 모셨으며, 좌우의 윤장대에는 경전을 봉안하였다.
■ 萬歲樓
■ 천연기념물 운문사의 처진소나무
나뭇가지가 수양버들처럼 아래로 처진다고 해서 처진소나무, 한자로 柳松이라 한다.
키 6m, 가슴높이 둘레 3m이며, 줄기의 2m 높이에서 다시 사방으로 퍼져 곁에서 보면 마치 우산을 펴 놓은 것 같다.
둥그렇게 펼쳐지는 나무 그늘이 30평쯤 된다. 나이는 500살 정도로 짐작하고 있다.
운문사 스님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막걸리 12말과 물 12말을 섞어 나무 주위에 뿌린다.
막걸리의 영양분이 비료 역할을 한다고도 하고,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도 한다.
안에서 보면 범종루
운문사를 나와서, 여기서부터 사리암주차장까지 생태탐방로
수월교를 건너면 문수선원
사리암 주차장, 11시 50분
아랫재로 가는 길, 갈 수 없는 길.
왔던 길로 돌아간다.
모감주나무
운문사 범종루를 지나
다시 솔바람길
운문사 북쪽 담장
매표소
운문사 정류장, 2시.
2시 35분 출발 언양행,
나 혼자 타고 언양임시터미널 3시 5분 도착.
부산 가는 3시 40분 버스로 돌아왔다.
달마루
'도보여행 > 도보여행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도사와 그 남쪽 여섯 암자 단풍 구경- 2024년 11월 23일 (0) | 2024.11.25 |
---|---|
구미 금오산/ 채미정 · 맥문동 · 올레길- 2024년 8월 16일 (0) | 2024.08.16 |
오후의 산책/ 삼락생태 공원- 2024년 6월 1일 (0) | 2024.06.01 |
영천 금호강 둔치 보라유채- 2024년 5월 9일 (0) | 2024.05.09 |
갈맷길 6-4/ 죽전마을 종점~ 화명역- 2024년 3월 13일 (1) | 2024.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