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루로드 2차- 2010년 5월 30일
지나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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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소산 봉수대(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조선 초기에 만들었다. 영덕 · 축산포 방면의 동태를 서울 남산 봉수대에 알리던 곳이다.
산의 정상부에 방어벽들 돌로 쌓고 그 안에 원뿔 모양의 직경 11m, 높이 2.5m의 봉돈을 쌓았다. 남쪽으로 별반 봉수대, 북쪽으로 평해의 후리산 봉수대, 서쪽으로 광산 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 봉수대로 이어지는 곳이다.
■ 목은이색기념관- 영덕군 영해읍 괴시1리(호지마을) 뒷산 중턱에 있다.
괴시전통마을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목은이색기념관 구역이 시작된다. 기념관 구역 입구를 지나 200여m 올라가면 기념관에 도달한다.
2006년 6월 준공했다.
산비탈 3천400여평의 부지에 목은이색기념관 건물과 팔각정, 연못, 목은 생가터 등이 있다.
기념관에는 몇 점의 유물이 겨우 전시관의 이름을 지키고 있고, 옆에는 전지관 관리사로 생각되는 집이 버려진 채 귀신나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목은의 후손 이경재가 경상감사로 영해부를 순찰할 때 목은을 추모해 세운 稼亭牧隱遺墟碑가 남아 있다. 지붕돌은 따로 떨어졌고, 비밭침은 없어졌다. 비신은 두 동강이가 나 누워있다.
새로 비를 만들어 세웠다고 하는데 시간에 쫓겨 찾아보지 못했다.
목은 생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터는 표시만 해 두었다.
이곳에서 목은이색산책로(등산로)가 시작된다. 산책로는 총 9.1㎞에 이른다.
2006년 말에 개통하였다. 산 아래에서 봉수대가 있는 대소산(봉화산, 해발 282m) 정상에 이르기까지의 등산로를 예주로, 망일로, 매일로, 영산로, 봉수로, 이색로 등으로 이름지었다.
이 중 이색로는 기념관에서 봉수대로 가는 5㎞가 넘는 소나무숲길이다. 산책로는 옛날부터 축산면과 영해면 사진리 · 대진3리 주민들이 영해 5일장을 보기 위해 생선과 건어물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넘어다니던 산길이다.
괴시전통마을
괴시전통마을 당산나무
마을에 있는 왕버들
목은 이색(1328~1396)
牧隱 李穡은 한산 이씨다. 아버지 稼亭 李穀(1298~1351)이 영덕군 영해읍 괴시1리 영해의 수안김씨 김택의 따님과 결혼하여 이곳에서 목은을 낳았다.
괴시1리는 동해로 흘러드는 마을 앞 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濠池가 있어 호지촌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목은이 원나라에 들어가 사귄 한림원 학사 歐陽玄이 살던 槐市라는 마을이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과 비슷하다 하여 괴시라 이름지은 이후 괴시마을로 불렸다 한다.
괴시1리 앞 도로는 괴시2리를 거쳐 대진2리 대진항으로 연결된다.
목은은 어린 나이에 이곳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이곳을 고향이라 했고, 늘 그리워했다. 어릴 때 가깝게 지낸 외사촌 형이 영해에서 와 만난 것을 기뻐하여 “고향마을에서 어려서부터 함께 놀다가 전란을 만나 떠돌아다니면서 흰 머리 휘날리네鄕里優遊自少年 干戈漂迫在華顚”라는 시를 지었다.
그 뒤 언젠가 수안 김씨는 이곳을 떠나고 영양 남씨가 동족마을을 이루고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1. 문인으로서의 목은
목은은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신라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가장 훌륭한 문학작품을 모은 책 <동문선>과 목은의 문집인 <목은집>에 수록되어 있다.
<觀魚臺賦 幷序>에,
“관어대는 寧海府에 있다. 東海 石壁 밑에 노는 고기를 셀 만하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영해)府는 나의 外家이며 이를 위하여 작은 賦를 지어 中原에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하여 웅대한 포부를 들어냈다. 일본, 중원 영해 등은 당시의 세계관으로는 전세계가 포함된 것이다. 곧 온 천하이다.
자기가 애착을 가진 고장에서 실제로 보고 느낀 바를 근거로 하여 천하에 자랑할 만한 명문을 이룩하고자 했다.
“丹陽東岸 丹陽(寧海부의 별호) 동쪽 해안/ 日本西涯일본 서편 물가에/ 洪濤淼淼큰 물결이 아득하여/ 莫知其他 딴 것이 보이잖네.”
동쪽 해안, 일본 서쪽에 커다란 물결이 아득하게 일어나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시작했다.
빼어난 산천은 높은 수준의 깨달음을 준다. 진리는 가까운데 있고, 자기가 나고 자란 곳이 천하의 중심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침략에 시달리는 가련한 나라가 아니고 오히려 문명세계의 중심에 있어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物我一心외물과 내가 한 마음이요/ 古今一理예와 이제가 한 이치라.”
바다에 뛰노는 물결은 정신적 기백을 나타낸 것이다. 뛰노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바깥의 사물과 자기가 하나임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러 마음의 바른 도리를 찾자고 하였다.
“使夫子而秉桴공자께서 뗏목을 타고 오시면/ 亦必有樂于此또한 이것을 즐기시리.”
공자를 받들자고 하지 않고 공자가 이곳으로 온다고 하였다. <논어> 子罕편에 공자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세상에서 바른 도를 펴려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차라리 뗏목을 타고 동쪽 오랑캐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탄하였다.”
고려는 세계의 중심이며. 새 시대 창조는 고려의 몫이라고 하였다.
웅대한 착상에 격조 높은 표현으로 영해의 경치를 찬양했다. 소재에 따른 감흥과, 주제와 표현이 조화를 얻어 함께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2. 성리학자로서의 목은
14C 고려 말 불교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했다. 큰 사찰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많은 노비를 거느렸다. 장사에다 고리대금업까지 벌이면서 부를 축적하였으며, 사회 모순을 외면했다. 승려들은 민중들에게 공덕을 강조하여 토지의 희사 등 보시를 요구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이는데 열중하였다.
왕실과 귀족들은 금은으로 불경을 베끼고, 사찰, 불상, 탱화를 호화롭게 만들어 현세의 복을 빌었다.
과거의 유교는 우주의 본질이나 인간의 심성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형이상학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불교와 도교가 맡았다. 그러나 불교는 관념론에 흘러 理에 치중했으며, 도교는 氣를 통한 양생론에 치우쳐 있었다.
성리학은 불교의 理와 도교의 氣를 객관적관념론의 입장에서 체계를 세웠다. 사물의 상보적인 상하질서를 확립하여 보다 합리적인 윤리공동체를 이룩하는데 적합한 이론 체계를 만들었다. 북송의 사대부층이 먼저 이를 수용하고, 양자강 주변의 중소 지주층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朱熹(1130~1200)는 남송 출신으로 이들의 대변지이며 이론가였다.
성리학은 개혁성향을 가진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얻었다. 14세기 말 지방 향리 출신 중소지주층 사대부들이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를 체계화하여 전파한 사람이 이색과 정몽주, 현실정치에 이용한 사람은 정도전과 권근이었다. 구체적인 이론을 세워 발전을 이룬 시기는 이황, 서경덕, 이이 등이 출현한 16세기였다.
제25대 충렬왕(1274~1308)때 안향이 성리학 수입한다. 목은의 아버지 이곡은 성리학을 개척한 사람으로, 목은은 물론 정몽주, 권근, 정도전을 길렀다.
목은은 23세 때 아버지 이곡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공부한다. 원나라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감생원이 되기도 했다.
이곡이 먼저 귀국하여 곧 돌아가자, 아버지 초상을 치르기 위해 귀국했다가 아버지 상을 치르고 다시 원에 들어가 일하다가 원의 어려운 현실을 보고 어머니 병을 핑계로 돌아왔다.
목은은 고려 말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정몽주는 그를 종주로 모셨으며 정도전, 권근, 정총, 우현보, 이숭인 등은 그의 문하생이다.
그는 사상적으로도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기와 술을 삼가는 등 불교 계율을 지켰다. 중도적이라기보다 사상적으로 그만큼 유연하고 폭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문묘에 배향되지도 못했다.
3. 정치가로서의 목은
목은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커다란 전환기였다.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가고 명나라가 건국되는 시기이며, 이땅에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시기이다.
그 시대의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31대 공민왕이 즉위하자 반원정책을 실시한다. 왕 5년(1356) 기황후의 오라비 기철을 포함한 친원파 관리를 제거하고, 영흥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한다.
이 무렵 목은은 이부시랑과 병부시랑 겸직한다.
공민왕 8년(1359) 홍건군의 1차침입으로 의주가 함락된 적이 있고, 1361년 10월 10만 명이라고도 하고 20만 명이라고도 하는 홍건군의 2차침입으로 이해 11월에는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란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공민왕 14년(1368)에 왕은 遍照(신돈)를 사부로 삼고 정사를 맡김으로 신돈의 개혁이 시작된다. 성균관이 부활되어, 이색, 圃隱 鄭夢周(1337~1392), 정도전, 陶隱 李崇仁(1349~1392), 김용구 등이 성리학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따라 신흥사대부가 성장할 바탕이 만들어진다.
신돈은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 정몽주를 박사로 임명했다.
공민왕(1351~1374) 17년(1368)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가 북원시대가 시작되고, 중원에서는 명나라 건국된다.
공민왕은 신돈을 죽이고, 보수세력과 손잡는다.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던 신돈의 개혁정책은 중단된다. 천민, 노비의 사회적 지위는 격하되고, 신진 사류가 성장한다.
공민왕 사후 다시 친원파가 등장하고 이에 맞서 신진사대부들은 친명노선을 추구한다.
목은은 1388년 시중이 된다. 10월 正朝使로 명나라로 간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 일파는 인류역사에 유례가 없는 제비뽑기로 제34대 공양왕(1389~1392)을 왕위에 올린다. 그리고 이색, 조민수 등이 제32대 우왕(1375~1388)과 제33대 창왕(1388~1389)을 세워 고려의 정통을 끊었으며, 공양왕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다 하여 이색과 아들, 이종학(1361~1392), 이숭인, 권근, 하륜, 조민수 등을 유배보낸다.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아들이라 조작하여 퍼뜨렸다. 이색은 우와 창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이성계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왕을 지지한 것이다.
목은은 장단으로, 다시 함창으로 유배다녀야 했다.
고려 말에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학자들 사이에서 개혁의 정도와 방법을 두고 급진파와 온건파가 갈라졌다.
목은은 정치적으로는 중도 노선을 걸었다. 고려 말기의 정치적 모순은 철저히 척결하되 고려 왕조를 뒤엎는 역성혁명은 반대하였다. 私田의 개혁은 수취를 완화하는 정도에 그치고, 과격한 토지개혁을 반대하였다.
사원경제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도전(1342~1398)으로 대표되는 급진파는 토지개혁으로 빈부격차를 줄이고 국가재정과 국방력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또 성리학으로 불교를 철저히 비판하고 일종의 종교개혁을 통해 사원경제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개혁하려 하였다.
사전의 개혁을 반대한 탓으로 벼슬은 떨어지고 쫓겨가야 했다. 정몽주는 이미 죽었고, 이색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한산으로 낙향한다.
4. 그는 조선이 건국되고도 5년을 더 살았다. 그런 까닭으로 험한 꼴도 많이 겪어야 했다.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는 어느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청구영언>
昨過永明寺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 잠깐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 떠 있고
石老雲春秋 오래된 조천석 위에 천 년의 구름 흐르네.
麟馬去不返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
天孫何處遊 천손은 어느 곳에 노니는가?
長嘯倚風磴 돌다리에 기대 휘파람 부노라니
山靑江自流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李穡 浮碧樓, <牧隱集>
이제 반가운 매화는 피지 않는다. 기린마는 이미 떠났다.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고려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 돌다리에 가대 휘파람을 불 만큼 관조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특히 제자인 정도전은 여러 차례 그를 죽이려고 기도하였다. 이성계의 배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들 李種學(1361~1392)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학문을 물려받아 존경받는 선비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기 직전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그도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 정도전과 남은은 그를 죽이려고 敎書使(임금의 지시를 직접 전달하는 직책)를 유배지로 보냈다. 그는 이종학을 새 유배지 장사현으로 보내는 도중 심한 매질을 했다. 그래도 죽지 않자 목을 베어 죽였다. 이색은 유배지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전말을 모두 전해 들었다.
조선이 들어서자 목은은 유배지 여주에 살고 있었다. 정도전은 목은을 자연도로 유배보내 바다에 빠뜨려 죽일 계획을 하였다. 이태조는 목은의 처벌을 반대했지만 신하들에 밀려 장흥으로 유배보냈다. 그래서 정도전의 계획은 실패한다.
그의 정치적인 세력은 정몽주보다 훨씬 커서 반대세력은 그를 쉽사리 죽이지 못했다.
얼마 후 태조는 목은을 풀어주고 궁궐로 불러들였다. 목은은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다.
“가르침을 받들고 싶으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하여 버리지 마시오.”
“망국의 대부는 보존되기를 도모하지 못하는 법이오. 나는 해골을 고향의 산에 묻을 것이오.”
태조 5년(1396) 왕에게 피서하겠다는 허락을 받고 여주로 갔다. 신륵사 앞 강가에 있는 청심루 아래에서 뱃놀이를 하던 목은이 연자탄 여울에서 갑자기 죽었다. “이색이 그 무리들이 태조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기 때문에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경기 안찰사가 사람을 보내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목은은 행동하는 사람, 신념을 강하게 밀고 가는 사람은 아니다. 더구나 망한 고려를 되찾기 위해 모의할 사람은 아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안찰사를 사형에 처하고 이색을 韓山伯(우왕 때 공신이 되어 한산군으로 봉해졌는데 한 등급 높인 것)으로 봉했다.
그가 역사적 전환기에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았느냐가 문제이다. 그가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칭찬할 수 있다. 조선의 신하가 되었다 해도 칭찬할 수 있다. 망한 나라의 망령을 껴안고 여생을 산 것을 비난할 수도, 조선을 인정하지 않은 것을 비난할 수도 있다.
목은은 역사적 전환기에 정직하게 한 평생을 살았다.
그의 삶을 진지하게 조명해서 오늘 우리의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아닌가 한다.
陶隱 李崇仁(1349~1392), 冶隱 吉再와 함께 삼은으로 불리며 고려의 충신으로 추앙을 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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