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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사 답사와 운제산 산행-2010년 5월 28일

추연욱 2010. 5. 29. 00:47

오어사 답사와 운제산 산행-2010년 5월 28일

 

 

민중불교의 산실 오어사

 

혜공스님과 원효대사가 노닐었다는 유서깊은 절이지만 고풍스러운 맛은 거의 사라졌다.

절의 구조도 완전히 흐트러져 우리는 절 옆구리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왔다. 이런 일은 우리뿐만 아닐 것이다.

 

 

 

이곳이 오어사 정문 금강문이다.

 

그래도 오어사와 주변의 풍경은 아름답다.

절 앞 오어지가 만드는 풍경, 거기에 반영된 주변의 모습들은  해괴하게 왜곡되었다가 바르게 되었다가 하여 動과 靜을 조화롭게 만든다.

 

 

 

 

 

  

 

 

오어사는 포항시 오천읍 항사리에 있다.

 

1744년 쓴 <迎日雲梯山吾魚寺事蹟>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현의 소재지 남쪽 10리쯤에 운제산이 있고, 이 산 속 계곡 위에 오어사가 있으니, 바로 신라의 네분 조사가 지팡이를 걸고 신발을 벗었던 터전이다. 처음 절을 세울 때는 이미 오래 되어 상고할 수 없으며, 수없이 해가 바뀌는 동안 화재가 뒤를 이어 법당과 승방의 변화 또한 무상하였다. 문수전과 원효암은 신라시대 창건되어 처음 모습대로 오늘에 이르니 건물이나 벽돌까지 고적이라 생각된다. 대웅전 영산전 나한전과 선당 승당 약사전 寮舍 들은 여러 차례 불탄 나머지 근근이 중건하였으나, 오직 祖殿上室만은 다시 북구하지 못하여 기왓조각이 뒹구는 곳으로 변했으니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다.

절의 북쪽 층을 이룬 바위 위에 자장암이 있는데, 三龜庵이 그 앞에 있어, 마치 서로 바라보는 듯하고, 아래로는 惠空庵이 있으니 깎아지른 바위벼랑이 천길에 이른다. 서쪽으로 의상암이 있고, 칠성각도 있어 해와 달과 별이 빛나는 자리에 집 한 칸이 엄연하다. 돌계단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면 원효암에 닿는데, 푸른 솔 푸른 대가 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는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 계곡에서 노닐며 廣石臺를 만날 수 있으니, 금빛, 옥빛 물고기들이 그 아래서 헤엄친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 물길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은적암이 있어서 맑은 계류는 잔잔하고 바위는 첩첩하다. 산을 의지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걸음걸음 올라가면 大王巖이 나선다. 그 위에 올라 눈을 들고 가슴을 열면 사방 100리 안의 산천이 막힘이 없이 다가서며, 푸른 바다의 큰 파도와 형산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앉아서 볼 수 있다. 걸음을 돌이켜 駕鶴樓로 돌아와 바람이 의지하여 오래 읊조리노라면 묵연히 천고의 감회가 인다.

아아, 네분 조사가 도를 즐기고 玄談을 나누던 때에 혜공과 자장스님은 북쪽 산꼭대기에 머물고 원효와 의상스님은 남쪽 바위 벼랑 위에 살았다. 남쪽의 바위 벼랑과 북쪽의 산꼭대기는 마치 楞伽山에 오르기 힘든 만큼 오가기 어려웠다. 이에 구름[雲]을 사다리[梯] 삼아 절벽에 걸쳐놓고 왕래했으니, 묘법과 신술을 체득하지 않았다면 능이 이럴 수 있겠는가. 수행의 여가에 광석대에 앉아 노닐기도 하고 도를 논하기도 했으니. 물고기를 낚아 삼킨 뒤 뒤를 보며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그 똥이 물고기로 변해 모두 흐름을 따라 내려가건만 오직 한 마리만이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혜공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그 물고기를 가리키며 “저놈이 바로 내[吾] 고기[魚]로다” 했다. 이것이 바로 산의 이름과 절의 편액이 비롯된 소이이다.

아, 풍경은 예와 같건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은 달라졌으니 천연한 들의 꽃, 교교한 솔가지와 달, 차디찬 맑은 계류, 정정한 바위의 소나무는 모두 네 분 조사께서 수행과 교화에 힘쓰던 곳의 사물들임을 뉘 알랴. 인의와 지혜를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 밖 산수의 참된 즐거움을 더불어 이야기하기 어려우니 능히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8>, 돌베게, 1997, 에서 재인용

 

1. 신라 제 26대 진평왕(579~632) 때 창건되어 항사사라 했다.

2. 혜공이 만년에 이곳에 머물렀는데, 원효가 찾아와 자신의 저술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한때 원효와 혜공이 이곳의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방변하자 고기 두 마리가 나와서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위로,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는데, 올라가는 고기를 보고 서로 자기 고기라 했다는 데서 吾語寺라 했다 한다.

 

<삼국유사> 제4권 意解 제4 二惠同塵 조에,

혜공-만년에는 恒沙寺에가 있었다.(세상에서는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이 출세했기 때문에 항사동이라 한다고 했다.)

이때 원효가 여러 가지 불경의 疏를 찬술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스님에게 가서 묻고 혹은 서로 희롱도 했다.

어느날 혜공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 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다가 돌 위에서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그를 가리키면서 희롱의 말을 했다. “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게요.”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절을 吾魚寺f라 했다.

 

3. 영조 12년(1736) 불이나 전소했다.

공덕비에 “승려 大曄과 마을 사람 황치곤, 박지범 등 150여 명이 금전을 모아 5년 뒤(1741) 대웅전을 세웠다.”고 하였다.

 

절 북쪽에 자장암, 혜공암, 남쪽에 원효암, 서쪽에 의상암 등의 수행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네 조사가 이 절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원효암과 자장암이 남아있다.

 

4. 1961년 정부에서 오어사 아래쪽 계곡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절 마당 바로 아래까지 물이 넘실댄다. 혜공과 원효스님이 노닐었다는 광석대는 저수지에 잠겼다.

 

▪ 대웅전은 영조 17년(1741)에 중건하였다. 내부의 공포는 연꽃봉오리 무늬로 마감하였다.

오른쪽 문짝은 밖여닫이, 가운데 문짝은 안여닫이, 왼쪽 문짝은 붙박이이다.

 

오어사에서 그런대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대웅전 기단, 내부의 공포 등은 오늘따라 보름이어서 법화가 있어 살펴보지 못해 아쉬웠다. 특이한 것은 대웅전 뒤에도 문이 있는 것이다.

 

 

 

오어사 편액은 혜강 김규진이 썼다.

 

  

 

 

천왕문 옆 칸에 이런 유물이 있다. 용도가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나의 견해로는 법고를 올렸던 대좌인 듯하다.

 

 

▪ 동종은 고려 고종3년(1216) 제작한 것이다. 1996년 연못 준설작업 중 발견했다.

貞祐 4년(고려 광종 3년, 1216) 丙子 5월 大匠 순광이 주조했다.


명문에,

“동화사 도감 순성, 동사(오어사) 정련과 영지가 지극정성으로 발원하여 두루 시주를 받아 300근 금동으로 만들어 오어사에 걸었으니,

일체 중생이 간절히 바라는 성불의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종소리)을 바처 부처님께서 인도하는 곳으로 따르겠나이다.”라 하였다.

 

 

▪ 원효의 삿갓은 유물전시관에 있다. 높이는 1척, 지름은 약 1.5척이다.

뒷부분은 거의 삭아 버렸지만 겹겹으로 붙인 한지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실오라기 같은 풀뿌리를 소재로 하여 짰다.

 

 

 

유물전시관에 혜공의 영정이 있다. 최근에 그린 듯 한데 어떤 근거인지는 알 수 없다.

 

惠空선덕여왕 때 승려이다. 이름은 憂助이다.

天眞公이란 사람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할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승려가 되어 혜공이라 이름을 바꾸고 작은 암자에 있으면서 삼태기를 지고 취해 다니면서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은 負和尙이라 불렀다.

 

<삼국유사> 제4권 意解 제4 二惠同塵 조에 혜공스님의 신이한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구참공이란 사람이 어느날 산에 놀러갔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서, 그 시체가 부어 터지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고는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오니 혜공은 술에 몹시 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부르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날 풀로 새끼를 꼬아가지고 영묘사에 들어가서 금당과 좌우에 있는 경루와 남문의 낭무를 묶어 놓고 강사에게 말했다. '이 새끼를 3일 후에 풀도록 하라' 강사가 이상히 여기면서 그 말을 좇으니, 과연 3일 만에 선덕여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의 심화가 나와서 그  탑을 불태웠지만 오직 새끼로 맨 곳만은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신인의 조사 명랑이 새로 강사를 세우고 낙성화를 열었는데, 오직 혜공만 오지 않았다. 이에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했더니 조금 후에 혜공이 왔다. 이때 큰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혜공의 옷은 젖지 않았고, 발에 진흙도 묻지 않았다. 혜공이 명랑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은근히 초청하기에 왔소이다.'

이와 같이 그에게는 신령스스운 자취가 많았다.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세상을 마쳤는데, 사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만년에 항사사(오어사)있었는데, 원효대사가 불경의 疏를 지을 때 의심이 나면 매양 혜공을 찾아 묻고, 강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 먹고 똥은 누며 희롱하기도 했다.

혜공이 있었다는 부궤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1. 신라 불교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많은 시련을 겪은 후 늦게 정착되었다.

그러나 일단 공인된 다음에는 스스로 승려 노릇을 한 법흥왕, 진흥왕의 적극적인 보호에 힘입어 국가적 성장에 비례하는 발전을 보여주었다.

진흥왕 때 圓光(542~640)이 세속오계를 편 것은 불교가 신라 귀족사회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히고 세속적인 문제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통일 전후한 시기에 국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 단합을 꾀하는데 불교는 계속 적극적 구실을 했다.

불교는 절대왕권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국가적 질서의 관념적 표현이며, 씨족적 · 부족적 전통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사상이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 신라가 원래 부처의 나라이고 신라왕이 바로 부처라는 불국토 사상이 성립된다.

 

2. 통일 이후 불교의 본질적 세계에 눈뜨게 된다. 이때는 고승이 여럿 나타나 불교를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자장은 계율을 내세우며 엄격한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원측은 난해한 유식 이론을 높은 경지까지 연구해서 중국에서 유식학을 이끌어가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의상은 화엄사상의 체계를 수립하면서 신라 귀족사회의 기본 이념을 제시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귀족불교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옹호를 받으며 진골 귀족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힌 불교는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구실을 하며 예사 사람으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고답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런 불교는 한편 신분적, 종교적 불평등 구조를 만들었다.

 

3. 이렇게 귀족불교가 위세를 떨치자 혜공 · 혜숙 · 대안 · 원효가 나서 민중불교의 길을 열었다.

이들이 살았던 삼국통일 전후한 시기는 심각한 다툼의 시대였다.

안으로는 귀족과 민중의 다툼, 밖으로는 삼국 사이의 쟁패와 그 후유증이 있었다.

원효는 이 다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찾으려 했다.

 

 

운제산 산행

'구름 사다리'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雲梯부인은 신라 제2대 남해차차웅(4~24 재위)의 부인이다.

이 부인이 죽어서 운제산 산신이 되었다.


신라에서는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 운제부인, 박제상의 아내인 치술공주를 國神으로 섬겼다.

<삼국사기> 권32 '제사'조에 따르면, "남해차차웅 때에 박혁거세의 사당을 세운 뒤에 왕의 친누이 아노에게 춘하추동의 제사를 맡겼다."고 하였으며,

고려시대 "영일현(지금의 포항시)의 서쪽에 雲梯山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에 여기에 빌면 감응이 있다"고 하였다.

고려 말까지 신사가 있었다.

지금은 대왕암 앞쪽에 제단을 만들어 두었다.

 

지나가는 길 

 

   

 

홍은암

 

대왕암

 

 

 

 

 

 

대왕암 뒤

 

 

 

대왕암을 지나 정상으로 가는 길

 

 

 

 

헬기장 점심 

 

 

 

 

 

운제산 정상

 

 

 

 

 

자장암

 

 

  

 

 

꽃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