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도보- 경주 오봉산 답사도보- 2010년 5월 7일
8시 50분 도시철도 남산동역에 모였다. 백일봉님, 찌릉소님, 그리고 나.
시계처럼 정확했다.
백일봉님의 차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9시 50분 건천 IC를 나와 송신1리 선암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선암사

등산로에 봄빛이 현란하다. 네개의 소리를 한 마디로 하여 반복하는 검은등뻐꾸기 소리는 옮기지 못해 아쉽다.

幞頭庵이라, 절 이름이 이상하다.
'복두'는 신라 때 귀족들이 쓰는 버선같이 생긴 모자인데.
절의 내력을 알 수 있는 문헌자료를 찾을 수 없다.
백일봉님은 오래된 절이라 하셨다.
한때 독지가가 많은 돈을 시주하여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였다 한다.
케이불카를 설치하여 대규모의 관광지를 만들고 절도 크게 일으키려 했는데 어떤 사정인지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설명해주셨다.
허영의 시장, 바벨탑, 부처님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을까.
지금은 퇴락한 절, 정적만 흐른다.
들어가는 문은 금강문, 천왕문 대신 두 바위가 마주선 사이다.
마치 모태회귀를 상징하는 듯하다.



주인없는 절집에는 꽃들이 짧은 봄을 마음껏 구가하고 있다.



퇴락한 절에 어울리지 않게 관세음보살은 의젓하고 인자하시다.
관세음보살님은 홀로 꽃과 나무들과 새들과 온갖 짐승들을 거느리고 절집을 지키신다.

노란꽃 하얀꽃, 분홍꽃



백일봉님은 이 산 아랫마을에 자라셨단다. 그래서 이 산 구석구석을 손바닥 들어다 보듯 환하시다.
산의 지형과 유적을 비롯하여 온갖 전설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다.









히야! 저렇게 거창한 이팝나무가 있다니.
수만, 수십만 꽃송이가 한꺼번에 황홀한 향기를 뿜는다.


밑둥치를 보니 여러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도 이렇게 서로 도우며 다정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부산성
성은 사명을 다하고 맥없이 누워있다.

富山城(사적 제25호)은 朱砂山 · 五峯山(633m) · 吳老峯山 · 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729.5m의 富山(夫山)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싸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주 서쪽의 교통의 요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정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산줄기 또한 모두 부산성이다.
산의 이름에 혼란을 보이고 있지만 오봉산 건너편 산줄기에도 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富山을 오봉산보다 큰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무왕 3년(663)에 정월에 쌓았다.
성은 둘레가 3600 척, 높이가 7척이며 면적은 762,874㎡이다. 산성 안에는 연못 1개, 溪川 4개, 우물 9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무너져서 형태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파손되어 무너진 성벽 돌이 산허리에 널려 있다.
성내에는 지금 성문은 4개가 터가 남아 있으며, 南門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그밖에 軍倉터 · 연병장터 · 朱巖寺터 등 건물터와 우물터 · 못 · 暗門터 · 치성터 2개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이 성을 夫山城이라 하고, 둘레가 2,765보 3척이라하고, 군창이 있었다고 하므로 조선 초기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은 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전략의 요충지로서, 선덕여왕 때 백제 군사가 이 산을 넘어 玉門谷(女根谷)까지 침입한 일이 있은 후에, 도성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남산신성의 長倉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쌓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성은 서쪽에서 침입해오는 백제군을 막는 경주의 외곽성이며, 난리 때는 주민들의 피란처 역할도 했을 것이다.
이 성을 짓기 전인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산 아래 여근곡까지 침입했다가 토벌되어 500여 명이 죽었으며, 무열왕 때 이 성은 백제군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함락되어 신라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부산성 안에는 마을이 있었다. 군창을 비롯하여 절과 민가가 있었다.
이곳에는 주암사가 있었으며, 화전민들의 집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초등학교 분교도 있었다.
배추밭은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멋쟁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

주사암과 송곳바위가 보인다.



송곳바위

12시 반쯤 정상에 도착했다. 높이 685m는 잘못 쓴 것이고 635m가 맞다.

마당바위는 持麥石이라고도 한다. 주사암 바로 북쪽에 있다. 100명 정도 쉴 수 있는 너럭바위이다.
金庾信장군이 보리를 쌓아두고 술을 빚어 군사들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한다.
또 김유신 장군이 병사들과 쉰 곳이라고도 한다.


마당바위에서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쉬었다.
포항에서 한계도전님이 지원으로 오셨다.






朱砂庵은 경주시 서면 천촌리 오봉산 정상에 있다.
신라 문무왕(661~681) 때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에는 朱巖寺라 했으며 신인종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영산전과 큰 방, 산령각이 있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모셨다.
탱화 한 폭이 있는데, 의상대사(625~702)라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창건 설화가 있다.
신라 때 한 도인이 이곳에서 신중삼매를 얻고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리라’ 했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한밤중에 궁녀를 훔쳐 새벽에 돌려보내곤 했는데, 궁녀가 두려워 왕에게 아뢴다. 왕이 궁녀에게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라’고 했다. 이어 병사들을 시켜 붉은 모래의 흔적을 찾게했다.
붉은 모래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있고, 늙은 중이 바위에 한가하게 앉아있었다. 왕이 그의 요사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천 명을 보내 죽이고자 했으나 그 중은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외니 수만의 신중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은 무서워 달아났다. 왕은 그가 이인임을 알고 궁궐로 맞아들여 국사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절 이름을 朱砂庵이라 했다 한다.

법당 영산전 편액에 "崇禎紀元後 五壬午仲春"이라는 글이 있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毅宗 때(1628~1644)의 연호다. 壬午년은 숭정 15년, 1642이다.



전망대



여근곡샘, '옥문지'다. 누군가 호수를 조금 잘라놓아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여근곡은 경주시 서면 신평2리 富山 계곡에 솟아오는 작은 산이다. 정면에서 보면 여근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전체 모양을 둥글게 싼 부분은 소나무 숲으로 덮여있고, 그 안쪽은 관목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빽빽한 관목 숲 가운데 샘이 있다.
이 샘은 지금 동네 상수도의 수원지이다. 30여 년쯤 전 새마을사업으로 공사했다. 당시 동네 노인들은 샘을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반대했지만 젊은이들은 미신이라며 공사를 강행했다. 상수도 파이프를 설치하면서 샘의 신비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 샘을 작대기로 쑤시고 휘저으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믿기 때문에 샘물은 동네 어른들이 철저히 지켜왔다. 타동네 총각들이 이 동네 처녀들의 바람기를 부추기기 위해 몰래 이 골짜기에 들어와 작대기로 휘저었다고 한다. 마을 어귀 부처못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어 여근곡을 가리기도 했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선덕여왕 知機三事 조에,
“제27대 德曼의 시호는 선덕여왕, 성은 김씨,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壬辰(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 미리 안 일 세 가지가 있다.
(첫째와 셋째는 주제와 관련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 閼川 ․ 弼呑 등에게 명하여 잘 훈련된 군사 2000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을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령을 받고 각각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보니 부산 아래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 군사 500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다. 이들을 모두 죽였다. 백제의 장군 亏召란 사람이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있으므로 포위해 활을 쏘아 모두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00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서 죽였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개구리가 우는 것으로 백제 군사들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왕은 ‘개구리가 성난 모습을 한 것은 병사의 형상이고, 玉門이란 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색깔은 희다. 흰색깔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에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백제군이 남근이므로 옥문곡이라는 여근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곧 죽게 돼 있으니 쉽게 잡아 죽일 수 있다’는 풀이이다. 선덕여왕은 ‘사내들이 그것도 몰라’라 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신라의 전통사상에 이미 음양사상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신라인은 성교와 생사를 연결하는 인식을 보여준다.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George Bartaille는 <에로티시즘>에서 “에로스는 작은 죽음”이라는 말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성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무를 베거나 오물을 버릴 수 없고 잡인의 출입도 금한다.
이곳을 더럽히면 재난이 온다고 믿었다.
한국전쟁 때 민둥산이 되어 가뭄과 기근이 심했다.
전쟁 직후 마을 제대군인들이 다시 보살피기 시작하여 울창한 숲으로 덮였고, 다시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백제군이 유독 오봉산 여근곡 인근인 건천땅에만 오면 이상하게도 힘을 쓰지 못한 것, 한국전쟁 때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경주 점령 직전에 한번 브레이크가 걸린 것도 모두 여근곡 음기 덕분으로 전해온다.
1996년 경주 서쪽의 건천땅 한 마을 뒷산에 큰 불이 났다. 북쪽 산자락에서 시작하여 반대편인 남쪽 기슭까지 온 산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불덩어리가 휙휙 날아다녀 반나절 만에 산 하나가 홀랑 다 타버렸다. 그러나 산의 한가운데 여근을 닮은 한 지점은 신기하게도 불길을 피했다. 샘 주변은 매우 축축하여 근방을 적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근곡에서 보이는 들판도 원래 이름이 '썹들'이었지만 장난삼아 '씹들'이라고 짓궂게 부르기도 한단다.

은방울꽃이 군락을 이루어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유학사, 지난해 이맘때 없던 삼층석탑이 생겼다.

원신마을 앞에 있는 못이다.

못 근처에 있는 전망대에 한계도전님이 차가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선암사 입구까지 땡볕에 아스팔트 길을 걷지 않고 차를 타고 편안히 이동할 수 있었다.
고마운 양반.
한계도전님의 펜 서비스
한게도전님이 거북바위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거북바위가 나온 이곳은 송선1리 달래창이란 곳이다. 2008년 8월 22일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는 중에 발견했다고 한다.
청동기시대 신앙대상물이었다고 한다.


오봉산은 온통 바위신앙
바위의 한면에 사각형으로 정성스럽게 파내고 촛불을 켰다.

바위에 돌을 붙였거나 갈았던 흔적이 있다. 붙임바위다. 이런 바위는 대개 기자석이다.

오봉산에는 여근곡 말고도 여근신앙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오봉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모습

복두암 들어가는 자연석 돌문은 여근석이다.
송곳바위는 앞에서 보면 남근석이고 뒤편은 여근석이다.
주사암 종각 위에 비스듬히 누운 바위 역시 거대한 남근석이다. 송곳바위 뒤 여근과 관련지울 수 있을 것이다.

마당바위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다.



'도보여행 > 인도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봉하마을 대통령길 순례- 2010년 5월 22일 (0) | 2010.05.22 |
|---|---|
| 오봉산 답사도보-2010년 5월 7일 (0) | 2010.05.12 |
| 무장사지와 무장봉-2010년 5월 5일 (0) | 2010.05.08 |
| 무장사지 가는 길/ 덤으로 계림 답사- 2010년 5월 5일 (0) | 2010.05.06 |
| 부산 울트라 걷기대회-2010년 4월 17~18일 (0) | 2010.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