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그대 가까이 1~ 5/ 이성복

추연욱 2022. 3. 21. 16:08

그대 가까이 1

 

바람에 시달리는 갈대 등속은

저희끼리 정강이를 부딪칩니다

분질러진 다리로 서 있는 갈대들도 있엇습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정강이가 부러진 것들이 자꾸 일어서려 합니다

눈 녹은 진흙창 위로 꺾인 뿌리들이 꿈틀거립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그대 가까이 2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 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

 

 

그대 가까이 3

 

나무 줄기 거죽이 자꾸 갈라지고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집니다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밥 먹고 옷 입는 일 외에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

멀쩡한 나무를 두드리니

 

잔 가지들이 놀라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한 글자만 허락해주십시오

저희에겐 한 글자만 허락해 주십시오

 

진흙창에 박힌 신발을 마른 풀에 비비며

저희는 돌아갈 일을 생각합니다

 

 

 

그대 가까이 4

 

그대 계신 곳을 멀리
뒤돌아가다가
겨울 나무들이 선 곳에
나도 섰습니다

그대 비밀을 안다면
나도 그대의 비밀이 될까요
눈송이 입자처럼 고운 비밀이
내게도 있었던가요

지금은 멎어버린 샘 가의
돌무더기처럼
나는 버려져 있습니다

간간이 비 뿌리거나
바람 스치면
그대 이름 되뇌어보면서

 

 

그대 가까이 5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해질녘이면 동네 뒷산을 헤벴습니다

 

신화나 예감 같은 것,

그런 것에나 쫓겨다니면서

지치면 겨울 나무들이 줄지어

섲 곳에 나도 섰습니다

 

한쪽 어깨가 바람에 깊이 패이도록

마른 나무들의 호흡을 받았습니다.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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