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다시 봄이 왔다 · 꽃 피는 시절

추연욱 2022. 3. 4. 12:50

다시 봄이 왔다 · 꽃 피는 시절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炭層이 깊었다

 

 

꽃 피는 시절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 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이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이성복, <그 여름의 끝>,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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