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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나들이 2/ 위양지·꽃새미 마을·홍제사 표충비- 2021년 2월 28일

추연욱 2021. 3. 2. 22:49

밀양 나들이 2/ 위양지 · 꽃새미 마을 · 홍제사 표충비- 2021년 2월 28일

 

 

  위양지

 

 

 

■ 밀양시 부북면 화악산 아래 위양못을 찾아서.

 

둘레 166m에 불과한 자그마한 저수지 안에,

5개의 섬과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 그리고 이팝나무 등이 어우러지며 빼어난 풍경을 그려낸다.

특히 바람이 없는 아침나절, 잔잔한 물 위로 주변 풍경이 모두 담길 때면 선경에 든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안내판에 따르면 위양못의 축조시기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엔 둘레가 4.5(2)에 달할 정도로 컸다.

 

位良池 혹은 陽良池로도 불리는데, 둘 다 '양민을 위한다.'는 뜻이다.

대개의 저수지가 그렇듯 위양못도 농사를 위해 조성됐다.

다만 저수지 가운데에 다섯 개의 인공섬을 만들고,

주위에 왕버드나무와 이팝나무 등을 심는 등 공들여 가꿨다는 것이 여느 저수지와 다른 점이다.

 

현재 세 개의 섬은 콘크리트 다리로 연결돼 있다.

나머지 두 개는 저수지 가운데까지 논이 확장되면서 사실상 뭍이나 다름없게 됐다.

 

못 가운데 섬에 세워진 정자 완재정은 1900년에 안동 권씨 후손들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완재정 풍광은 담장 옆에 선 이팝나무꽃이 흰쌀밥처럼 피어나는 때가 가장 아름답다.

 

 

 

 

 

 

 

 

 

 

 

 

 

 

 

 

 

 

 

 

 

 

 

 

 

 

 

 

 

 

 

 

 

 

 

 

 

 

 

 

 

 

 

 

 

 

 

 

 

 

 

 

 

 

 

 

 

 

 

 

 

 

 

 

 

 

 

 

 

 

 

 

 

 

 

 

 

 

 

 

 

 

 

 

 

 

 

 

 

완재정

 

 

 

 

 

 

 

 

 

 

 

 

 

 

꽃새미마을

 

 

 

 

 

 

 

 

 

 

 

 

 

 

 

 

 

 

 

 

 

 

 

 

 

 

 

 

 

 

 

 

 

 

 

 

 

홍제사, 표충비

 

 

 

 

 

 

 

 

 

 

 

 

 

 

 

 

 

 

 

표충비각

 

 

 

 

 

 

 

 

 

 

 

 

밀양 무안리 향나무

 

 

 

 

 

 

 

 

 

표충각

 

 

四溟대사(1544~1604) - 惟政은 법명, 사명당, 松雲, 鍾峯은 스님을 높여 부르는 호이다.

조선 중종 39(1544)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다.

13세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였다. 18세에 禪科에 합격하여 글 잘하는 승려로 통했다

 

직지사 주지를 지내고,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묘향산 보현사로 들어가 西山大師 休靜에게 3년간 수도하였다.

이후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선수행을 하다가 43세 되던 해 오대산에 머물렀는데,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강릉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러자 강릉의 유생들이 그의 무고함을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그뒤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전쟁보다 평화회담에 주력하였다.

 

1594712일에서 16일 사이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키요마사와 담판을 지었다.

이때 담판의 중요한 쟁점이 결렬되자 가토가 사명당을 놀리기 위해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사명당은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근과 邑 萬戶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라 맞받았다고 한다.

 

1604년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머물면서 설법과 외교활동을 벌여,

일본에 억류되어 있던 포로 3000명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금강산 보현사로 스승을 찾아갔으나 스승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후 사명대사는 僧役으로 나라의 일을 라여하였으나,

궁궐 재건 일이 틀어지자 해인사로 들어가 홍제암을 짓고 그곳에서 2년을 지내다가 67세에 입적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렸다.

 

해인사 홍제암에는 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 石藏碑가 있다.

이 비는 광해군 4(1612)에 세웠는데, 비문은 허균이 썼다.

사명대사의 전기로는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파괴한 것을 1958년 비조각을 모아 다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