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광야-이육사

추연욱 2009. 5. 21. 14:54

李陸史의 시 광야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 이어령의 풀이

①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는 건국신화보다 더 시원적인 시간, 천지의 아침이다.

눈 내리는 ‘광야’의 겨울은 인간이 누구나 다 겪고있는 세계의 추위이며 모든 인간 실존을 위에 내리는 눈이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역사가 끝나도 이육사의 ‘광야’에서는 계속 눈이 내리고, 계속 ‘매화향기’는 풍겨오고, 또 그 벌판에 내던져진 시인들은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


“천고 뒤”란 시간은 천지개벽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그 기니긴 우주적 시간의 단위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표현하는 말인 ‘천고’를 미래를 표현하는 말로 쓴 것이다. ‘천고’ 앞에 ‘다시’를 넣어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간 먼 미래의 우주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천고 뒤’란 말은 까마득한 과거와 미래가 짝을 이루는 개벽의 시간이다.

과거는 천지개벽의 하늘이 열리는 것이지만 미래의 그것은 초인에 의해서 땅이 열리는 개벽이다. 그 땅이 바로 ‘광야’인 것이다. 이 두 개벽 사이에 원초적인 과거와 미래의 빅뱅 사이에 끼여있는 시간이 ‘지금 매화향기 아득하니’의 바로 그 ‘지금’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단순히 일제식민지 통치를 받고있는 협의로서의 ‘지금’만이 아니라 전세와 후세의 상대적인 의미를 지닌 현세로서의 ‘지금’이다. 그러니까 천고 전에는 신들이, ‘천고 뒤’에는 ‘초인’이, 그리고 그 사이에 인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와 우주적으로 파악되는 인간세계의 조건이며 상황이다.


② 광야의 공간은 원초적인 공간이다. ‘하늘’이 나오고, 그 다음 ‘산(맥)’, 바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강’이 나온다. 그것들은 개인이나 나라, 그리고 인간보다 높은 우주적 공간의 차원에 속해 있는 천지이다. ‘광야’의 시간이 단기나 서기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인 것처럼 ‘광야’의 공간 역시 백두산이나 무슨 산맥으로 이름지을 수 없는 근원적인 공간이다.

‘광야’는 처음에는 그냥 ‘이곳’, 다음에는 ‘여기’라고만 암시되어 있다가 초인이 나타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이 광야”라 하였다. 그러니까 ‘광야’는 ‘지금’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 ‘여기’로서 인간이 살고 있는 현존성을 가리키는 장소인 것이다.

육사의 ‘광야’는 천지개벽할 때에도 산맥이 범하지 못한 원초적인 공간으로서 천지의 여백으로 남아있는 비결정적인 공간이다. 그러한 ‘광야’를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그 위에 ‘노래의 씨를’ 뿌릴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나 - 여기 - 지금”의 실존적 세계를 영원하고 무한한 우주로 확대시켜 가는 행동, 그것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의 언어들은 개인과 국가, 그리고 인간의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천지보다 깊고 넓은 코스모폴로지이다. 그래서 그를 가두었던 감옥은 광야만큼 넓어지고 일제식민지 36년은 천고 속의 작은 티끌로 소멸해 버린다.


<다시 읽은 한국 시>-(조선일보-1996년 3월 31일)


2. <광야>의 제의적 구조

祭儀의 구조는 신에 대한 본풀이(신화)를 구송하여 신을 출현하게 한 다음 제의행위의 내용을 행동 또는 신가로 시현한 뒤 제의의 목적인 기원내용을 서술하여 신의 응답을 들은 다음 신을 배송 하직하는 짜임으로 되어 있다.


<광야>는 시 전체의 구조와 내용이 신의 내력과 창조행위를 풀이하는 신화와 일치한다. 공간과 시간이 시원으로 회귀하며 신화 속의 신성사건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시 자체가 한 편의 본풀이 신화의 원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1~3연까지는 신의 본을 풀어 신을 출현하게 하는 단계이다. 범종교적인 의례인 신화 구송 단계로 여기 ‘광야’에서 구송되는 신은 하늘과 땅의 신인 ‘광야’, 곧 천신과 지신이다.

4연은 출현한 신의 제단 앞에서 엄숙한 제의의 本祭次 즉 중심내용을 노래로 서술하는 단계이다. 

5연은 4연에서 행제되는 제의의 목적이 비로소 구체적 언어로 표현되어 밝혀지는 단계, 곧 제의의 기원내용이 드러나는 단계이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라 하여 제의를 시작하여 하늘(천, 천신, 천부신)의 본을 풀어 나간다. ‘광야’를 찬송하는 대지신의 본풀이이지만 대지의 대응적 존재인 하늘의 본을 먼저 푸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천 ․ 지의 본을 푸는 것으로 창세신화가 온전히 구송될 수 있다. 태초의 창조신화를 구송함으로써, 신화 속에 있는 始源의 사건과 그 시간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하늘은 엄연한 실재이며, 태초의 하늘의 열림이 명백한 실제의 사건으로 제시된다. 그럼으로써 그 개벽의 신성한 의미를 바탕으로 현재의 자연이 존재하고 또 존재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까마득한 날”은 더 이상 소급할 수 없는 시원, 그래서 하늘 곧 천부신의 절대성과 신성성은 명백한 실재가 된다.

이런 생각은 이육사의 믿음이자 우리민족의 하늘에 대한 집단무의식이다.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경계가 되는 시점이다. 아직은 태고의 정지와 정적 속에 닭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하늘의 신성성은 한층 고조되어 있다.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라 


개벽으로 탄생한 대지(지모신), 곧 ‘광야’의 신성성을 찬송한 부분이다. 그 신성에 대한 확고한 보장과 믿음으로 “차마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는 말로 단정할 수 있었다. 개벽 이후의 하늘과 땅은 그 시원의 신성과 순수를 오랫동안 지님으로써 그 신적인 본질과 위치를 충분히 누려왔다.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인간의 삶과 역사의 시원을 밝혔다. 풍요의 상징인 큰 강물이 길을 열었다.


1연부터 3연까지의 제의상의 의미를 살펴보면, ① 개벽신화를 구송함으로써 하늘과 땅이 생긴 연유와 거기에 함축된 천신과 지신의 신성성과 위대성을 찬양한다. ② ‘광야’는 불가침의 신성한 역사를 향유하면서 그 신성성을 지켜왔다. ③ 생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강물과 함께 ‘광야’는 그 품속에 인간의 역사를 창조하고 포용하였다. ④ 제의는 천지의 위대한 개벽과 그 신성성의 본을 푸는 것으로써 제의의 정당성과 영험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배경이 설정된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1, 2행은 제의를 올리는 현재의 상황, 곧 시간과 장소, 제주를 밝히고 제의를 올리는 연유를 고한다. 

눈이 내리는 것은 하늘과 인간의 隔絶된 관계와 그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눈은  겨울이라는 계절과 차가움으로 인해 죽음을 상징한다. 개벽 당시의 그 위대성과 신성성을 지닌 실재로서의 하늘은 이제 죽음의 저쪽 너무나 아득한 곳에 있다. 눈 덮인 ‘광야’는 시련과 고통으로 인한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카오스적 대지를 상징한다.

다른 한편 새로운 시원에서의 재생을 위하여 정지 속에서 유동을 진행하고 있는 생명의 전단계이기도 하다. 이 카오스로부터 새로운 천지, 즉 코스모스가 출현한다. 새로운 창조를 잉태하고 있는 모태가 현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생명세계의 도래는 다음 부분에서 씨뿌림과 순차적 순환의 양상을 보이면서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또 눈은 이 제의에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한 제장정화의 한 장치이기도 하다. 백색 설원의 장엄함 속에서 행해지는 제의는 가장 완전한 정결제이다. 현재의 한냉으로 인한 죽음이 끝나는 날 그 눈에 상응하는 화려한 생명이 개화할 것을 기대한다. 다음 연의 ‘백마’와 이어지면서 신성 효과를 상승시키고 백마 출현의 전 단계를 예비하는 이미지이다.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자

 

나는 씨 뿌리는 행위위의 주인공이다. 주인의 뜻에 의해서만 파종이 가능하다.  ‘광야’에 씨를 뿌리는 나는 ‘광야’의 주인이며, ‘광야’ 즉 대지(지모신)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드리는 이 제의가 정당한 것임을 밝혀 선언한 것이다. ‘내 여기’의 ‘여기’는 제의의 장소, 백설로 정화된 신성한 공간이며 신이 강림하는 곳, 곧 우주의 중심이며 풍요와 생산의 모태인 대지 그 자체이다.

‘씨’는 제의 그 자체의 상징인 죽음과 재생이라는 두 가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씨는 알과 동의어이다. 우주 이전의 혼돈상태를 나타낸다. 농경의례에서 알은 풍요를 위한 供犧로 바쳐진다. 씨(알)의 뿌림은 원초의 행위, 즉 창조의 반복이 가능함을 보증하는 것이다. M. 엘리아데에 따르면 알은 신년과 봄이 되돌아옴의 구조와 연결되는 한에서는 창조의 神顯(epiphany)을 표상하고 있고, 우주창조의 요약이다. ‘노래의 씨’는 노래를 싹트게 할 씨이다. 가난한 것은 노래가 아니고 씨이다. 화자가 뿌리는 ‘가난한 씨’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노래라는 새로운 신화를 위해 바쳐지는 제물이다. 이것은 자기희생을 통해 획득되는 민족의식의 발로와도 관계있을 것이다.

씨를 뿌리는 행위는 시원의 창조행위를 재현, 반복하는 의미와 그 창조의 주체였던 신과의 오랜 격절의 관계로부터의 화의를 추구하여 신과 동일성을 회복하자는 의미이다.


다시 천고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가난한 노래의 씨’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예비적 존재이며 소멸을 전제로 한 존재이다.

‘천고’라는 세월은 죽음과 재생 사이의 카오스적 상태이며 무시간성, 초시간성을 뜻한다. 다시 천고 뒤 곧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시대는 씨 뿌리는 오늘 나의 죽음의 제의에서부터 봄이 와서 매화가 피고 초인이 내임하는 재생의 그날까지의 기간이며, 죽음 체험의 기간이다. 초인의 재림은 구세주의 왕림에 의한 부활과 영생의 날이 아니고 개벽의 반복이다. ‘다시 천고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다는 예언은 까마득한 날, 즉 최초의 개벽과 신의 강림이 원형대로 반복될 것이라는 믿음이서 나온다. ‘부르게 하리라’에는 자신이 강한 의지적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렸다고 하여 태초 이전의 시간에 천신이 강림했음을 밝히고 ‘산맥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고 하여 지모신의 생성과 그 신성함을 밝힘으로써 대지의 본을 풀어 찬송하였다. 강물로써 천지부모의 자비로 인간사가 비롯되었음을 아뢰고 나서, 오늘날의 천부신과 隔絶과(지금 눈 내리고), 대지모신의 죽음(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으로 인한 사망과 불임의 계절적 상황을 고하고, 자신이 이땅에 씨를 뿌림으로써 천부의 아들이며 대지의 주인으로서의 정통성과 그 권리를 밝혀 주장하였다. 다음, 자신을 스스로 제단(광야)에 희생으로  바침으로써 천지에 다시 생육의 봄이 오고 위대한 초인이 강림하여 광야를 찬송하기를 기원한다.

천신과 지신의 본을 풀어 그 신성함과 권능이 증명되었고, 제의를 드리는 나의 정통성과 그 간절한 자기희생의 정성이 또한 밝혀졌다. 그러므로 제의의 모든 조건과 절차는 정당하고 합당하다. 그러므로 천신의 강림과 광야의 소생을 위한 나의 축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李霥熙, <한국현대시의 무속적 연구>, 집문당, 1990.


※ 무속과 제의

祭儀는 존재의 획득과 지속을 위해 행한다. 제의는 먼저 제의를 올려야 할 신앙대상으로 신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신을 신앙하여 제의를 올리는 신도(민간인), 그 다음으로 신과 신도 사이에서 제의를 진행하는 전문적인 사제자인 무당이 있어야 한다.

무속의 제의는 請神-娛神(대접, 기원, 공수)-送神의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세분하면, ① 준비과장 ② 거리과장(신령의 초치, 신령을 환대, 공수[信託]내림, 신령을 돌려보냄), ③ 종결과장으로 위의 3단계가 다시 세분되어 12제차가 행제된다. 곧 신에 대한 본풀이(신화)를 구송하여 신을 즐겁게 한 다음 제의행위의 내용을 행동 또는 神歌로 시현한 뒤 제의의 목적인 기원내용을 서술하여 신의 응답을 들은 다음 신을 배송 하직하는 짜임으로 되어있다.

각 제차에는 그때마다 다른 신이 청해지고 무당은 그 신을 상징하는 무복을 입고 무장을 갖춘 다음 무가와 跳舞를 중심으로 행제한다. 무복은 신의 강림을 청하고 신과의 동일시를 의도하는 뜻이다. 가무는 음주와 함께 강신무에 있어서 청신과 접신과 오신의 기본적인 방법이다.

신을 강림하게 하는 매제차마다 무당은 음악에 맞춘 느린 춤으로 청탁한 다음 빠른 춤사위로 신을 맞아들여 접신함으로써 憑依되어 엑스터시(extasy)에 이른다. 엑스터시 상태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신의 능력을 체득하는 종교 체험을 한다. 죽음의 체험이라는 고통을 통해 신과 동일성을 획득했을 때 인격의 상승적 전환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상태는 현세의 시공은 사라지고 태초 이전으로 회귀된 근원적 시공, 카오스 또는 영원세계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무시무공의 혼돈과 정지 속에서 신인이 교환하는 죽음의 체험을 통하여 모순과 갈등, 불화와 쇠퇴를 극복하여 새로운 생명력의 획득과 지속으로 재생하는 전단계이다. 무당은 이 상태에서 기원하고 공수하고 예언하며 신의 힘으로 악귀를 쫓아 무당으로서의 신통력과 권위를 발휘하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는 그의 공동체적 직무를 수행한다. M. 엘리아데는 엑스타시의 기술이 샤마니즘이라 정의했다.

한국 무속은 엑스터시 상태에서 신과의 和誼를 추구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신과 불화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우리나라 巫의 기본관념이다. 따라서 신과의 화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 상호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로 인간사에서도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명제요 덕목이었다.


제의의 공간은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세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일상적인 현실의 생활공간과 구별되고 현실의 공간으로부터 차단 격리된다. 금기 표시로 치는 금줄은 일상적인 새끼가 아닌 왼새끼로 제의 공간이 일상적인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임을 상징한다. 왼쪽은 비일상적 방향이다. 금기 표시인 황토는 태양에서 유추된 빛갈로 逐鬼의 기능을 가진다. 붉은 흙, 새 흙이어서 역시 일상적인 것이 아님을 상징한다.   

제의가 시작될 때는 먼저 부정굿을 하여 굿판 안을 정화한다. 굿판 주위에 물을 뿌리고 불을 붙여 들고 굿판 주위를 돌아,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태워 없애고 물로 씻어 떠내려 보낸다. 천지개벽은 몇 년이고 끝없이 비가 와서 홍수가 나 세상이 물로 덮여 없어지고 하늘과 땅이 맞붙어 버렸다가 다시 새롭게 열려 새 세상이 온다고  믿는다. 

반드시 촛불을 켜고 井華水를 바치며 술을 부어 놓는 것 모두 제의 공간 안에 있는 일상적인 현실을 소거 정화시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술은 물과 동계의 액체로 역시 홍수의 상징물이다. 또 술은 접신의 보조수단이다.  

곧 제의는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연장이 금지된 장소, 즉 일상적인 인간의 출입이 금지되고 일상적인 생활공간이 연장되지 않고 차단된 장소이다. 이것은 공간이 없어진 무공간의 종말을 의미한다. 공간의 질서가 생겨나기 이전 하늘과 땅의 공간의 구별이 없는 혼돈의 카오스 상태가 된다.


제의의 시간은 인간들이 활동하는 일상적인 시간이 아닌 밤이다. 낮이 끝나 없어진 시간인 동시에 낮의 밖에 있는 시간, 그래서 일상적인 현실 밖에 있는 시간이다. 곧 우주 공간이 끝난 카오스에 있는 시간이다.

카오스는 혼돈뿐이다. 공간도 시간도 없는 세계, 곧 無이다. 그래서 제의하는 시간인 밤은 천지가 개벽되던 최초 이전의 시간인 카오스이다. 시작과 끝이 없으므로  무한한 시작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제주도 무가 초감제에서는 “천지가 혼합이 되었구나/천지개벽이 되었구나”라 하여 천지개벽 이전의 혼돈에서 하늘과 땅이 열려 처음으로 하늘과 땅의 공간질서가 생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카오스에서 하늘과 땅이 열려 우주 공간의 질서가 생기면서 하늘과 땅이 개벽한다는 그 열림의 출발점에서 시간이 시작되고 그 우주 공간 안에 비로소 만물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카오스는 만물의 존재 근원이다. 제의는 이같은 만물의 존재 근원인 카오스로 돌아가 결핍된 존재를 다시 획득하여 충족시키는 현상이다. 하늘과 땅의 근원이 카오스이고, 이 하늘과 땅의 우주 코스모스 안에 만물이 생겨났는데, 이 만물의 존재의 궁극적 근원은 역시 카오스이다. 카오스 - 코스모스 - 카오스로 환원 존재의 순환계 위에서 존재가 영원히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