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일
박목월
여기는 경주
신라 천년……
타는 노을
아지랑이 아른대는
머언 길을
봄 하루 더딘 날
꿈을 따라 가면은
석탑 한 채 돌아서
향교 문 하나
단청이 낡은 대로
닫혀 있었다.
길처럼
박목월
머언 산 굽이굽이 돌아갔기로
산 굽이마다 굽이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보일 듯 말 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 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 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피리를 불면
조지훈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만리 구름길에
학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젖은 풀잎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데
물 우에 바람이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뵈는 자하산
열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돋는
사슴도 운다.
古寺 2
조지훈
목련꽃 향기로운 그늘 아래
물로 씻은 듯이 조약돌 빛나고
흰 옷깃 매무새의 구층탑 위로
파르라니 돌아가는 신라 천년의 꽃구름이여
한나절 조찰히 구르던
여흘 물소리 그치고
비인 골에 은은히 울려오는 낮 종소리.
바람도 잠자는 언덕에서 복사꽃잎은
종소리 새삼 놀라 떨어지노니
무지개빛 햇살 속에
의희한 단청은 말이 없고……
芭蕉雨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청록집>, 을유문화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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