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과 무명베
|
문익점(1329~1398),
본관은 南平, 호는 三憂堂이다. 진주성의 속현이었던 강성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이다.
문익점의 아버지 文叔宣은 과거에 합격한 적이 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못했다. 시골 선비로서 배경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농사짓는 틈틈이 학문을 익히는 선비였다.
아버지가 농사꾼인 것은 훗날 익점이 큰일을 이루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익점은 11세에 개경으로 가 李穀(1298~1351)의 문하에서 공부한다. 여기에는 그의 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꿈도 들어있을 것이다. 익점은 이를 계기로 이곡의 아들인 牧隱 李穡(1328~1396)을 만나 교유한다.
16세에 정천익의 딸과 결혼한다. 정천익은 典客寺令1이란 벼슬을 지낸 뒤 낙향하여 사는 지식인이다.
익점은 20세에 향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한다.
그는 이제 이색 등 개경의 쟁쟁한 집안의 아들 또는 문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고려 제31대 공민왕(1351~ 1374) 9년(1360), 왕이 새로 지은 궁궐인 신경에서 실시한 신경동당시에서 급제자 33명 중 7등으로 급제하였다. 이 시험에서 장원은 당시 34세인 정몽주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첫 벼슬은 부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 金海府司錄이었다.
이어 유교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 諄兪博士 등의 벼슬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던 1363년 啓稟使 李公遂(1308~1366)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로 간다.
13세기 세계사의 주역은 몽골이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유럽이 몽골 기병의 말발굽에 변변한 대항 한 번 못하고 무너졌다.
고려는 제23대 고종(1213~ 1259 재위) 18년(1231)에 몽골의 침입을 받은 이래 30여 년 맞서 싸웠다.
몽골의 침입을 받기 시작한 고려 무신정권은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종 19(1336년 6월) 강화로 천도하여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했다. 그후 몽골은 전후 30여 년간 여섯 차례2 불탄다. 제3차- 1235년 윤7월, 1236년 황룡사 불탄다. 제4차- 1247년 7월, 49년 1월 원나라 정종 사망으로 철수 제5차- 1253년 여름 총사령관 예구가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침략 제6차- 1254년 7월 車羅大가 군사 5천 명으로 침입." height="14">에 걸쳐 침입하여 내륙을 짓밟았다. 본래 수전에 약한 유목민족인 그들은 강화도에는 상륙하지 못했다.
그 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고종 41년(1254) 제6차 침입 때는 한 해 동안에 고려인 남녀 26,800명이나 사로잡아 갔다. 성인 남자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고 남자아이와 여자들만 살아남았다.
몽골과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원나라로 끌려간 여자와 아이들은 줄잡아도 50만 명은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자는 성노리개로, 종으로 부리기 위해, 어린아이는 심부름을 시키다가 자라면 노동을 시켰다.
그동안 무신정권에 억눌려 있던 일부 문신들은 몽골과 손을 잡고 무신정권을 타도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고종 45(1258)년 3월, 최이가 부하들에게 살해됨으로써 60년 최씨 독재체제가 무너진다. 정권이 일단 국왕에게로 돌아갔다. 국왕 고종은 친정체제를 회복하였으나 이미 늙고 병들었으며, 최씨들의 주도에 길들여져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최씨를 제거한 무신들의 발호가 계속되고 있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이를 틈타 몽골은 다시 침략해 왔다.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 30년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백성들이 지방관이나 장수를 죽이고 항복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몽골군은 강화도를 완전히 고립시키고, 점령지의 곡식을 깡그리 거두어 갔다. 또 평안도 철령을 국경으로 삼는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12월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몽골의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고종 46년(1259)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고 태자 倎(원종)을 몽골로 보내 항복의 뜻을 밝혔다. 강화도의 성곽을 헐어 항의 의지를 포기함을 분명이 했다. 몽골군은 주력부대는 압록강 밖으로 철수하고 일부 부대만 서경 등지에 주둔하였다. 이로써 30년 전쟁은 끝났다.
제24대 원종(1260~ 1274)은, 왕 10년(1269)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오기 위해 개성에 出排都監을 설치하고 태자 諶(뒤에 충렬왕)을 보내 항복 의사를 분명히 했다.
원종 10년 12월 원나라로 간 원종은 원세조3에게 자신을 폐출시키려던 사건에 대해서 고발하고, 이듬해 2월에는 세자와 원나라 공주의 결혼을 요청하는 청혼표를 올렸다. 이렇게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종의 이런 태도에 분노한 임연은 원종 10년 6월 원종을 폐하고 임금의 동생인 安慶公 淐을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았다. 이때 몽골에서 돌아오던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몽골로 돌아가 왕의 폐위 사실을 알린다.
원나라에서 병부시랑을 위협하자 임연은 4개월 만에 원종을 복위시킨다.
원종 11년(1270), 1231년 사르타크의 침입으로 시작된 몽골의 침략은 개경환도로 끝을 맺었고, 고려 조정은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지 39년 만에 옛 도읍지 개경으로 돌아왔다.
배중손을 위시한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왕족 承化候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봉기한다.
이때부터 고려 여인들의 비극이 시작된다.
고려가 항복하자 원나라는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게 해 주는 대신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는데, 그 중에는 막대한 금은보화 인삼, 사람, 특히 여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에 바쳐진 고려의 여인들, 이들은 공물의 일종이지만 여자임으로 貢女라 했다. “조공으로 바치는 여자”라는 뜻이다. 공녀 중에는 왕족이나 귀족의 딸도 있었으나 이들은 정치적 목적이었고, 대부분은 童女라 불린 백성들의 어린아이들이었다.
몰골 사람들은 유난히 고려 여자를 좋아했다.
몽골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우유를 짜거나 가축을 기르느라 햇볕에 그을리고 손의 피부가 터져 많이 거칠었다. 사막과 초원에서 사는 이들은 성격도 드세었다.
몽골군은 농경지대를 정복한 뒤 무엇보다 여자들을 탐냈다. 얼굴도 곱고 피부도 부드러웠다. 농경민족 특히 중국과 고려의 양가의 여인들은 어릴 때부터 유교 교육을 통해 복종의 미덕을 배워 고분고분 남자의 말을 잘 따랐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 두었다. 여러 아내들은 본처와 첩이라는 차별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고려는 이와 달리 일부일처제를 고수하였고, 불법으로 첩을 두는 사람은 지탄을 받았다.
원종(1259~ 1274 재위) 15년(1274)에 원나라에서 공녀 140명을 요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고려는 어쩔 수 없이 결혼도감이라는 임시 관아를 설치하여 공녀를 선발해 보냈다. 이 무렵 남송의 군인들이 항거를 포기하고 원에 항복하였는데, 아내가 없는 자들이 많았다. 원나라에서는 이들을 써먹기 위하여 여러 회유정책을 썼는데, 아내를 구해주는 것이 그 한 방법이었다. 그들의 환심을 사고 원에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원나라에서 계속 공녀를 요구하자 고려에서는 寡婦處女推考都監이라는 관아를 설치해 과부, 처녀들을 뽑아 원나라에 보냈다.
원나라의 고려 여인 요구가 점점 거세지자 제25대 충렬왕(1274~ 1308) 13년(1287)에는 “양가의 처녀는 먼저 관아에 신고한 다음 혼인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공녀는 일년에 한번 또는 두 번 있었다. 많을 때는 한번에 50여 명씩 보냈다.
충숙왕 4년(1335)에 공녀 뽑는 일을 중지한다.
이곡은 <代言官請罷取童女書>라는 글을 지어 원나라 순제에게 올린다. 그는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통로인 어사대를 통해 순제에게 올렸다, 고려에서 공녀를 데려오는 일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글이다. 이곡의 문집 <稼亭集>에 실려있다.
고려 여인 기씨를 총애한 원나라 황제 순제의 이해도 있었을 것이다.
한동안 은밀하게 이루어지다가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완전히 철폐되었다.
이런 원나라의 요구 때문에 고려에서는 여자 아이가 열두 서너 살만 되면 혼인시키는 조혼 풍습을 낳았다.
그러자 도평의사사에서는 처녀 나이가 열여섯 살 이하, 열세 살 이상이면 마음대로 혼인시킬 수 없으며 반드시 관아의 허락을 받은 뒤 혼인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딸을 낳으면 사실을 숨겨 이웃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다 보니 여자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朴楡란 사람은 축첩을 주장하기도 했다. 첩을 여럿 두어 자식을 많이 낳아 여자 부족을 해결하자는 논리였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제15대 순제(1333~ 1368)의 황후 기황후,
선주(선천) 수령을 지낸 奇子敖의 막내딸.
그녀는 제27대 충숙왕(1313~1330, 1332~ 1339 재위) 복위 4년(1333)에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가 순제에게 다과를 시중하던 궁녀가 되었다. 그녀는 특히 아름답고 애교가 뛰어나 순제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던 중 1339년 아들을 낳았다.
순제의 사랑은 깊어졌고, 그녀는 제2황후가 된다. 원나라에는 “몽골 출신 여인 말고는 황후를 삼을 수 없다”는 전통을 깨고,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후로 삼았다.
여기에는 이전에 공물로 온 고용보, 박불화 등 고려출신 환관들이 막후에서 공작을 했다. 기황후는 이 두 환관들과 결속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 나갔다.
그러자 기황후의 오라비 기철, 기원 등은 원나라 궁궐에 드나들며 높은 벼슬을 받았고, 호화스럽게 살면서 온갖 횡포를 부렸다.
기황후는 고려 미인들을 궁중에 거느리고 있으면서 때에 따라 권력 있는 제상들에게 보내주었다. 당시 원나라 고관들은 고려 미인을 얻어야 명가에 들 정도였다. 순제 이후로는 궁궐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거의 고려인이어서 옷 신발, 모자 따위가 고려풍이었다.
벼슬아치들은 고려 여인을 집안에 들여놓고 방안에는 고려청자와 나전칠기를 장식으로 배치하였으며, 상 위에는 고려 종이와 먹, 바닥에는 고려 화문석을 깔고 살았다. 상류층에서는 인삼을 달여 먹고 수달피나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았다. 이러한 풍속을 高麗樣이라 하였다.
원나라 왕실에 고려 풍이 크게 유행하듯이, 고려에서는 원나라 풍이 유행하였다.4, 한길사, 1976, 245~254쪽. " height="14">
공민왕 2년(1353) 기황후가 낳은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된다,
이런 풍조를 타고 고려 벼슬아치들은 딸을 원나라에 보내 출세하려는 풍조도 생겼다.
1351년 강릉대군(곧 공민왕)이 왕으로 책봉된다. 어린 충정왕을 공민왕으로 갈아치운 것이다.5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 충혜왕의 동생, 충정왕의 숙부이다.
제31대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반원정책을 실시한다.
순제(1333~1368)의 황후인 기황후의 오라버니 기철을 위시하여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원나라가 설치한 征東行中書省의 理問所6를 혁파하였으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 땅을 되찾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원나라는 공민왕 12년(1363) 고려에 홍건적이 침입해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공민왕을 폐하고 원에 와 있던 충숙왕의 아우 德興君7을 지은 釋息影庵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이다. 이이가 덕흥군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덕흥군은 어머니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중이 된 탓으로 왕실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신임을 얻고 기황후와 모의하여 공민왕을 몰아내려고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온적이 있다. " height="14">을 고려왕으로 책봉해 고려에 보냈다. 이것은 기황후의 복수심이다.
이때는 문익점 일행이 원나라에서 사신 업무를 마치고 고려로 돌아오려는 시기였다.
당시 원나라에 있던 고려 관리들은 공민왕과 덕흥군 중 한 명을 임금으로 선택해야 했다. 고려 관리들은 원나라가 선택한 덕흥군이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덕흥군 측에 가담하여 벼슬을 받았는데 문익점도 이 중 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문익점의 정치적 첫 패착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문익점의 상관인 정사 이공수는 기황후의 외사촌 오라비이지만 덕흥군을 선택하지 않았다.
원나라는 최유란 사람에게 요동 군사 1만을 주어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를 치게 했는데, 최유는 평안도 정주까지 내려와서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패하고 말았다.
덕흥군을 지지했던 대부분의 관리들은 원나라에 남아 목숨을 부지하려 하였으나 무슨 까닭인지 문익점 일행은 이공수와 함께 공민왕 13년(1364) 10월 귀국했다.
연경을 떠나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밭을 보고 그 씨를 채취하여 가지고 왔다.
<태종실록>에 “전 左司議大夫 문익점이 사망하였다. 익점은 啓稟使인 左侍中 李公遂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甲辰年(1364년)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중 반을 본고을 사람으로 典客寺令 벼슬을 한 鄭天益에게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다만 한 개만 살게되었다.”
또 무슨 까닭인지 역신인 문익점은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는 것으로 처벌은 끝났다.
문익점은 목숨을 건지고 고향인 산청으로 내려간다. 그는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 시험재배를 한다. 여기에도 천성적인 농사꾼인 그의 성향이 들어난다. 거기다가 그는 과학자이기도 하였다.
원나라에서 가지고 온 목화씨 다섯 개는 장인에게, 다섯 개는 자신이 심었다. 자신이 심은 다섯 개는 죽어버렸다. 재배법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 다섯 개중 하나가 싹을 틔웠다.
그리하여 3년째 되는 공민왕 16년에는 수천 개의 씨앗을 얻을 수 있었고, 같은 고을에 두루 나누어 주어 목화 재배를 권장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10년이 채 안되어 전국에 목화씨를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목화꽃
목화꽃이 열매를 맺었다. 다래라 한다.
안에는 하얀 섬유질 같은 것이 있는데, 단맛이 나서 더러 먹기도 한다.
가을에 껍데기가 말라 벌어지고 무명 솜이 팝콘처럼 터져 나온다.
그러나 목화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는 방법을 알지 못해 고심 하던 중에, 원나라 승려 弘願이란 사람이 정천익을 찾아왔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홍원은 목화의 씨를 빼는 씨아[去核機, 取子車]와 솜을 타는 활,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정천익은 이 기술을 계집종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이 기계를 이용하여 무명 한 필을 훌륭하게 짜 냈다.
씨아는 목화씨빼는 도구다.
나무토막에 두 개의 기둥을 박고 그 사이에 둥근 나무 두 개를 끼운 것으로, 손잡이를 돌리면 톱니바퀴처럼 마주 돌아가면서 목화의 씨가 빠져 떨어지고 목화솜은 따로 빠져나온다.
<삼우당실기>에는, 홍원은 씨아와 활 만드는 방법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물레는 문익점의 손자 文來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우주의 운행원리를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구의 이름을 물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물레, 베틀 등은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무명베가 보급되기 전 명주, 모시, 삼베를 짤 때도 사용했을 것이다.
물레는 솜으로 실을 만드는데 쓰는 도구다.
손잡이를 돌리면 감아둔 줄이 돌면서 왼쪽에 있는 괴머리에 고정된 가락이 빠르게 돌아간다. 이때 가락 끝에 고치를 대면 실이 만들어진다.
바구니에 들어있는 하얀 솜뭉치는 고치다,
고치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으려고 만들어 놓은 솜방망이를 가리킨다.
자리짜기/ 김홍도
<자리짜기>란 이 그림에는 자리짜는 노인 말고도 글을 읽는 소년,
그리고 왼쪽에 여인이 물레를 잣고 있다.
왼쪽손에 있는 엿가락 같은 것은 고치이고, 물레를 잣으면 솔솔 풀려 실이 된다.
그림에서 고치는 실로 물레의 가락에 연결되어있다.
가락은 물레로 실을 잣을 때, 고치솜에서 풀려 나오는 실을 감는 쇠꼬챙이.
연꽃처럼 보이는 것은 바구니에 담겨있는 실뭉치다.
북은 베틀에 딸린 부속품의 한 가지.
씨올의 실꾸리를 넣는 기구로, 날실의 틈으로 왔다갔다 하며 씨실을 풀어 주는 기능을 한다
삼베, 모시, 무명, 명주 등을 짜기 위하여 씨실 꾸리를 넣고 날실 사이로 통과시키는데 쓰는 도구다.
한쪽 끝에 구멍이 있어 씨실이 계속 풀려 나온다.
이 실꾸리가 북 안에 들어간다.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이 때문에 목면이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상하 백성들이 모두 이를 입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문익점이 준 것이다”
시험 재배 37년 만에 모든 백성들이 무명옷을 입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8, 신라본기 48 景文王 조에, 왕 9년(869),……四十升白疊布(면직물의 중국어) 40필을 당나 라에 보내 사은하고……. ② 당나라의 史書인 <翰苑>에 고구려에서 白疊布를 짰다는 기록이 있다. ③ 충남 부여 능산리의 6세기 백제 절터에서 나온 백제산 직물이 나왔는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면직물 실물로 확인됐다.” <한겨레신문> 2010년 7월 16일. 문익점이 시작한 면직물의 역사가 800년 이상 빠르다. " height="14">
그의 이런 노력으로 고려 말 조선 초 우리 백성들의 의복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전에는 지배층만 비단을 사용했고, 벼슬아치들은 면포를 수입하여 옷감으로 썼다. 무명은 값이 비싸서 부자들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다. 일반백성들은 삼베, 모시 등의 옷감으로 옷을 만들었는데 이런 옷감들은 대량생산을 할 수 없었고 만드는데 노동력도 많이 들었으며 값도 비쌌다. 또 추운 겨울을 나기도 어려웠다.
이에 비해 목화는 재배와 옷감 제작이 쉬운 편이고 보온효과도 좋았다. 무명은 관복, 군복으로 썼으며, 솜은 이불, 베게 속 등에 사용하였다.
열매는 기름을 짜 식용유나 마가린을 만드는데 쓰인다. 기름을 짜고 난 깻묵은 사료, 비료로 쓴다.
국가 경제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무명을 수입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연히 비단 수입도 줄었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 재배 사업이 성공하여 백성들의 의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나자 그의 업적을 과장하고 신화적인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조선 순조 19년(1819) 후손인 文桂恒 등이 편찬한 <三憂堂實記>에는,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군주가 없다.”고 하면서 원제와 덕흥군 측의 회유와 압력을 물리치고 충절을 지킨다. 그러자 원제는 그를 42일 간 구류했다. 그래도 불복하니 남방인 交趾(지금의 운남성) 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거기서 3년간 귀양살이하고 풀려나 원나라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구해가지고 1367년에 귀국했다.
덕흥군 측에 가담하지 않은 탓으로 원나라에서 42일 동안 구금되었다, 그래도 덕흥군 측에 가담하지 않아 3년간 강남에서 귀양살이 했으며,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는 길에 면화씨를 구해 몰래 숨겨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면화의 원산지는 인도로 알려져 있다.
면화는 다년생 목면과 일년생 초면이 있다. 온대지방에서는 일년생 초본식물이지만 열대지방에서는 다년생 목본식물이다. 다년생 목면은 일찍이 후한 때 강남지방인 광동, 운남지방에서 재배하였다. 초면은 서역에서 전래된 것으로 남송 말 원나라 초에 화북지방에서도 일반적으로 재배하였다.
문익점이 가지고 온 우리나라 면화는 강남에서 재배되는 목면이 아니고 강북지방에서 자라는 초면이다. 문익점은 강남에 간 적이 없고, 목화씨를 밀수한 것도 아니다.
목화씨는 당시 원나라의 반출금지 품목이 아니었다. 당시 반출금지 품목은 국가의 안보와 관련된 것, 지도, 화약 등과, 아주 귀한 顔料 등이었다. 목화는 사방에서 자라고 있었다.
15세기 초 조선 태종 때부터 靑木棉이란 이름의 목면이 일본 사신에 대한 하사품 중에 포함되기 시작한다. 그후 20년 사이 하사품 중 주종을 이룬다.
15세기 후반 일본 지방 영주들이 매년 수천 필씩 조선 무명베를 수입해 갔다.
17세기 초 에도[江戶]시대 출간된 <淸良記>에 따르면 15세기 오오닌의 난(1467~1477)을 비롯한 전란으로 군복 같은 옷감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다. 이 무렵 명나라의 海禁정책으로 명나라와 거래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으로부터 무명베를 수입하면서 목화씨를 가져가 우리보다 약 100년 후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7세기 중엽까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면작이 이루어졌고 명나라 사신들에게 면직포를 하사할 정도로 면업이 발달해 그 질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그후 쇄국정책으로 우리의 면업은 근대화의 문턱에서 망국과 더불어 무너지고 말았다. 그 사이 일본은 우리를 앞질러 근대화를 선도한 산업으로 도약하였다.
문익점은 다른 사신들도 수없이 보았을 목면을 보고 고국에도 재배할 것을 생각했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귀국길에 목화씨를 가지고 왔다. 벼슬길에서 밀려나자 미련 없이 권력의 언저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에 힘을 기울였다. 풍토가 다른 고국땅에서 성질을 잘 알지 못하는 목화를 재배한 실험정신과 창의적인 정신, 그리고 그 결과를 각지에 고루 나누어 주었던 베품 등은 모두 그의 위대한 정신이다.
덕흥군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던 그는 목면 보급에 관한 공로로 제32대 우왕(1375~ 1388) 1년(1375) 정6품직 典儀主簿로 임명되어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목은 이색이 집권하자 그를 등용한 것이다. 창왕(1388~ 1389) 때는 左司議가 되어 왕에게 학문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 무렵 私田制를 부활하려는 논의가 있었는데, 문익점은 이색, 우현보 등과 같이 토지개혁을 반대하는 보수파의 입장에 섰다. 역성혁명파 신흥사대부인 조준의 탄핵으로 벼슬길에서 쫓겨난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정치적 패착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1398년 70세로 사망한다.
사후 조선 태종 1년(1401) 문익점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 그의 고향인 신안면 신안리에 세워진다. 또 정2품직인 參知政府事와 江城郡의 공신 칭호를 추증받았다.
조선 명종 9년(1554) 도천이란 사액을 받았다. 道川書院은 조일전쟁 때 불탔다가 중건되어 정조 11년(1787) 복액되었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어 蘆山精舍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최근에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과 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忠宣公이다.
세조는 그의 공적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에 사당을 세우고 그 유지비용에 충당하도록 祭田을 내려 주었다.
1400년 권근의 요청으로 문익점의 손자들이 벼슬길에 나오게 된다.
손자 文承魯는 의성현령이 되었다. 그는 의성군 금성면 탑리를 중심으로 목화를 재배하였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기념비가 있고, 지금도 해마다 목면제가 열린다. 다른 손자 문영은 일선(선산)부사로 부임하여 이곳에서도 목화재배를 장려하였다. 이렇게 목화는 의성과 선산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맨 처음 경상도 지리산 밑에서 재배가 시작되어 경상도 내륙과 전라도 평야 지대를 거쳐 충청도로 이어지고 차츰 북쪽으로 올라간다.
그의 자손들에게 공신의 칭호를 이어받도록 조치하였다.
■ 문익점 목화시배지(사적 제108호)는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文益漸棉花始培地가 있고, 여기에 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서원 바로 옆의 산 중턱에 문익점의 묘가 있다.
- 외국 손님 접대와 궁중 연회 등을 맡아보던 전객시의 관리. 총책임자인 판시 다음 자리. [본문으로]
- 제1차- 1231년 8월 撒禮塔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 제2차- 1232년 8월 撒禮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침략, 撒禮塔은 전사한다. 이때 대구 부인사 <초조대장경 [본문으로]
-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1260년~ 1294, 재위)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이며,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1271년 국호를 元으로 고치고 大都(현재의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본문으로]
- 원나라 왕실과 귀족사회에 고려풍이 유행한 것처럼 고려에서 원나라 문물이 많이 들어왔다. ① 조혼, 축첩, 임질, 매춘부, 남색, 환관 등 새로운 풍속이 들어오고, ② 궁중 용어가 많이 몽골어로 바뀌었다. 마마(왕과 왕비, 대왕과 대비), 마누라(邸下, 세자와 세자빈), 무수리(궁녀) 등. 몽골의 지배를 받은 100여 년 동안 원나라 공주 7명이 고려왕의 비가 되었고, 거기 따른 심부름꾼도 100여 명에 가까웠다. ③ 만두, 설렁탕(空湯), 소주, 등이 들어온다. ④ 족두리(몽골 여자들이 외출할 때 사용), 신부의 귀고리와 뺨에 연지, 두루막 등.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7 [본문으로]
- 원나라가 고려 임금을 폐하고 종친을 왕으로 삼은 경우는 여러번 있었다. 제26대 충선왕. 제 27대 충숙왕 제28대 충혜왕 등은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된 임금들이다. [본문으로]
- ‘정동행중서성’은 일본정벌이 중지된 뒤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변했다. ‘이문소’는 죄인을 잡아들여 문초하는 기구다. ‘정동행중서성 이문소’를 혁파한 것은 사법권을 되찾은 것이다. [본문으로]
- 덕흥군은 충선왕(1298.1~1298. 8, 1308~1313)의 셋째 왕자다. 가전체 <丁侍者傳 [본문으로]
- ① <삼국사기 [본문으로]
'문화유산 > 문화유산 답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주사 (0) | 2015.06.06 |
---|---|
통도사 금강계단과 붓다의 사리 (1) | 2015.01.12 |
문수산 남암산 참고자료 (0) | 2014.09.13 |
함안/ 아라고분군 (1) | 2014.06.30 |
[스크랩] [부산] 6/7(토) 남원 실상사 석장승과 동.서 삼층석탑 (0) | 2014.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