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박시은

추연욱 2014. 6. 13. 08:32

 

물과 나무와 풀과

 

박시은

 

햇살 찬란한 세상살이엔 후졌지만

푸른 마음은 늘 들고 있었다

 

이방인 같고 외계인 같았지만

다 놓고 떠나는 것

붙들 것도 없으면서 붙들고 있었다

 

사랑에서 벗어난 지도 오래되었다

때때로 골몰하면서 마지막을 궁리하기도 했지만

앙금이 풀어지지 않아 멍울 같은

슬픔이 피처럼 번졌다

 

물과 나무와 풀은

어눌함도 후진 매무새도 셈하지 않았다

맑고 순한 마음을 순한 향내로 받아주는

 

외로운 사슴이었다

바람이었다

맑은 시냇물이었다

 

작은 웅덩이에 고인 샛말간 하늘이었다

 

박시은, <겨울 대나무>, 작가마을, 2014.

 

 

 

저녁에

 

박시은

 

지친 저녁이 호숫가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포개어진 굴레 벗어나

분수처럼 솟고 싶은 저녁

둥글게 부푼다

 

깊어진 마음

빼낼 수 없어

밝아지다가

흐려지다가

그 음영으로 그림자 진 아픔

 

겹겹이 아득한 산

가라앉히고

둘러친 푸른 안개 다 먹어버린

호수 속으로

열이래 휘영청 내리는

달빛

꽃비늘 일렁이며

잠수하고 있다

 

박시은, <겨울 대나무>, 작가마을, 2014.

 

독백

 

박시은

 

비워야 길이 보인다고 하지만

마음까지 다 놓아 버리라고 하지만

늘 잡동사니 생각으로 채워가며

또 하나의 방을 만드는 아집 같은 것

 

물결 거스르며 여기저기

상념의 통로를 떠돌던 오랜 기다림 같은

무언지 확연히 알 수 없는

가라앉지 못하는 팽팽한 신경줄

 

지금 발디딘 이곳

세월 후벼파는 거 좀 떠나고 싶어

허위의 껍질을 훌흘 벗어 버리고

안개 휘몰며 다니다 신선처럼

벼랑 아래 흐르는 여울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고사산수도 풍경따라가 볼까

 

박시은, <겨울 대나무>, 작가마을, 2014.

 

 

 

 

 

여름 바람

 

박시은

 

사위질빵꽃 흐드러진 하얀 산길

놀빛에 홀려

벼랑에 섰다가

성긴 숲 속에 앉은 나

안개의 등에 얹혀 비 맞는다

 

질경이 잎새로 질기게 머물다가 간다

목을 길게 늘이고

하얀 더듬이로 타오른다

꽃등에 얼굴 묻는다

혼불 같은 개망초 넋 흐드러진 벌판

허기진 마음 다스리려

달빛 휘저으며 걷는다

 

잠재울 수 없는 바람

휘몰아치는 열기처럼

여름이 익는다

 

박시은, <겨울 대나무>, 작가마을, 2014.

 

 

 

 

여기 그냥

 

박시은

 

섬과 여처럼

그대로 있겠다

나는 떠나지 않겠다

 

초라한 모습 부끄러운 날

그땐 여처럼

죽은 듯 숨어 있겠다

쓰리고 아린 시간 어루만지며

 

그리운 바람 앞세우고 다시

섬이 되겠다

먼 길 도느라 지쳤을 너

술레잡기하듯

더 헤메이는 것 보고 싶지 않다

깃발 펄럭이는 내 더듬이와

맑은 얼굴로 너를 맞겠다

환한 섬이 되겠다

 

흔들리는 일상이지만

그냥 여기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다시 돌아온 너를

아니 영영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며

그냥 여기

 

박시은, <겨울 대나무>, 작가마을, 2014.

 

 

바로 지금

 

박시은

 

꽃그늘도 안개비도 초록들판도

무책임한 적은 없었다

끙끙거렸던 날들은 실오리 같은 희망을 붙잡으려

모래바람 흩날리는 사막을 건너왔다

마지막까지 맞섰던 운명은

해탈을 빗금으로 긋고 있었다

빠른 리듬의 분할처럼 잦은 변주를

유유자적하게 펼쳐 놓은 구름

풀숲의  한 모퉁이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아서

더더욱 고즈넉한 야생화

생에 도로는 없다며 살랑이고 있었다

불꽃 튀는 기대로 설레었던 바람도 잦아들고

빈 들녘 품어 안은 보랏빛

들국화

초탈한 듯

해맑게 웃고 있다  

 

박시은, <겨울 대나무>, 작가마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