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 등산자료
천관산과 그 주변의 문화유적
▲ 천관산(723m)은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위 봉우리들이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아있다. 이 중에는 기바위, 사자바위, 부처바위 등 이름을 가진 바위들도 많다.
정상 부근에는 130만㎡의 억새밭이 장관을 이룬다.
특히 꼭대기 부분에는 바위들이 비죽비죽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관 같다하여 천관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천관산은 예로부터 남원의 지리산, 부안의 변산, 장성의 내장산, 영암의 월출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혀 왔다.
산에 오르면 남해안 다도해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지고, 북으로는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제암산, 광주의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오며, 날씨가 맑으면 바다 쪽으로 제주도 한라산이 신비스럽게 나타난다.
매년 가을 천관산 정상 억새평원에서 천관산 억새제가 열린다.
※ 靜明國師 天因(1205~1248)이 쓴 <天冠山記>가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정명국사 천인은 白蓮社를 창설한 원묘국사 요세의 수제자이며, 백련사의 제2법주이다.
천하에 통한 것이 한 기운이 새면 내와 개천이 되고 쌓이면 산과 뫼뿌리를 이룬다. 烏嶺 남쪽 바닷가 옛적 烏兒縣 지경에 천관산이 있다. 꼬리는 궁벽한 곳에 서리고 머리는 바다에 잠겨 일어났다 업드렸다 하며 높고 우뚝하게 솟아 여러 고을 땅에 걸쳐 있으니 그것은 큰 기운이 쌓인 것이리라.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이 산을 支提山이라고도 한다’ 하는데 <화엄경>에도 있듯이 ‘보살이 머물렀던 곳을 지제산이라 하고 현재 보살이 있는 곳을 천관산이라 한다’ 하는 설도 이와 같다.
산의 남쪽 언덕에 포개진 돌이 우뚝 서서 두어 길이나 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서축의 아육왕이 성사의 신통력을 빌어서 8만 4천 개의 탑을 세운 것인데 이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탑 앞 끊어진 언덕 위에 층대가 한길 남짓하게 우뚝 솟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부처님과 가섭이 편안하게 앉았던 곳이다. 상고하건데 佛願記에 이르기를 ‘내가 가섭과 더불어 조용히 앉았던 곳에 아육왕이 내가 입적한 뒤에 탑을 세워서 공양하겠다.’ 하였는데 아마 이것이리라.
……신라 神虎王이 태자로 있을 때 임금의 견책을 당하여 산 남쪽 완도로 귀양갔는데, 華嚴洪震大師가 본래 태자와는 좋아하는 사이라 동궁의 일이 급함을 듣고 달려가 이 절(천관사)을 의지하여 밤낮으로 정성껏 예를 하며 화엄신중을 불렀다. 곧 여러 신중을 감동시켜 부름에 응하여 절의 남쪽 봉우리에 죽 늘어섰으니 지금의 신중암이 그것이다.
1. 천관산은 支提山이라고도 했다 한다. <화엄경>에 따르면 지제산은 천관보살이 항상 머물며 설법하는 곳이다. 홍진대사가 ‘이 절을 의지하여 밤낮으로 정성껏 예를 하며 華嚴神衆을 불렀다. 곧 여러 신중을 감동시켜 부름에 응하여 절의 남쪽 봉우리에 죽 늘어섰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에는 천관산 천관사를 중심으로 천관보살에 대한 신앙도 있었던 듯하다. 신중은 사천왕, 金剛力士, 팔부신중 등으로 불법과 불자를 수호하고 나아가 나라를 지키고 재난을 막는 신이다.
홍진이 예를 다하여 불러 늘어서게 한 신중을 해상왕 장보고 세력과 관련시키는 견해도 있다.
836년 제42대 흥덕왕(826~836 재위) 사후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청해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당시 그와 친밀했던 홍진대사가 이곳 천관사에 머무르면서 장보고를 설득해 민애왕을 축출하고 김우징을 제45대 신무왕(838~839 재위)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홍진대사의 사상은 혁명사상이었던 듯한데, 종래의 미륵신앙이 아닌 천관신앙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 이 절의 서북쪽에 阿育王塔이 있었다고 한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이곳에 보탑을 세워 붓다의 사리를 모셨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전래설과 관련이 있다.
또 아육왕탑 밑에는 과거불이 좌선했다는 자리가 있는데 이를 가섭불연좌석이라 한다. 이는 황룡사의 가섭불연좌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불국토사상과 관련이 있다.
<석보상절-24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巴連弗邑에 耶舍라는 上座가 있었는데, 왕이 그 상좌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하루 안에 8만 4천 개의 불탑을 염부제에 세우려고 합니다.” 하니 야사가 이르되, “좋습니다”고 했다. 왕이 밤에 귀신들을 시켜 칠보 가루로 8만 4천의 보탑을 만들고 야사존자에게 명하여 손가락을 펴서 8만 4천 줄기의 빛을 발하게 하고 날랜 귀신을 시켜 한 줄기의 광명마다 따라가서 그 빛이 다다르는 땅에 동시에 탑을 세우라 하니 귀신들이 이르되, “산이 가려서 서로 모를 것이니 어찌 동시에 세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되, “너희들이 가서 세울 준비를 하고 있거라. 그러면 내가 아수라를 시켜서 月食을 하게하면 사천하의 북을 다 동시에 칠 것이니 그때 세우라”고 했다. 귀신들이 월식한 때에 8만 4천 탑을 함께 세우니 그 탑이 중국에 있는 것도 열아홉이니 우리나라에도 전라도 천관산과 강원도 금강산에 이 탑이 있어서 영험한 일이 있었다. 아육왕이 탑을 세운 것이 厲王 46년인 戊辰(BC 833)이었다.
<삼국유사-제3권 遼東城 育王塔>조에
……그 곁에는 세 겹으로 된 토탑이 있는데, 위는 솥을 닮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다. 거기를 길 깊이나 되게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 보았더니 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가 있었다. 侍臣이 이 글을 알아보고 불탑이라 말하였다. 왕이 자세한 것을 묻자 시신은 대답한다. “이것은 한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이름을 蒲圖王(본래는 休屠王이라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金人이다)”이라 합니다. 聖王은 이로부터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칠중의 목탑을 세웠고 뒤에 불법이 비로소 전해오자 그 시말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이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이 썩어서 무너졌다. 阿育王이 통일했다는 염부제주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괴상할 것은 없다.
옛 전설에 불교전래 이전에 요동성 근처에 불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아소카왕이 귀신의 무리를 시켜 세운 8만 4천 탑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불교 전래 이전에 이미 佛緣이 있었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 불국토 사상
<삼국유사-제3권 황룡사 장육>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룡사……己丑년(553)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후 얼마 안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척이 나타나서 하곡현 사포(지금의 울주 谷浦)에 닿았다. 배를 검사해보니 公文이 있는데, 쓰기를 “서축 아육왕이 누른 쇠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석가의 존상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로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고 했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縣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東竺寺를 세우고 불상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太建(남조 陳 宣帝의 연호) 6년 갑오(574)에 장육존상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 5,007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쇠 1만 2천 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었다.
……뒤에 대덕 자장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이 현신해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한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無憂王(아소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셨으니……”
중국 오대산에서 자장에게 현신한 문수진신이 신라의 황룡사는 가섭불이 강연한 땅으로 그 때의 연좌석이 지금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護法王 아육왕(아소카왕)이 鑄成에 세 번이나 실패하고 띄워 보낸 황철 등 불상을 만들 재료들이 1300여 년간 남염부제의 크고 작은 여러 나라와 팔만 취락의 모든 곳에서 모두 주성에 실패한 것을 신라에서는 북을 한 번 울리고(一鼓而就) 성공한 것은 신라 황룡사가 불연의 땅이기 때문이라 했다.
西竺(인도)에 대한 동축이라는 대등한 위치를 넘어 오히려 신라야말로 천축 이전에 붓다의 전세 인연의 땅이라는 것이다. 신라가 붓다와 인연이 있는 국토라는 점을 암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신라야말로 천하사방에 유일한 佛緣의 나라라는 생각이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제3권> 塔像 제4 迦葉佛宴坐石에 “신라 월성 동쪽 龍宮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으니 이곳은 곧 前佛 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 터는 곧 일곱 절 중의 하나이다.……연좌석은 불전 후면에 있었다. 일찍이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6척이나 되었으나 그 둘레는 겨우 서 발밖에 되지 않았으며 우뚝하게 서있고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이후로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서 보호하게 했다.”고 했다.
가섭불은 과거7불 중 6째 부처로 석가모니불 바로 앞의 부처이다. 연좌석은 좌선하던 돌이다.
신라의 불국토 사상은 황룡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국토에 광범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京都 안에는 전세불의 7곳의 절터가 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제3권 興法 제3 阿道基羅> 조에,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라……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그를 출가시켰는데, 나이 16세에 魏나라에 가서 崛摩(曹魏의 사람으로 定時연간(240~248)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高道寧과 간통하고 아도를 낳았다)를 뵙고 玄彰화상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또 돌아와 어머니께 뵙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지금까지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3000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聖王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곳의 절터가 있으니 하나는 金橋 동쪽의 천경림(지금의 흥륜사, 금교는 서천교로 우리 속명에는 솔다리이다. 절은 아도화상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흥법왕 정미(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여 乙卯년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 때 이루어졌다)이요, 둘은 三川의 갈래(지금의 영흥사), 셋은 龍宮의 남쪽(지금의 황룡사)이요, 넷은 용궁의 북쪽(지금의 분황사)이요, 다섯은 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이요, 여섯은 신유림(지금의 天王寺)이요, 일곱은 婿請田(지금의 담엄사)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 때의 절터이니 잎으로 길이 전해질 것이다.……
붓타 교화의 인연은 반드시 천축에만 있는 것이 아니 신라땅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라 땅에도 붓다와 인연은 수없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만진신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설화를 비롯하여 文殊岾, 阿尼岾(삼국유사 제5권 避隱 제8), 대비진신과 정취보살이 산다는 낙산, 붓다가 袈裟를 빨던 곳이 있는 만어사(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魚山佛影), 전대 가람처인 鵲鴨寺 등은 우리땅에 붓다의 인연을 이끌어온 설화들이다. 또 우리 산 곳곳에 비로봉, 세존봉, 나한봉 등 불 ․ 보살의 이름이 붙은 것도 이런데 기인한 것이다.
신라는 국가적 이념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불국토화 하였다. 종교적 이념을 정치적 ․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함으로써 적극적인 현실화의 길을 모색했다. 불국토가 된 신라에서는 나무, 풀 삼라만상이 그 어느 하나도 불연이 닿지 않음이 없으며 발길 닫는 그 어느곳도 붓다의 교화가 미치지 않음이 없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불국토 안에서의 산천은 유람하는 것은 그대로 불연에 접하는 것이며 일종의 성지순레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卍 탑산사 -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 천관산 서쪽 기슭에 있다.
신라 애장왕 1년(800) 通靈이 창건했다. 그뒤 조선 전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일전쟁 전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시왕전, 公需廳, 香積閣, 正房 등을 갖춘 큰 절이었다. 또 800근에 이르는 대종 등 많은 유물도 있었다.
그러나 조일전쟁 때 왜병들이 침입하여 대종을 녹여 총포를 만들었는데, 그 기록이 작은 종의 용두에 새겨져 있다. 그뒤 영조 21년(1745), 1747, 1748년에 이르는 세 차례의 화재로 거의 소실되어 작은 암자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23년에는 이 암자마저 불탔다. 보관하고 있던 종 塔山寺 癸巳銘 범종(보물 제88호)은 해남 대둔사로 옮겼다.
1925년 다시 소규모의 절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 탑산사 癸巳銘 범종은 이 절에 있다가 대둔사로 옮겨 현재 대둔사 유물전시관에 있다. 종신의 한쪽 보살상 아래에 서툰 글씨로 음각 명문을 새겼는데, 이 종의 내력과 “癸巳十月”이라는 말이 있다. 계사년은 고려 고종 20년(1233)으로 보고 있다. 몽골의 침입과 전란을 겪게되는 貞祐연간(1213~1216) 이부부터 13C 후반까지 연호 사용이 어려웠기 때문인지 탑산사동종처럼 명문에 간지만 사용한 경우가 많다.
높이 79cm, 입지름 43cm이다. 고려 고종 9년(1222)에 만든 내소사 貞佑10년명범종(보물 제277호)과 양식적으로 유사하지만 그보다 훨씬 도식화되어있다. 시대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용뉴는 매우 사실적이며 정교하게 처리하였다. 용두는 매우 박력있는 모습이다. 용은 입을 크게 벌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앞으로 뻗은 왼발은 여의주를 잡고 있다.
음통은 상 ․ 중 ․ 하 3단으로 구분하고 각 단마다 당초문으로 장식하였으며, 2개의 화염무늬가 음통을 감싸고 있다.
상대 위로는 5각형 연잎으로 장식된 입상화문대가 높게 돌출되어 섬세하게 처리된 蓮瓣을 촘촘히 세워 입상 화문대를 만들었다.
상 ․ 하대와 연곽에는 모란당초무늬를 양각하였다. 네 개의 연곽 안에는 날카롭게 처리된 重葉六瓣의 연화좌 위에 낮게 돌출된 9개의 연꽃봉오리에 자방이 들어있다.
종신에는 당좌 4개와 보살상 4구를 교대로 배치하였다. 연곽 아래마다 배치된 네 개의 당좌는 하대 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이중 원의 국화형 자방 바깥으로 8엽의 연판과 그 외곽을 連珠文 띠로 원권을 둘렀다. 이런 것은 13C 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는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구름 위에 앉아있는 보살상을 네 면에 동일하게 새겼다.
卍 천관사 - 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신라 진흥왕 때(540~576) 通靈이 普賢寺와 탑산사, 옥룡사 등의 89암자와 함께 창건하여 천관보살을 모셨다고 하여 이름을 천관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 땅이었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통령은 애장왕 때 사람으로 생각된다.
바닷가에 위치했기 때문에 신라 말 이후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아 그 규모가 점차 작아졌다. 지금은 극락보전과 칠성각, 요사채, 석탑2기, 석등 1기만 남아있다.
천관산 천관사에는 김유신이 소년 시절 사랑했던 여인 천관녀와 관계지운 설화가 있다.
김유신은 소년 시절 어머니 만명부인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는데,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서 유숙했다. 이에 어머니가 “네가 자라 공명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를 평화롭게 하기를 밤낮으로 바랐는데, 이제 천한 아이들과 술집에서 놀아난단 말이냐.”하고 흐느껴 울면서 훈계했다. 김유신은 다시는 그집 문앞을 지나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날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또다시 그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왔다. 그리고 오로지 무예를 닦아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여기까지는 모두 알고있는 이야기이다. 천관의 전설은 장흥 천관사로 이어진다.
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천관녀는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숨어 살면서 김유신이 성공하기를 빌었다. 삼국을 통일한 뒤 서라벌로 돌아가던 김유신은 이 소문을 듣고 천관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함께 서라벌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자 천관은 자기는 천관보살의 화신이며 김유신이 큰일을 할 사람임을 알고 기생이 되어 그 마음을 시험했으나 이제는 자기의 일도 끝났고 두 사람의 인연도 끝났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김유신이 듣지 않고 계속 같이 가기를 청하자 천관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백마가 내려와 천관을 태우고 사라졌다. 김유신은 말을 몰아 그 뒤를 쫓았는데, 장흥 천관산에 와서 천관을 놓치고 말았다. 이래서 천관산에는 천관보살이 산다는 것이다.
극락보전은 천관보살을 모시고 있다. 건축 양식이 간결하여 고려시대의 소박한 간결미가 남아있다.
삼층석탑(보물 제795호)은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땅 속에 묻혀있고, 중대석은 일부 손상되었다.
석등(전라남도 유형문화재134호)은 고려 말기에 제작된 것이다.
그리고 오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135호)이 있다.
금수굴
불영봉
탑산사 癸巳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