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학산 법광사
비학산 법광사터
1. 法廣寺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비학산에 있었다.
2. 법광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법광사터에 있는<석가불사리탑비>에 비교적 소상이 적혀있다.
<석가불사리탑비>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579~632) 원효(617~686)가 왕명으로 창건하였다.
진흥왕 10년(549) 梁나라 武帝(464~549)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처님의 사리를 보내오자 진흥왕이 궁에 맞아들였고, 그뒤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이 원효에게 명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여 원당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원효는 32세 때인 진덕왕 2년(648)에 출가했기 때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대웅전과 2층 금당, 香火殿 등 525칸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었다 한다.
3. 그 뒤 차츰 퇴락해 가다가 조선 영조 23년(1747) 비구니 明玉 등이 오층석탑을 중수하려고 헐었는데,
맨 아래층에 옥으로 만든 함 속에 석가모니 사리 22과가 들어있었다.
다시 銅으로 함을 만들어 탑 2층에 봉안했다. 그해 가을 탑 앞에 법당을 짓고 금강계단이라 했다.
따로 향로전을 지어 예불하는 곳으로 삼았다.
4. 그러다가 수십 년 후 모두 불타 폐사되었다.
5. 고종 13년(1876) 圭敏이 중창하기 시작하여 1886년까지 원통전을 비롯해 得水堂, 산령각, 독성각 등을 차례로 중수하였다.
고종 24년(1887)에는 5층 중 3층만 남아있던 탑을 중수하였다. 이때 영조 26년(1705)에 쓴 사리탑중수기가 발견되었다.
그 뒤 다시 화재로 불타고 거의 폐허가 되었다.
5. 현재의 법광사는 절터 아래쪽에 있는데, 20C 들어서 새로 지은 절이다. 본디의 법광사와는 관계없다.
현존 유물로는 석탑, 불상대좌, 쌍귀부, 배례석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여러 주춧돌이 남아있다.
법광사터 쌍귀부
■ 당간지주는 절터로 올라가는 막바지 왼편 논 가운데 있다.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있고 윗부분만 160cm쯤 드러나 있다.
지주의 머리는 2단으로 호를 이루었으며 그 안쪽에 네모난 간구를 마련하였다. 바깥면은 위로부터 90cm 지점에서부터 안쪽을 살짝 깎아 잘록하게 만들었다.
안쪽 면을 제외한 3면에는 세로 줄무늬로 장식하였다.
지주 가장자리를 따라 6cm 너비로 도드라지게 모를 접어 띠처럼 둘렀다.
바깥면에는 중심선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솟아오른 줄무늬 하나를 길게 새겼다.
■ 쌍귀부는 절터 뒤쪽 언덕 위 밭 가운데 있다. 두 마리 거북이 옆구리를 붙이고 나란히 엎드려 있다. 비신과 비머리는 없어졌다.
귀부도 머리를 포함하여 몸 전체가 많이 깨졌다. 등에 새긴 거북 무늬도 희미하다.
비신의 높이는 알 수 없으나 폭은 대략 86cm두께는 19cm쯤 된다.
쌍귀부는 경주의 창림사터와 무장사터에서도 볼 수 있다. 쌍귀부가 있는 절들은 모두 신라 왕실과 관계있는 절이다.
■ 금당터는 넓은 밭 한가운데 있다. 한변의 길이가 약 20m, 높이 1m쯤 되는 네모난 흙단으로 되어있다.「석가불사리탑비」에 따르면 18C 중반까지 대웅전 말고 따로 2층 금당이 있었다고 한다.
주춧돌은 사방을 돌아가며 안쪽과 바깥쪽으로 두 줄, 불상대좌 주위로 4개가 남아있다. 안두리는 주춧돌의 배열로 보아 정면, 측면 3칸이었을 것이다. 주춧돌, 고막이돌, 신방석이 모두 남아있다. 앞면과 뒷면의 가운데 신방석이 있어 이곳에 문 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주춧돌과 주춧돌을 연결하는 고막이돌이 4면에 둘러져 있어 안두리에도 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깥두리는 정면, 측면 5칸으로 주춧돌과 고막이돌이 북쪽과 남쪽에 대부분 남아있다. 남북 가운데 칸에 신방석이 남아있어 이곳에 출입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뒤 양면에도 문이 있었겠지만 신방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바깥두리 사방 벽에는 벽체가 있었을 것이다.
금당은 사방으로 계단이 있는 높직한 기단 위에 4면에 출입문이 있는 정면, 측면 5칸의 2층 건물이었을 것이다. 계단 문을 들어가면 바깥벽과 안벽 사이 통로, 곧 회랑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는 녹색 유약이 발린 네모난 綠油塼이 깔려있었다. 이 점은 금당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전돌로 알 수 있다. 그 통로를 따라 탑돌이 하듯 세 바퀴 돈 다음 다시 문을 열고 높은 돌 대좌에 앉은 붓다를 참배할 수 있었다. 2층까지 트인 이 공간에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녹유전들이 반사되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 불상대좌는 하대석과 중대석은 온전하나 상대석은 모서리가 깨진 채 옆에 뒤집혀 놓여있다.
하대석은 지름 2.42m, 둘레 7.3m의 원형으로 동서로 두 개의 돌을 맞추어 만들었다.
바닥에서 10cm쯤 올라와서 안으로 조금 들어가게 돌을 파내고 돌아가며 안상 16개를 새기고, 그 위에 안상과 어긋나게 16잎의 복련을 조각했다. 다시 그 위에는 중대석을 받치는 3단의 굄을 두었다. 3단의 굄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잎이 8장인 커다란 연꽃이다. 굄 뒤쪽은 너비 40cm로 평평하게 패인 곳이 있는데, 광배를 세웠던 흔적으로 보인다.
중대석은 지름 120cm, 높이 55cm의 원통형 돌이다. 모서리마다 8개의 버팀기둥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이 대좌 위에 거대한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다.
불상 대좌 주위로 주춧돌 4개가 있다. 이것은 고주를 세웠던 자리이다.
고주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있었던 건물이 2층으로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뒤쪽의 2개 사이에는 고막이돌이 남아있어 불상 뒤에도 후불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법광사석탑은 지금의 법광사 뒤편 언덕에 있다. 삼층석탑이 분명하지만 후대에 보수하면서 3층 이상의 부재를 새로 만들어 올려 기형적인 4층탑이 되었다. 탑 뒤에 있는<석가불사리탑비>에 “예전 법광사에는 오층석탑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이 비문에 따라 현재의 법광사를 창건한 사람이 오층석탑으로 복원한다는 것이 상층기단을 탑의 제1층이라 생각한 까닭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오층석탑은 처음부터 없었다. 사라탑비의 기록에 따르면 1747년 법광사에서 오층석탑을 중수한 적이 있다. 그때 탑을 해체했는데, 가장 아래층에 둥근 玉函이 있었으며 그 안에 뚜껑이 있는 銀盒이 들어있었다. 은합 안에 “釋迦佛舍利”라 쓴 玉牌, 법광사를 창건한 스님 이름과 舍利分布記가 각각 적힌 종이 두 장과 솜과 비단에 싸인 녹두빛 사리 22알이 담겨있었다. 탑을 중수하면서 구리함을 다시 만들어 이 모든 유물과 중수한 기록을 새긴 옥패를 그 안에 넣어 탑의 2층에 안치하였다.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을 명옥이라는 비구니였다.
그런데, 1968년 현재의 탑이 도굴되었다. 도굴된 뒤 탑 속에서 법광사석탑기라는 제목이 붙은 塔誌石 2개를 수습하였다. 탑지석 하나에 828년 香照 · 圓寂 두 스님이 재물을 시주하여 탑을 세웠으며 당시 신도로 成德대왕이 있었다는 사실과,
846년 탑을 옮겨 보수하면서 그 안에 사리 22알을 넣었다고 새겨져 있다.
다른 하나의 탑지에는 1747년 명옥 ․ 담합 두 스님이 탑을 중수하였다고 쓰여있다. 또 1698년에도 탑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탑지석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사리탑비에서 말하는 오층석탑은 지금 사층이 된 삼층석탑이 분명하다. 1747년 탑을 중수할 때 당시 스님들이 석탑의 상하층 기단이나 노반까지를 탑의 층수로 계산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탑지에 법광사 신도라는 成德대왕은 제33대 聖德왕(702~737)이 아니다. 김균정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그의 아들 우징이 제45대 신무왕(838~839)이 되었다. 신무왕이 그의 아버지에게 성덕대왕이라 추증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로 보아 법광사는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탑은 이중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상하층 기단 면석에 버팀기둥이 하나씩, 지붕돌에 5단의 층급받침이 있다. 삼층 지붕돌은 탑 옆에 엎어져 있다.
탑 앞에는 둥근 갈돌이 지대석을 받침돌 삼아 놓여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문지르면서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 석가불사리탑비는 사층석탑 뒤에 있다. 지붕돌, 비신,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대좌는 네모난 돌 두 장을 합쳐 만들었는데, 무슨 사연인지 가운데 비신을 세웠던 자리는 비어있고, 여기서 조금 뒤쪽으로 다시 비좌를 만들고 비를 세웠다.
비신은 높이 117cm, 너비 48~51cm, 두께 18cm로 아랫부분보다 윗부분이 조금 넓다.
지붕돌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분명하지 않으나 타원형을 가로로 자른 형태이다. 양쪽 끝 아래쪽에 국화꽃 무늬를 새기고 그 사이에 붕어인지 잉어인지 분명하지 않은 물고기가 한 마리씩 새겨져 있다. 잉어가 용문에 오르지 못해 용이 되지 못한 것인지 과거 비머리의 용과는 다르다.
비문의 끄트머리에 “乾隆 15년(1750)에 비를 세웠으며 申維翰이라는 사람이 글을 지었다.”고 하였다.
■ 배례석은 현재의 법광사의 마당, 새로 만든 탑 앞에 있다. 지대석과 대석이 각각 다른 돌이다.
지대석은 가로 174cm, 세로 93cm이다. 앞면에 1개 뒷면에 2개 모두 3개의 돌로 짜맞추고 윗면 가장자리에 차츰 줄여가며 3단의 굄대를 만들었다.
대석은 통돌로 다듬었는데, 가로 152cm, 세로 75cm, 높이 25cm이다. 앞면과 뒷면에 똑같이 3개씩, 양쪽 옆면에 2개씩 안상을 새겼다. 윗면에는 지름 37cm의 연꽃을 돋을새김하였다. 연꽃무늬는 가운데 있지 않고 앞쪽으로 많이 당겨져 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연꽃무늬는 신라 와당에서 보는 연꽃과 흡사하다.
■ 崇安殿은 절터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켜선 뒤쪽에 있다.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재위)은 이름은 白淨(석가의 아버지 이름)이다.
진평은 시호이다.
이 무렵 신라 왕가의 족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24대 진흥왕(540~576 재위)의 아버지는 입종갈문왕, 어머니는 只召부인이다. 입종갈문왕은 천전리 각석 명문에도 나타나는 사람이다. 지소부인은 제23대 법흥왕(514~540 재위)과 보도부인 박씨의 따님이다.
② 진흥왕은 사도부인 박씨와 銅輪을, 지도부인 사이에서 舍輪(또는 金輪)을 낳는다.
③ 舍輪(또는 金輪)은 제25대 眞智王(576~579)이 된다. 진지왕은<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조에 따르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지고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 기록처럼 그렇게 나쁜 왕은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개혁을 하려하자 화백들과 갈등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④ 그래서 왕통은 동륜 쪽으로 넘어간다.
동륜과 입종갈문왕의 따님 萬戶夫人 사이에서 白淨, 진정갈문왕 白飯, 진안갈문왕 國飯(또는 國分)이 태어난다.
진평왕의 동생 白飯과 國飯이란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정반왕의 동생 白飯과 斛飯(Droṇodanarāja)에서 각각 따왔을 것이다.
⑤ 백정이 제26대 진평왕(579~632)이 된다.
아버지는 제24대 진흥왕(540~576)의 태자인 銅輪, 어머니는 萬戶부인으로 立宗葛文王의 딸이다.
⑥ 진평왕의 첫째 비는 麻倻夫人(석가의 어머니),
둘째 비는 勝鬘부인(석가 당시 사위국 파사익왕의 딸로<승만경>을 설한 승만부인)이다.
진평왕은 마야부인과 德曼과 天明夫人을 낳는다. 덕만이 제27대 善德女王(632~647)이 된다.
⑦ 동륜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동생인 진안갈문왕 국반은 월명부인 박씨와 勝曼을 낳는다.
승만은 제28대 眞德女王(647~654)이다. 그러니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사촌간이다.
⑧ 진지왕 舍輪은 기오공의 따님 知道夫人과 龍春(文興大王)을 낳는다.
용춘은 진평왕 따님 천명부인과 春秋를 낳는데, 그가 제29대 太宗武烈王(654~661)이다.
그러니까 선덕왕과 김춘추는 외가로는 이모, 친가로는 6촌 남매 사이이다.
⑨ 태종무열왕은 舒炫(김유신의 아버지)의 따님 文明王后 문희와 法敏을 낳는데 이이가 제30대 文武王(661~681)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매부 사이이고, 문무왕은 김유신의 생질이다.
문무왕은 자의왕후와 제31대 神文王(681~692) 政明을 낳는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따님 김씨부인과 제32대 孝昭王(692~702)을 낳고,
효소왕의 동생이 제33대 聖德王(702~737)이 된다.
가야의 마지막 왕 金仇亥 곧 仇衡王의 아드님은 武力이고 또 그 아드님이 舒玄이다.
서현은 진흥왕의 형제인 熟訖宗의 따님인 萬明夫人과 결혼하여 김유신, 문명왕후, 보희를 낳는다.
※ 「화랑세기」에 기록된 선덕 · 龍樹 · 龍春
이것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와 관련된다.<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용수와 용춘은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나<화랑세기>에는 용수가 형이고 용춘이 동생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 제권4, 진평왕 44년 조에
“2월에 이찬 용수를 內省의 私臣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제권4, 진평왕 51년 조에는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 ․ 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니…….”,
제권5, 선덕왕 5년 조에 “10월에 이찬 水品과 용수(또는 용춘)를 보내 주와 현을 돌아다니며 위무하게 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1, 왕력 10 조에 “제27대 선덕여왕 이름은 덕만이다.
아버지는 진평왕, 어머니는 摩耶夫人 김씨다. 성골의 남자가 끊어졌으므로 여왕이 즉위했다.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고 하였다.
권1, 태종춘추공 조에 “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春秋요, 성은 김씨이고 용수(혹은 용춘이라고 함) 角干을 추봉한 문흥대왕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天明夫人이다”고 하였다.
이처럼<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용수와 용춘은 이름은 다르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화랑세기>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
13세 풍월주 용춘은 진지왕의 아들로 용수의 동생이다.
용춘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돼 幽宮에 3년간 살다가 죽었는데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잘 몰랐다. 용춘의 어머니인 지도태후가 진평왕(그녀에겐 아주버니의 아들이므로 장조카)을 섬기자 용춘은 진평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당시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사촌동생인 용수를 사위로 삼으려고 했다.
용수가 사양했으나 진평왕의 비인 마야부인이 허락하지 않고 끝내 사위로 삼으니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딸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이다.
또 선덕공주가 자라면서 임금의 자질을 갖추자 진평왕은 그녀로 왕위를 이으려고 용춘을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후사가 없자 용춘이 물러났다. 이에 진평왕은 용수에게 또 선덕공주를 모시도록 했으나 역시 후사가 없었다.
그 무렵 마야부인은 죽고, 僧滿皇后가 진평왕의 비가 돼 아들을 낳아 선덕을 대신해 왕위를 잇고자 했으나, 그 아들이 일찍 죽어버렸다.
그런 연유로 승만황후가 용춘형제를 미워하자 용춘은 전장에 나가버렸다. 그는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운 후 승진하여 각간(신라 17관등의 1위)에 봉해졌다.
한편 선덕공주가 왕위에 오르기 전 용수가 임종에 이르러 부인과 아들을 동생인 용춘에게 맡겼다.
그 아들이 바로 김춘추이고 부인은 천명공주였다.
선덕공주는 왕이 되자 공주때 남편이었던 용춘을 다시 남편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용춘이 스스로 물러났다. 이에 군신들이 삼서제(사위를 3명 두는 제도)를 만들어 흠반공과 을제공으로 하여금 선덕여왕을 모시도록 했다.
용춘은 선덕여왕의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나 형수인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태종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고 진덕여왕 원년(647)에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화랑세기>의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 공주로 있을 때 첫번째 남편이 용춘이고 두번째 남편이 그의 형인 용수였으며, 또 선덕공주가 왕으로 즉위한 후 다시 용춘을 남편으로 삼은 것이다.
당시 왕실에선 이미 성골 남자가 없었기에 진평왕으로서는 용수나 용춘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아들이 29대왕인 김춘추였다.
또 중혼제, 형사취수제 같은 유습이 신라 중기까지 남아있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삼국유사> 권1 왕력 10 조에 선덕여왕의 배필은 飮葛文王이라는 기록이 있다.
노태돈교수는 “갈문왕은 여왕의 남편이나 왕의 아버지에게 주는 尊號”로 보았다. 일본역사학자 히로나카 요시오[弘中芳男] 씨는 199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용수와 용춘은 형제지간이었으며 용춘이 문흥갈문왕이고,
용수는 음갈문왕이다.”고 했다. 역사학자 이종욱과 이강래도 용수와 용춘을 형제지간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산외대 권덕영교수는 “황룡사 9층목탑 찰주본기에 용수가 선덕왕 14년에도 살아있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 죽었다고 하는 것은<화랑세기>에 문제가 있으며 용수와 용춘을 형제라 한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632년에 즉위한다.
이때 김춘추는 30세였다, 김춘추는 603년 출생이므로 여왕의 즉위는 5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에는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갈문왕 "飮"이라 하였다. 음이 누군지는 알 수 없고, 飮과 같은 듯으로 쓰인 ‘飯’은 둘이 있다. 伯飯, 國飯이다. 백반은 진덕의 아버지이고, 선덕의 삼촌이다. 이 기록이 옳다면 삼촌인 백반이 곧 남편이다.
선덕에 대해서는 寬仁明敏하다고 했다.
여왕을 聖祖皇姑라 했고, 聖骨男盡이라 했다. 여자가 왕이 되는 데는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에서는 40년 전에 이미 스이꼬 천왕이 여성으로 천왕이 되었다. 신라에는 사위가 왕이 된 예는 5, 통일신라에는 3명이 있다.
※ 비담의 난(647년) - 명활산성(명활산성은 4.5km. 자비왕 때 궁궐로 사용)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비담은 상대등(총리)이었다. 상대등은 왕위 계승자가 없을 때 왕위에 오를 수 있다.
당시 백성들은 여왕에 대해 반감이 없었다.
당태종의 말과, 여왕 말기 반월성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빌미로 비담이 난을 일으켰다.
이에 처음으로 연이 등장한다. 김유신이 연에 불을 붙여 날림으로써 별이 하늘로 되돌아 간 것이다. 경산 압량 김유신의 군대(최정예 부대)가 지원함으로써 난은 정복되지만 이 때 여왕은 죽는다. 압량은 백제 국경지대로 최전방이다.
반란군을 진압되고 진덕이 왕위에 오른다.
이는 선덕이 진덕을 후계자로 지목했을 가능성이 많다.
진덕파의 승리는 여왕을 지지하는 신흥 귀족이 전통 귀족에 승리한 것이다. 이 신흥 귀족이 삼국통일을 이룬다.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진골 귀족의 반발로 쫓겨났다.
가야계인 김유신은 보수 진골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이 둘은 진골귀족을 제압하기 위하여 의기투합했다.
제23대 법흥왕(514~540) 14년(527)에 불교가 공인되어 진흥왕대에 이르면 신라 불교는 신라적인 불교로서 특징을 갖추어 가게 된다.
신라 중고사회(법흥왕~진덕왕 대) 시작과 더불어 왕족의 이름에 석가 가족의 이름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중고시대를 불교왕명시대 또는 眞種(刹利種) 시대라 한다.
국왕은 스스로를 석가에 비유하였다.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석가의 가족들에 비유되었다. 이런 관계로 해서 신라 왕족들의 이름에 석가 가족들의 이름이 많이 붙여지고 있다.
심지어 신라 왕족은 석가와 한가지로 크샤트리아의 신분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불교 토착화 과정에 나타나는 것으로 신라는 석가 재세시의 불국토에 비견하고 정법으로 정치한다는 이념을 나타낸 것이다.
중국 북방불교에 있어서 중국은 붓다가 태어난 인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無緣의 땅이라는 절망감에서 王卽佛사상이 나타나는데 신라의 경우도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轉輪聖王이란<미륵하생경>,<성불경>에 따르면 미륵이 하생할 당시 국토의 왕이다.
이 왕은 輪寶를 얻어 이 보륜을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하게 하였다. 보륜에는 금륜 · 동륜 · 은륜 · 철륜이 있어 四州를 통치한다.
진흥왕의 왕자 이름을 금륜, 동륜이라 한 것은 미륵사상에 입각한 전륜성왕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진흥왕이란 이름은 스스로 전륜성왕의 입장에서 불교를 진흥한다는 뜻이며 왕자들 또한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라 땅에 미륵이 하생하여 미륵국토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진흥왕이 전국토의 중요한 곳을 순수하고 남긴 진흥왕 순수비에 잘 나타나 있다.
화랑과 낭도의 우두머리 국선은 화랑의 최고 상수화랑이었으며, 국왕이 받드는 국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국선은 신라의 미륵불 또는 아기부처로 받들어졌다.
진흥왕 때 정비된 화랑제도는 단순한 청소년 전사집단이 아니라 미륵사상에 입각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함에 필요한 국가사회적 요원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화엄사상이 지배이념으로 등장하면서 불국토사상이 크게 성행한다.
신라는 과거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는 땅으로 번영을 누렸던 땅으로 불교는 결코 외래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재래 토속신앙 등 전통사상을 통섭하게 된다.
※ 진평왕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평왕>조 나타난 기록 중 중요한 것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진평왕은 579년 즉위하였다. 이름은 白淨으로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 동륜,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으로 葛文王 立宗의 딸이다. 비는 김씨 摩耶夫人으로 葛文王 福勝의 딸이다. 왕은 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를 가졌고, 신체가 장대하며 의지와 식견이 심원하고 명석하였다.
왕 원년 8월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고 母弟 伯飯을 봉하여 진정갈문왕, 國飯을 진안갈문왕으로 삼았다.
왕 6년(584) 2월 연호를 建福이라 고쳤다.
왕 7년(585) 3월에 한재가 들므로 왕은 正殿을 피하여 있으면서 식사를 감하고 南堂(정청)에 출어하여 친히 죄수를 보살폈다. 7월에 고승 智明이 陳나라로 들어가서 불법을 구하였다.
왕 11년(589) 3월 원광법사가 진나라로 가 불법을 구하였다. 7월에 나라의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나 민가 3만 3백 6십 호가 수몰되고 200여 명이 죽으므로 왕은 사신을 보내 수재민을 구제하였다.
왕 13년(591) 7월에 남산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주위가 2천 8백 5십 4步였다.
왕 15년(593) 7월에 명활성을 개축하였는데, 그 주위가 3천 보였고, 서형산성은 주위가 2천 보였다.
왕 16년(594) 수나라 황제가 조서를 보내 왕을 上開府樂浪君公新羅王으로 삼았다.
왕 18년(596) 고승 曇育이 수나라로 들어가서 불법을 구하였다. 왕은 사신을 수나라로 보내 방물을 바쳤다. 10월에는 永興寺에 불이 나 3백5십 호가 불타 왕은 친히 이재민을 위로하고 이를 구제하였다.
왕 19년 三郞寺가 이룩되었다.
왕 22년(600) 고승 원광이 朝聘使 柰麻 諸文과 大舍 橫川을 따라 환국하였다.
왕 24년 大柰麻 상군을 사신으로 수나라에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8월에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운봉)에 쳐들어오므로 왕은 군사를 내보내 이를 공격하여 크게 파하였으나 貴山, 箒項 등이 전사했다.
9월에 고승 智明이 수나라에 들어갔던 사신 上軍을 따라 환국했다. 왕은 지명의 戒行을 존경하여 大德으로 삼았다.
왕 25년(603)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므로 왕은 친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 이를 막았다.
왕 26년 7월 남천주(이천)를 폐하고 북한산주(광주)를 설치하였다.
왕 27년 고승 담육이 수나라에 들어갔던 사신 惠文과 함께 돌아왔다. 8월에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왕 30년(608) 왕은 고구려가 번번이 강토를 침범하는 것을 근심하여 수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원광에게 乞師表를 지어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원광은 말하기를 “자기가 살려고 하여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沙門이 할 행실이 아니옵니다. 그러나 貧徒가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水草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이 명령을 좇지 아니하오리까.” 하고 걸사표를 지어 바쳤다. 2월에 고구려가 북변으로 침입하여 인민 8천 명을 노획하고, 4월에 고구려의 군사가 우명산성(춘천?)을 쳐 빼앗았다.
왕 33년(611) 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걸사표를 바치니 수양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은 고구려의 기록에 적혀있다.
왕 35년(613) 봄에 한재가 들었다. 4월에 서리가 내렸다. 7월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가 와서 황룡사에서 百高座를 베풀고 원광 등 법사를 맞아 불경을 강론하였다.
왕 36년(614) 2월에 沙伐州(상주)를 폐하고 善州(선산)를 설치하고 一吉湌 日夫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 塑佛이 저절로 헐어지더니 얼마 후 진흥왕비 비구니가 돌아가셨다.
왕 47년(625) 11월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조공하고, 고구려가 당나라에 통하는 길목을 막기 때문에 입조하지 못하고 또 번번이 침입한다고 호소하였다.
왕 48년 7월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조공하니 당고조는 주자사를 파견하여 고구려와 서로 화친하라고 타일렀다.
왕 49년(627) 3월에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5일간이나 왔다. 6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7월에 백제의 장군 사걸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서쪽 변방의 2성을 빼앗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상했다.
왕50년(628) 여름에 큰 한재가 들어 시장을 옮기고 龍을 그려 놓고 기우제를 지냈다. 가을과 겨울에는 백성들이 기근이 심하여 자녀를 팔았다.
왕51년(629) 8월 대장군 용춘 · 舒玄(김유신의 아버지)과 부장군 庾信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낭비성(청주)을 침범하였다. 5천 명을 참살하고 성을 함락하였다.
왕53년 2월에 흰 개가 궁궐의 마당 담장 위에 올라갔다. 5월에 이찬 柒宿이 아찬 석품과 더불어 모반하였다. 왕에게 발각되어 칠숙을 잡아 東市에서 참형하고, 그의 구족을 없애버렸다.
왕54년(632) 정월에 왕이 돌아가므로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漢只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제1권, 기이, 天賜玉帶>조에,
淸秦 4년 丁酉(937) 5월에 정승 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를 하나 바쳤다. 길이는 10圍(일위는 한아름)요 鐫銬(전고, 허리띠 장식)가 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 天賜帶라 한다. 고려 태조는 이것을 받아 내고에 간직했다.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다. 성은 김씨다. 大建 1년 己亥(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內帝釋宮(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 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상제께서 내게 명하여 이 玉帶를 전하라 하셨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꿇어앉아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郊社(郊는 동지에 하늘에 지내는 제사, 社는 하지에 땅에 지내는 제사)나 종묘의 큰 제사 때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 후에 고려왕이 신라를 치려하여 “신라에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하지 못한다 하니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좌우가 “황룡사 장육존상이 그 첫째요, 구층탑이 그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그 셋째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贊하여 말하였다. “구름 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는 임금의 곤룡포에 알맞게 둘려있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
법광사터 사진
세존사리탑
법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