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터
영암사터(사적 제131호)는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黃梅山(1,108m) 기슭에 있다.
靈岩寺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寂然國師慈光之塔碑銘>(비석은 없고 탁본만 서울대학교 도서관 전한다)에 “왕은 스님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물러나 조용히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영을 내려 高麗國 嘉壽縣(삼가현의 옛 이름) 靈巖寺에 머물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寂然國師 英俊(932~1014)은 고려 현종 5년에 84세로 영암사에서 입적했다.
<梵宇攷>(1799년 정조 23년에 편찬)에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나와있고, <三嘉縣邑誌>에는 영암사 자리에 寶巖寺가 있다고 하였다. 이밖에 다른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이 기록들과 절터에서 수습된 유물로 보아 영암사는 통일신라시대 말기 이 지방 호족의 발원으로 창건된 선종 사찰로 추정된다. 지금 영암사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480호), 쌍사자석등(보물 353호), 비석을 잃어버린 돌거북받침(보물 489호) 등 세 개의 보물은 모두 9세기 하대 신라를 대표하는 작품들이어서 통일신라시대, 고려 때는 나라의 국사가 주석할 정도로 국가가 지원하는 대규모 절이었을 것이다.
경복궁에 회랑이 있는 것처럼 왕조시대 회랑은 곧 왕권의 상징이다.
회랑이 있거나 있었던 절, 예를들어 불국사, 황룡사, 미륵사 등은 왕실과 깊은 관계가 있거나 국가적인 중요한 절이었다. 영암사에도 회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황룡사나 불국사와 맞먹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절이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조선 초 폐불 정책으로 폐사되고 만 것 같다.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는 이곳이 영암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적인선사자광지탑비명>의 기록으로 인하여 절 이름이 확인되었다.
또 주민들은 1933년 일본인들이 쌍사자석등을 몰래 가져가려던 것을 막았다.
면사무소에 두었던 석등을 1957년에 찾아와 원래의 자리에 세웠다.
무너져 방치되었던 삼층석탑도 바로 세우고, 흙 속에 묻혀있던 금당터도 땅 위로 드러나게 하였다. 1968년 삼가현의 가회중학교 교장 허언 등 유지들이 옛터에 因法堂을 짓고 옛 이름을 이었다.
1984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중문터, 회랑터, 회랑에 이어진 건물터, 금당 서쪽의 건물터 등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또 금동여래입상,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각종 와당들, 불상의 대좌, 石槽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이때 발굴조사를 끝내고 정리한 모습이다.
영암사는 황매산 깊은 골, 모산재라는 화강암 골산을 배산으로 하고 높직이 올라 앉아있다.
그래서 이 절의 이름도 불교 용어를 택하지 않고 신령스러운 바위산을 이끌어 영암사라 하였을 것이다.
영암사의 가람배치는 황매산을 등에 지고 동서 일직선상의 3단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개의 석축
1. 중문터에서 회랑터로 이어지는 석축은 절터의 동남쪽 모퉁이에 일부가 남아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복원하였다.
높은 곳은 다듬은 돌로 11단이 되도록 가지런히 쌓았다. 다섯째 단과 아홉째 단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대못 모양의 팔뚝돌을 박았다. 이는 석굴암 본존불 머리 위의 무지개천장에 박힌 주먹돌처럼 안으로는 구조적인 튼실함과, 밖으로는 아름다운 무늬의 구실도 한다.
2. 금당터 앞의 석축은 남북으로 길게 쌓으면서 그 한가운데를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내쌓은 雉처럼 앞으로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이렇게 축대를 내쌓은 까닭은 석등을 위한 배려이다. 그 위에 놓인 쌍사자석등은 금당 마당 전체를 넓히지 않고 금당과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드라지게 보인다.
축대 양 옆으로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통돌을 밖으로 휘어지게 깎아 여섯 단으로 디딤돌을 파낸 무지개다리이다. 다리는 2단으로 턱을 지운 받침돌 위에 걸려있다. 사인(sine) 12도의 곡선이다.
3. 나지막한 석축이 금당터 옆과 뒤를 에워싸고 있다.
* 삼층석탑(보물 제480호)은 금당보다 한단 낮은 마당에 서있다.
이중기단에 삼층몸돌, 상륜부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으로 높이는 3.8m이다.
하층기단은 네 개의 돌을 짜맞추었다. 지대석, 중대석, 덮개돌[甲石]을 하나의 돌에 새겼다. 버팀기둥[撐柱]은 면마다 하나씩 도드라지게 새겼다.
상층기단은 모서리기둥[隅柱]과 버팀기둥이 하나씩 새겨진 네개의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두장으로 된 덮개돌을 덮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몸돌에는 면마다 두개의 모서리기둥을 새겼다. 지붕돌의 처마받침은 4단이다.
이 탑의 재료인 화강암은 엷은 분홍색 띠고 있어 깨끗하고 깔끔하게 보인다.
* 금당터는 쌍사지석등 뒤에 있는 건물터인데 동향이다.
기단과 사방의 계단, 주춧돌들이 남아있다.
기단은 지대석을 놓고 그 위로 퇴물림하여 커다란 안상을 새긴 면석을 올린 다음 다시 덮개돌을 면석 밖으로 나오도록 덮었다.
덮개돌은 많이 없어졌다. 뒷면을 제외한 동 ․ 남 ․ 북면의 면석에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한 마리씩 사자로 보이는 동물을 새겼다.
계단은 각 면의 중앙에 있다. 뒤편을 뺀 나머지 세 계단에는 소맷돌이 남아있다.
소맷돌은 앞뒤가 맞뚫리도록 투각하였다.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난간 기둥을 등에 지고 구름 위를 나는 용을 새겼는데, 그 모습이 음관을 등에 지고 범종 꼭대기에 올라앉은 龍鈕를 닮았다. 양옆 계단에는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가릉빈가는 사람 머리에 새의 몸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난다는 상상의 새이다.
주춧돌은 군데군데 신방석과 고막이돌이 박혀있는 낮은 것과, 네모진 주춧돌만 높게 솟은 것 두 가지가 남아있다. 이것은 영암사 금당이 같은 터에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두 번 이상 금당을 지었음을 뜻한다. 처음 지은 금당의 주춧돌은 좀 더 너르며 낮은 것이고, 다시 지은 금당의 주춧돌은 좁고 높은 것들이다. 어느 것이나 정면, 측면 3칸의 정방형에 가까운 건물이다.
영암사 금당이 목탑이거나 그와 비슷한 중층의 건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방형에 가까운 건물, 네 군데의 계단, 기단과 건물터의 평면이 정방형에 가까운 점, 기둥에 내진주와 외진주가 함께 있는 점이 그 근거이다.
금당터 가운데 H자형과 네모진 틀처럼 보이는 곳이 불상 지대석이다. 지대석에는 팔부중상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 영암사터 雙獅子 石燈(보물 제353호)
화강암 통돌을 깎아 만든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다. 전형양식에서 중대석인 8각 간주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버티고 서서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변형양식이다. 다리와 다리 사이, 팔뚝과 팔뚝 사이는 돌을 뚫어 空虛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로인해 입체감과 사실성이 뚜렷하고 사방 어디에서나 쌍사자의 몸짓을 읽을 수 있다. 그 조형적 구성력은 거의 현대적인 것이다.
8각의 기대 측면에 안상을, 그 안에는 사천왕상을 새겼다.
연화하대석과 중대석인 쌍사자를 한개의 돌에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蓮瓣은 8엽단판으로 한 판 안에는 子房에 4엽문을 장식하였다. 무거운 화사석을 들고 있는 한 쌍의 사자는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버티고 서서 서로 가슴을 맞대고, 앞다리는 위를 향해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탄탄한 다리, 통통하게 살이 찐 엉덩이, 뒤로 올라붙은 복스럽고 탐스러운 꼬리 등은 사자라기보다 오히려 복실 강아지처럼 보인다. 등 뒤로 늘어선 갈기, 잘록한 허리 묘사도 충실하며 균형과 비례가 정확하다. 풍화가 심하여 섬세한 조각은 보이지 않으나 매우 뛰어난 조각이다. 일본인이 가져가려는 것을 되찾아 제 자리에 세우기까지 몇 차례 옮겨 다니는 중에 다리가 잘리는 상처를 입었다. 지급은 잘 치료해서 표가 나지 않는다.
상대석은 8각 하대석과 같은 연판 조각, 윗면에는 화사석 받침이 있다. 8각의 화사석에는 사면에 화창이 있고 다른 면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8각의 지붕돌 밑면에는 1단의 넓은 받침을 새겼으며 전각에 귀꽃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런 양식으로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이 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작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높이는 2.31m이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탑 앞에 선다. 그러나 이 쌍사자석등은 탑과 나란히 섰을 때 왜소해 보일 수 있는 점을 고려하여 탑보다 한단 높은 곳에 세워야 했을 것이다. 그를 위해 금당 앞 석축을 내쌓았을 것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절묘한 석축 때문에 더욱 제 빛을 발하고 있다. 금당의 석축을 쌓으면서 석등이 앉을 자리를 凸형으로 돌출시켜 아래쪽에서 보면 이 쌍사자석등은 높이 3m가 넘는 석축 위에서 마치 황매산 연봉들을 호령하는 대장 혹은 교향악단의 지휘자 같은 당당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쌍사자석등은 영암사의 압권이다.
※ 사자 두 마리
사자는 지혜의 상징이다. 반야의 지혜를 대변하는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 부처님의 설법을 獅子吼라 한다. 사자가 포효하면 모든 동물이 다 굴복하듯이 부처님의 설법이 모든 중생의 번뇌를 제압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이것은 절의 금강문을 지키는 금강역사 가운데 하나는 입을 벌려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다른 하나는 ‘훔’ 하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과 같다. 입을 벌린 것은 창조와 출발을, 입을 다문 것은 끝과 소멸을 나타낸다.
※ 석등
삼국시대 석등은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석등의 부재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를 통해 8각형을 기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그 형태가 완성된다. 석등의 형태는 하대석 위에 중대석(竿柱石)을 세우고 그위에 상대석을 놓아 화사석을 받치게 하고, 그위에 옥개석을 덮는다. 그 형태는 평면이 8각이다. 후대에 이르러 8각의 화사석 4면에 보살상이나 사천왕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또 지방에 따라 鼓腹形이라 하여 간주를 북이나 장구의 모양으로 조성하는 석등이 유행하였다. 이와 달리 두 마리 사자가 상대석을 떠받치는 형상의 간주를 조성하는 경우도 있다.
고려 초기의 석등은 전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예도 있으나, 각부의 조각수법이 세련되지 못하고, 전체적인 형태가 다소 둔중하다. 그러나 신라 이래의 8각형에서 벗어나 평면 4각형이 유행하고 고복형 간주를 사용하며 화사석은 4개의 기둥을 세워 사방이 트이도록 조성한 예도 있다.
조선조에는 여전히 사각형으로 평면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 석등 말고는 별로 주목할 것이 없다.
근대 이전의 석등은 네팔과 중국에 각각 2점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모두 280여점이 있는데, 90%가 불교 유물이다.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60여기 정도, 나머지 220기는 부재의 일부만 남아있다.
* 조사당터
조사당터는 동향이다. 건물터에는 허물어진 기단의 일부, 정면 양 옆으로 놓였던 돌계단의 소맷돌,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자그마한 건물을 받쳤던 네모난 주춧돌, 불상의 지대석 등이 남아있다. 건물터 양쪽으로 곧 남과 북에 각각 한기씩 거북받침이, 그리고 건물터 앞에는 하대석과 간주석만 남은 석등이 있다.
* 거북받침 두기(보물 제489호)
목을 길게 뽑아 하늘을 향한 모습은 힘차고, 여의주가 훤히 보이도록 입을 벌리고 있다. 귀에 덮인 털들은 뒤쪽으로 쏠렸고, 옆을 비튼 네발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나타낸 듯하다.
북쪽의 거북받침은 서쪽 것에 비해 여성적이다. 고개도 약간 아래로 숙이고 있다. 네 발도 얌전하며 발톱도 순하다. 반듯이 선 등줄기에는 여섯 모난 귀갑문이 선명하다. 그 위로 구름이 피어나고, 긴 꼬리를 끌며 흘러간다. 비좌의 양옆에는 지느러미가 과장된 물고기 두 마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한쪽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돌고 있고, 다른 쪽은 입을 벌려 연꽃 봉오리인 듯한 봉오리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다.
하대 신라와 고려 전기를 대표할 명품이다. 그중 하나가 적연국사 비석받침이고 또 하나는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의 것이다.
* 절터에서 서쪽으로 1.5km쯤 떨어진 산속에 상륜부와 몸돌이 없는 부도의 석재가 흩어져 있다.
적연국사의 부도로 추정하고 있다.
(2009년 4월 20일)
영암사터 전경-2003년 11월 30일
불상대좌의 팔부신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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