洛花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激情을 忍耐한
나의 사랑은 지고있다.
분분한 낙화……
訣別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成熟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호수
이형기
어쩔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럽 눈을 뜨고 밤을 세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 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가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물 /이형기
얼음 속에 갇혔다 빠져나온 물은
실눈을 뜨고 살며시 대지에 스민다.
스며선 뿔뿔이 흩어지는 물
네덜란드의 둑으로도 가고
백두산 천지로도 기어오른다.
마나과의 지진 터
그 폐허를 찾아가서는
늙은 겨울의
해진 구두 밑창을 적시는 물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줄기는 엉뚱하게
내 혈관 속으로 기어든다.
겨우내 검게 응어리진 피를 풀자는 뜻인가
그래서 나를
슬픔을 다는 저울침의 눈금처럼
파들거리게 하자는 뜻인가
쳐다보면 뿌연 하늘
하늘에도 벌써 물 한 줄기 스며들었고나!
- 시선집 <그 해 겨울의 눈>에서
빈 들에 홀로
이형기
눈비가 오려나
胡地 日暮
먼 산자락 넘어
구름은 가고
情은 萬里
靑노새 울음
胡地 日暮에
눈비 오려나
저녁 바람 분다
빈 들에 홀로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老年幻覺
이형기
자라서 늙고 싶다
나는 한 그루 樹木같이
먼 여정이 끝난 곳에
그늘을 느린 나의 추억
또 어느듯 하로 해가 저물어
그곳에 藤椅子를 내놓고 쉴 때-
눈을 감고 있으면
청춘의 자취 위에 내리는 사락눈
漂白된 비극의 粉末
―그러나 나는
겨울날 단양한 양지짝에
누워서 존다
육중한 대지에 묻힌
사랑과 미움
내 가고난 다음 천년쯤 후에
자라서 무성한 가지를 펴라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비오는 날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로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 먼 寓話는 끝났다더라.
한 色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千里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넘어 산넘어서 네가 오듯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風京에서
이형기
혼자 거닐어 외롭지 않구나
이 風京.
보람이 무너진 맑은 자리
길은 아무데나 틔어 있는 거리에
노을이 지는가
日暮를 알리는
寂莫한 洞窟같은 鐘이 우는가
이제는 옛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人生은 아
떠나서 뒤에 남는 뉘우침으로
인생은 산다.
운다는 것이
도리어 한 오리 바람으로 통하는
이 風京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그대
이형기
1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채
그냥 더워오는 우리들의 體溫을……
내 손바닥에
점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 넓은 슬픔으로 오히여
다사로운 그대.
2
저만치 適當한 距離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워질 수도 없는
이 嚴然 한 사랑의 距離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3
除夜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 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비
이형기
寂莫 江山에 비 내린다.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窓가에 조용히 머물 때
저바린 日常
으늑한 平面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 자리
타지 않는 日暮……
허잣한 내 꿈의 뒤란에
슬픔이 싹트랴,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스스로의 內部를 드려보는가
풍경은 正座하고
山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寂莫江山……
내 주변은 이렇게 저무는가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情에 못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淸明과 不安
待期와 虛無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린다.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눈오는 밤에
이형기
오랜 세월을 두고
절로 물처럼 고인 슬픔이
풀려나는 밤이다.
실로
맘 너그럽게 외로울 수 있는
이 時間
絶叫보다도
더 切實한 것이 있음을 안다.
無限한 밤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그 어느 자리에
내 등불만한 모습이 켜지고
그 우에 지금 눈이 나린다.
憧憬의 密度
사랑의 重量
絶望을 넘어선 人生이 나린다.
귀를 기울여라
스스로 울어나는 내 靈魂의
높은 울음에……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여백 > 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0) | 2009.07.27 |
---|---|
송욱의 초기 시 <薔薇>와 <관음상 앞에서> (0) | 2009.06.18 |
그리움을 노래한 시조 두 수 (0) | 2009.05.29 |
이육사의 시 〈절정〉감상 (0) | 2009.05.23 |
李陸史의 시 <喬木>, <강건너간 노래>와 <꽃> (0) | 2009.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