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이형기의 시 洛花, 호수, 물

추연욱 2009. 6. 18. 10:35

      洛花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激情을 忍耐한

나의 사랑은 지고있다.

 

분분한 낙화……

訣別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成熟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호수

이형기

 

어쩔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럽 눈을 뜨고 밤을 세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 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가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이형기

 

얼음 속에 갇혔다 빠져나온 물은

실눈을 뜨고 살며시 대지에 스민다.

스며선 뿔뿔이 흩어지는 물

네덜란드의 둑으로도 가고

백두산 천지로도 기어오른다.

마나과의 지진 터

그 폐허를 찾아가서는

늙은 겨울의

해진 구두 밑창을 적시는 물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줄기는 엉뚱하게

내 혈관 속으로 기어든다.

겨우내 검게 응어리진 피를 풀자는 뜻인가

그래서 나를

슬픔을 다는 저울침의 눈금처럼

 

파들거리게 하자는 뜻인가

쳐다보면 뿌연 하늘

하늘에도 벌써 물 한 줄기 스며들었고나!

 

- 시선집 <그 해 겨울의 눈>에서

 

 

빈 들에 홀로

 

이형기

 

눈비가 오려나

胡地 日暮

 

먼 산자락 넘어

구름은 가고

 

情은 萬里

靑노새 울음

 

胡地 日暮에

눈비 오려나

 

저녁 바람 분다

빈 들에 홀로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老年幻覺

 

이형기

 

자라서 늙고 싶다

나는 한 그루 樹木같이

 

먼 여정이 끝난 곳에

그늘을 느린 나의 추억

 

또 어느듯 하로 해가 저물어

그곳에 藤椅子를 내놓고 쉴 때-

 

눈을 감고 있으면

청춘의 자취 위에 내리는 사락눈

漂白된 비극의 粉末

 

―그러나 나는

겨울날 단양한 양지짝에

누워서 존다

 

육중한 대지에 묻힌

사랑과 미움

 

내 가고난 다음 천년쯤 후에

자라서 무성한 가지를 펴라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비오는 날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로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 먼 寓話는 끝났다더라.

 

한 色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千里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넘어 산넘어서 네가 오듯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風京에서

 

이형기

 

혼자 거닐어 외롭지 않구나

이 風京.

 

보람이 무너진 맑은 자리

길은 아무데나 틔어 있는 거리에

 

노을이 지는가

日暮를 알리는

寂莫한 洞窟같은 鐘이 우는가

 

이제는 옛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人生은 아

떠나서 뒤에 남는 뉘우침으로

인생은 산다.

 

운다는 것이

도리어 한 오리 바람으로 통하는

이 風京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그대

 

이형기

 

1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채

그냥 더워오는 우리들의 體溫……

 

내 손바닥에

점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 넓은 슬픔으로 오히여

다사로운 그대.

 

2

저만치 適當한 距離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워질 수도 없는 

이 嚴然 한 사랑의 距離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3

除夜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 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이형기

 

寂莫 江山에 비 내린다.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窓가에 조용히 머물 때

저바린 日常

으늑한 平面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 자리

타지 않는 日暮……

허잣한 내 꿈의 뒤란에

슬픔이 싹트랴,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스스로의 內部를 드려보는가

풍경은 正座하고

山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寂莫江山……

내 주변은 이렇게 저무는가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情에 못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淸明과 不安

待期와 虛無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린다.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

 

 

눈오는 밤에

 

이형기

 

오랜 세월을 두고

절로 물처럼 고인 슬픔이

풀려나는 밤이다.

 

실로

맘 너그럽게 외로울 수 있는

이 時間

絶叫보다도

더 切實한 것이 있음을 안다.

 

無限한 밤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그 어느 자리에

내 등불만한 모습이 켜지고

그 우에 지금 눈이 나린다.

 

憧憬의 密度

사랑의 重量

絶望을 넘어선 人生이 나린다.

 

귀를 기울여라

스스로 울어나는 내 靈魂의

높은 울음에……

 

 

신구문화사편, <한국전후문제시집>,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