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산행 후기

백이산 + 어계 조려 유적- 2026년 3월 26일

추연욱 2026. 3. 27. 09:35

 

백이산 + 어계 조려 유적- 2026년 3월 26일

- 경전선 군북역~ 백이산~백이산 · 숙제봉 안부~ 숙제봉~ 안부로 돌아 와~ 백이산 공룡발자국 화석 2, 1~ 도천사~명관리 지석묘 1~ 군북역~ 서산서원~ 어계고택~ 채미정~ 군북역 -

 

 

 

기차를 타고 군북역으로 가던 도중 화포천을 바라보니,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8시 15분, 경전선 군북역을 나왔다.

 

 

 

 

역 광장에 "國母陸英修女史恩功不忘碑"

 

 

"國母 陸英修(1925~ 1974)女史"라니. 아직도 이런?

사진은 찍었지만 버릴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역으로 거의 왔을 때, 기사가 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이곳에서도 말이 많다 했다. 이어,

역이 있는 이곳은 비가 오면 늘 물에 잠겼단다.

그래서 國母陸英修女史가 이 문제를 해결 해 주었단다.

내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도 그렇지.

 

 

 

 

백이산 등산로 들머리를 찾았다.

시골 역이 크고 넓어 한참 찾았다. "백이산 2.1km" 까짓거.

 

 

 

 

 

 

기분 좋은 솔밭길

 

 

 

 

 

 

 

 

 

 

 

 

 

 

 

백이산 0.8km 남은 곳에 깨끗한 정자. 9시 10분.

 

 

 

가파른 오르막.

 

 

 

백이산(368m), 10시.

 

 

 

 

 

 

 

 

 

 

 

 

 

백이산 정상과 숙제봉의 안부, 10시 15분.

 

 

 

숙제봉 오르는 길에,

 

 

 

 

 

 

뒤돌아 백이산을 바라보니.

 

 

 

 

 

 

 

 

 

 

 

 

 

 

 

 

 

 

 

 

 

 

 

 백이 · 숙제에 대하여는 사마천의 <史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이 · 숙제는 孤竹 군주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를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아버지가 죽게 되자 숙제는 형 백이에게 양보하려 했다.

그러자 백이는,

"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아버님의 명이다" 하고 끝내 국외로 달아나 버렸다.

숙제도 또한 제위에 오르기를 즐겨하지 않아 달아나 버렸으므로 中子(백이의 아우이며 숙제의 중형)를 군주로 세웠다.

 

그뒤 백이 · 숙제는 西伯昌(주의 文王)이 노인을 따뜻하게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에 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르고 보니 서백은 벌써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부왕의 木主(위패)를 받들어 武王이라 칭하고,

동쪽의 殷의 紂王을 치려고 하였다.

 

백이 ·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하려고 하니 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된 몸으로 천자를 시살하려고 하시는데 이 어찌 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무왕의 좌우 군사들이 이 두 사람을 베려고 하였으나 太公望(무왕의 軍師인 呂尙)이,

"이 사람은 義人이다." 하고 부축하여 보내게 하였다.

 

무왕은 은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니 천하의 사람들은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러나 백이 ·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周의 녹봉을 먹지 않고,

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마침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아래와 같은 노래를 지었다.

 

오늘도 저 西山(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네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폭력으로 폭력을 보답하고도 그 잘못을 모르는 무왕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 · 순 · 우의 호시절은 자취없이 사라졌구나 神農, ,  忽焉沒兮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我安適歸矣

아아 가자, 죽음의 길로 于嗟徂兮

나의 운명이 다하였구나. 命之衰矣

 

이렇게 해서 끝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사마천, <史記>, 제1 伯夷列傳. 이주훈, 유문동 譯, 배재서관, 1985.

 

 

수양산 바라보며

 

성삼문(1418~ 1456)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정 채미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 났더니

 

 

題夷齊廟

 

성삼문

 

當年叩馬敢言非 그 때 말고삐를 두드리며 감히 말리던 이 누구였든가

忠義堂堂日月輝 충의는 당당하여 해 달인양 찬란한데,

草木亦霑周雨露 초목도 주나라의 비와 이슬을 먹거늘

愧君猶食首陽薇 수양산 고사리 캐먹은 당신들이 부끄럽지 않을손가.

 

 

주려 죽으려 하고 수양산에 들었거니

현마 고사리를 먹으려 캐었으랴

물성이 굽은 줄 미워 펴보려고 캠이라

 

南谷 朱義植(생몰 연대 미상), 숙종 때 가인

 

 

 

숙제봉(357.4m), 10시 50분.

 

 

 

다시 안부로 내려와,

공룡발자국으로 간다.

 

 

이 가뭄에 물 잘도 나온다., 11시 15분.

 

 

 

 

 

 

공룡발자국 2.

 

 

 

 

 

 

 

 

 

 

 

 

 백이산의 공룡 발자국 화석(경남도 문화재 자료 제545)

2004년 마을 주민에 의해 발견된 백이산(해발 365m) 공룡 발자국 화석은,

국내에는 보기 드물게 발자국의 둘레와 깊이가 원형에 가깝고, 보행 행렬이 잘 드러나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이산의 화석은 중생대 백악기 지층인 함안층 상부의 퇴적층에서 발견된 것이다.

두 발로 걸어다닌 초식공룡인 조각류와 네발 공룡인 용각류의 발자국 등이 다양하게 산재돼 있다.

 

학계에서는 약 9 700만 년 전 초식공룡들이,

호수 주변의 부드러운 뻘을 아주 천천히 걸어가면서 남긴 발자국이 굳어져 암석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룡 발자국 3은 건너 뛰고,

백이산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내리고, 숙제봉 역시 가파를 오르막 내리막을 오르내리고,

많이 지쳤다.

 

 

탑돌이 공룡발자국 1.

 

 

이 작은 돌비에는,

백이산악회 회원인 이영부 마금자 부부가 2005년 2월 18일 이 공룡발자국 화석을 발견했고,

돌탑도 쌓았다고 한다.

 

 

함안 명관리 공룡발자국 화석은 군북면 명관리 백이산 서북편 계곡에위치한 화석으로 중생대 백악기 공룡발자국이다.

 

발자국의 형태가 아주 선명하고 보행열이 잘 드러나 있으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발자국의 둘레와 깊이가 원형에 가까워 학술적 가치가 높다.

현재까지 노출된 발자국 개수가 100여 개가 넘어 우리 군의 대표적 화석지로 손색이 없으며 백이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입소문 통해 유명세를 타고 있다. 공룡발자국 발전 경위가 남달라 간략히 소개한다.

 

백이산 자락의 평광마을에 거주하는 이영부 · 마금자 부부는 등산 애호가이다. 20041020일 집 뒤쪽 덤불 숲을 정리해 등산로를 개설해 볼 생각으로 백이산을 오르다가 7부 능선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무심히 보았던 흙무더기 안에 패인 자국이 엿보여 무심결에 손으로 하나 둘씩 걷어 보니 움푹 패인 자국이 일정하게 나타났다.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집에서 삽과 호미 등의 도구를 챙겨 다시 현장을 찾았고, 꼬박 10일간 흙과 덤불로 우거진 주변을 수습하여 지금의 공룡발자국 100여 개를 발견했다.

 

200335일에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추가로 같은 시기의 공룡발자국 화석 40여 개를 발견하여 명관리 공룡발자국 화석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4년부터 사비를 들여 공룡발자국 화석 주변에 기념돌탑 100여 기를 쌓아 백이산을 오가는 이에게 볼거리를 제공하여 함안을 널리 알리고 있다.

 

지금도 부부는 매일같이 돌탑과 화석 주변 풀베기, 꽃과 나무 심기 등 문화재 돌봄을 통해 함안 사랑을 실천 중이다.

 

안내 표지글을 옮겨 적었다. 편집자.

 

 

 

 

 

 

 

 

사닥다리를 올라 본,

 

 

 

공룡발자국 화석

 

 

 

이영부 마금자 부부가 쌓았다는 돌탑들.

 

 

 

 

 

 

 

 

 

 

 

 

 

 

 

 

 

봄까치꽃(개불알꽃)이 한창이다.

 

 

 

서재골 소류지, 12시 15분.

 

 

 

 

 

 

도천사, 12시 25분.

인천 이씨 재실이다.

 

 

 

 

 

 

 

여기서부터 군북역까지 2㎞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목각동물 전시관

 

 

 

 

 

 

광대나물도 꽃을 활짝 피웠다.

 

 

 

명관리 지석묘 1호, 12시 40분.

 

 

 

■ 명관리 1호 지석묘

이 느티나무 아래 정사각형 바위가 명관리 1호 고인돌이다.

고인돌 상면에는 성혈 흔적도 보이며, 원래 위치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전한다.

 

 

 

 

 

명관리 지석묘 2, 3호 표지가 있어, 길도 없는 길을 따라 갔으나, 찾지 못했다.

 

 

 

1시 25분, 군북역으로 돌아왔다.

 

 

 

백이산 산행 7km, 4시간 10분쯤 걸었다.

 

 

택시를 불러 타고,

 

 

서산서원에 왔다., 1시 45분.

 

 

 

 

 

 

 

 

 

서산서원 정문 숭의문

 

 

 

 

 

 

 

 

 

 

 

 

 서산서원

조선 숙종 15년(1689) 魯山君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복위되면서 어계 또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숙종 29년(1703)에는 경상도 유생 郭億齡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의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건의하여,

1706년에 그대로 시행되었다.

숙종 39년(1713)에는 손경장 등의 상소에 따라 서산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고종 8(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2년에 어계의 종중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 사촌리에 다시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198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었다.

 

西山書院에는 어계를 비롯하여 金時習 · 李孟專 · 元昊 · 南孝溫 · 成聃壽 등 생육신이 제향되어 있다.

 

 대원군이 서원 철폐

고종 2(1865) 대원군은 노론의 소굴이었던 만동묘를 철폐했다.

고종 5(1868)에는 서원에도 납세 의무를 부과해 그 특권을 없앴다.

이후 고종 8(1871)에는 전국의 679개 서원 중 주요 서원 47개만 남기고 모조리 철폐했다.

 

 

 

강당 숭의당에서 내려자 본 동 · 서재

 

 

 

동재 양정당은 강사들의 숙소이고,.

 

 

 

 

 

 

서재 상의재는 유생들의 기숙사이다.

 

 

 

 

 

 

 

 

 

 

 

러 비를 한데 합치니 이런 모습이 되었구나.

 

 

 

"정절공 어계조선생 행적비"

 

 

 

사당 충의사의 정문 경앙문

 

 

 

 

 

 

밖으로 나와,

 

 

 

고려 전서공 금은 조열선생 신도비각

琴隱 趙悅은 조려의 할아버지이다. 

 

 

 

원북마을, 2시 5분.

 

 

 

 

 

어게고택은 원북마을 안쪽 깊은 곳에 있었다.

 

 

어계고택 소슬삼문, 2시 20분.

 

 

 

가운데 원북재, 그 왼쪽에 금은유풍, 오른쪽에 어계고택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琴隱 趙悅은 조려의 할아버지이다.

 

 

 

 

 

 어계 고택 漁溪 古宅은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다.

원북리 마을 회관 앞 개울을 끼고 좁은 길을 들어가면 어계고택이 나온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趙旅(1420~ 1489)가 테어나고 여생을 보낸 곳이다.

태학관(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어계 선생은 단종 3(1453)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와,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어계 고택은 대문채원북재 院北齋라는 齋室, 그리고 祠堂 사당인 祧廟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의 후손들이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대문채는 3칸으로 돼 있는데 중앙에는 솟을대문을, 그 양쪽에는 방을 두었다.

 

원북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자형 팔작지붕 집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이고 그 좌우로는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이다.

부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살림집은 아닌 것 같고, 별채이거나 사랑채였을 것이다.

 

어계 고택은 건물이 단순하고 검소한 편이다.

배흘림이 있는 높은 기둥으로 인해 시원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이런 점은 조선 초기 건물의 흔적이다.

 

본디 조려의 할아버지인 琴隱 趙悅 때부터 살던 집이다.

고려말 공민왕 때 공조전서를 지낸 조열은 이색, 정몽주 등과 함께 자주 시국을 걱정하였다.

고려 제34대 공양왕(1389~ 1392) 3년(1391) 이성계의 병권을 빼앗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쫓겨나 고향 함안으로 내려왔다.

 

그외 건물의 구조와 형태, 재료 등으로 보아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민가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건물은 어계 선생 생전의 건물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원북재 뒤 삼문을 지나면 사당 조묘가 나온다. 조묘는 퇴칸이 있는 3 자형의 맞배지붕집이다.

원북재에 비해 연화문 초각 등 장식이 많다.

조묘 안에는 어계 선생이 짚고 다니던 죽장과 국왕의 하사품인 동제 향로가 보관되어 있다 한다.

음력 3初丁日에 조려 선생과 부인에게 항례를 지낸다.

 

魚溪 趙旅(1420~ 1489)는 증사복시정 안 의 아들로 태어났다.

단종 원년(1453)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1455) 비분강개하여 고향 함안으로 돌아왔다.

서산 西山 아래에 죽을 때까지 은거하며,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낸다고 하여 스스로 어계은자라 하였다.

 

하림 삼거리에서 원북리로 가는 길 왼쪽에 어계대라는 수려한 바위 절벽이 있다.

이 바위 밑으로 어계천이 흐른다. 지금은 작은 개천이지만 조려가 은거할 때는 폭이 넓고 물도 깊어 물고기도 많았다.

조려가 낙향한 후 이곳에서 즐겨 낚시를 했다고 한다. 그의 호 '어계'는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이러한 어계 선생의 삶을 함안 사람들은 중국 나라(1046~ 256 BC?) 때의 충신 백이와 숙제 형제에 비유하면서,

원북리 뒷산인 서산을 백이산 伯夷山이라 불렀다.

 숙종이 어계 선생의 절의가 백이와 숙제에 못지않다고 한 데서 쌍안산과 쌍봉산으로 불리던 두 봉을,

백이산과 숙제봉이라 바꿔 불렀다는 말도 있다.

 

저서로는 <어계집 漁溪集>이 남아 있다.

<어계집>은 조영석이 어계의 글들을 수집하고 부록을 붙여 편찬하였다.

 

 癸酉靖難은 단종 원년(1453) 10, 훗날 세조(1455~ 1468 재위)로 즉위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세종과 문종의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단종 폐위하고 죽이는 계기가 된다.

김시습 · 원호 · 이맹전 · 성담수 · 남효온 등 다른 생육신들도 그렇지만,

어계는 낙향한 후 세상과 다시는 인연을 맺지 않고 철저히 은거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수양대군의 단종 왕위 찬탈에 이곳 고향으로 낙향한 후,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가 있던 단종에게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 한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문상을 하러 청령포에 이르렀는데,

배가 없어 건널 수 없어 울고 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업고 건네 주었다고 한다.

장릉에서 청령포로 가는 길에 있는 흰재에 그 내용을 기록한 유적비가 있다.

 

 

 

 

 

사당 조묘

 

 

 

祧廟

 

 

 

원북재 왼쪽 담장 가에 수령이 약 500년이 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보호수 은행나무, 나이 500살, 높이 20m, 나무 둘레 3.4m.

 

 

 

어계 고택에서 채미정 가는 길 어느집 돌담에,

앵도 꽃 활짝 피었다.

 

 

다시 원북마을 입구로 나와 찻길 건너,

 

 

채미정, 2시 50분.

 

 

 

가운데 薇亭 채미정, 왼쪽에 백세, 오른쪽에 청풍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채미정 采薇亭

고종 8(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산서원은 훼철되었고,

서원의 부속 정자였던 채미정만 남아 있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옛터에 복원하였다.

채미정이란 이름은 옛날 나라(1046~ 256 BC?) 때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았다는 고사를 따랐다.

 

채미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한가운데에 정면 측면 2칸의 방이 자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처마 밑 왼쪽에는 '百世', 오른쪽에는 '淸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百世淸風 백세에 이르는 맑은 기풍'이란 뜻이다.

어계 선생의 곧고 맑은 충정을 표현한 것이다.

 

처마 밑에는 또 다른 여러 현판이 걸려있는데,

어계 선생의 9대 손이며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인 觀我齋 조영우(1686~ 1761) 采薇亭記 현판도 있다.

조영우는 어계의 글들을 수집하여 <어계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편액 채미정 뒤 문 위에 걸린 편액 염립재

 

 

 

채미정 중건기

 

 

 

이 현판은 위의 기문을 번역한 것이다.

 

 

 

언덕 위로 올라가,

 

 

 

채미정과 붙어 있는 언덕 위를 청풍대라 하고,

청풍대에는 문풍루 聞風樓란 육각정이 있다.

 

 

문풍루

 

 

 

 

 

 

다시 서선서원 앞으로 와서, 3시 10분.

 

 

택시를 불러 타고 가다가,

눈에 들어온 것,

 

 

고마암(어계대), 3시 20분.

 

 

 

西山

 

淸巖 趙三奎(1890~ 1950) 稿

 

漁祖登臨日 어계선조 산 오르신 날
溪山淸復淸 시내 산 맑고 맑구나.
後生誰不仰 후손 그 누군들 숭앙치 않으리오
百世樹風聲 백세토록 맑은 기풍을

 

어계선생의 15대 후손인 趙三圭가, 어계선생의 덕을 추모하여
叩馬巖 고마암 뒷편에 西山菴을 지어 기거하면서,

채미정 처마 밑에 걸려있는 百世淸風이라는 글씨를 이 벽에 새기면서,

西山이라는 시를 지어 함께 새겼다 한다.

 

 

 

 

 

하림 삼거리에서 원북리로 가는 길 왼쪽에 어계대라는 수려한 바위 절벽이 있다.

이 바위 밑으로 어계천이 흐른다. 지금은 작은 개천이지만 조려가 은거할 때는 폭이 넓고 물도 깊어 물고기도 많았다.

조려가 낙향한 후 이곳에서 즐겨 낚시를 했다고 한다. 그의 호 '어계'는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군북역으로 돌아와,

4시 36분 출발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달마루 셀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