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산행 후기

경주 남산, 지바위골~ 상사바위~ 상서장- 2024년 8월 1일

추연욱 2024. 8. 2. 11:58

 

경주 남산, 지바위골~ 상사바위~ 상서장- 2024년 8월 1일

 

 

 

부산동부터미널에서 7시 20분 출발 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에 왔다., 8시 15분.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에서 땅에서 열기가 확 몰려 왔다.

 

기상청에 따르면, 727일 태풍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아열대 고기압이 확장하면서,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이동해 제주와 남부, 중부 지역의 장마가 종료되었다.

지난 619일 제주에서 시작돼 한달 넘게 이어져 왔다.

 

이번 장마는 28일까지 전국에 내린 비는 누적 472mm로 평년(356.7mm)132.5%에 달했다.

중부는 506.3mm로 평년의 133.7%, 남부는 447.2mm로 평년의 130.8%,

제주는 561.9mm로 평년의 158.9%를 기록했다.

소박사 TV에서.

 

8월 2일 촤고 기온 경주 38.9℃, 2018년에 이어 역대 2위.

소박사 TV에서

 

 

 

큰길 건너, 시외버스 · 고속버스터미널 정류장

 

 

 

 

대릉원 가는 11번 버스를 기다리며, 뒤돌아 본 선도산

 

 

 

 

대릉원 가는 11 버스는 8시 50분에 왔다.

 

대릉원 정류장, 9시 5분.

 

 

 

 

가는 길에  서출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무량사 탑, 깃발 같은 것은 바늘꽃.

 

 

 

 

 

 

 

 

 

 

 

 

지바위골 가는길, 여기서 시작한다., 9시 20분.

무장애탐방로 방향을 따른다.

 

 

 

동남산 탐방지원센터

 

 

 

 

동남산 무장애 탐방로

 

 

 

 

 

 

경주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국사골은 국사방이란 절이 있던 곳이라 전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때 실제사의 영여스님이 왕의 초청으로 궁에서 불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후 스님의 높은 덕이 세상에 알려져 자취를 감춰 버린 스님을 국사로 추봉하였고,

스님이 계시던 절은 국사방이라 불렀다.

 

국사골은 세 개의 계곡으로 갈라지는데,

북쪽으로는 고깔바위, 서쪽으로는 상사바위기 있으며,

가장 큰 지류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남산팔경의 하나인 남산부석이 우뚝 솟아 있다.

 

 

지암골은 땅에서 솟은 바위가 있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큰 지바위골과 작은 지바위골로 나누어 진다.

큰 지바위에는 머리 두건을 쓴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고,

그 동쪽면은 민속신앙의 대상인 무신도로 추정되는 그림을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의 기와편, 토기, 고려 청자 등이 발견된 제3사지 이외에도 여러 절터들이 산재해 있다. 

 

설명 표지핀의 글을 옮겨 적었다., 편집자

 

 

 

 

 

 

화장실

 

 

 

 

 

 

 

 

지바위골 갈림길, 10시 5분.

 

 

 

 

 

 

 

 

 

 

 

 

엄청 큰 바위, 이름이 있을 법한데?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

 

 

 

 

경주 님산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은 무너져서절터 주변능선과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 발굴 조사하여 200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탑은 자연 암반을 다듬어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삼층으로 몸돌을 올린 모습으로,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경주 남산에서만 볼 수 있다.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은 점과 지붕돌 아래 받침이 4단인 점 등 탑의 구성과 제작 방식이,

서남산에 위치한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과 거의 같다. 만든 시기도 서러 비슷한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복원된높이가 3.8m로 바위 위에 세운 석탑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설명 표지핀의 글을 옮겨 적었다., 편집자

 

 

 

 

 

 

 

 

 

 

 

큰바위와 불상

 

 

 

 

 

 

 

 

 

 

 

 

 

 

 

 

 

 

 

 

 

 

 

 

 

큰 바위와 불상 2

 

 

 

 

 

 

 

 

 

 

 

 

 

 

 

여기까지 음침한 숲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들여 올라 왔다. 이제 시야가 트인다., 11시 55분.

 

 

 

 

 

 

 

 

 

 

 

 

 

 

남산부석

 

 

 

남산부석을 바라보며,

가까이 가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다. 남산부석은 남산리 마을에서도 잘 보인다.

 

 

 

 

 

 

 



 

 

 

 

 

 

 

 

 

 

 

 

 

 

 

 

 

 

 

 

 

 

 

 

남산부석

 

 

 

이 바위는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부석 浮石이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경주팔괴의 하나로 버선을 거꾸로 새워 놓은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버선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큰 바위 위에 부처님 머리처럼 생긴 작은 바위가 얹혀 있어,

마치 앉아 있는 부처님처럼 보이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팔각정터, 12시 30분.

 

 

 

 

 

 

 

 

 

 

 

 

남산관광일주도로준공 □?

 

 

 

 

 

 

 

 

 

 

 

 

상사바위, 12시 45분.

 

 

 

 

옛날 국사골 어귀 양피리에 할아버지가 홀로 살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으며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그 중에도 피리라는 소녀를 무척 귀여워하였는데, 소녀도 할아버지를 잘 따랐다.

세월이 흘러 처녀가 된 피리는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갔다.

피리가 떠난 후 할아버지는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나무에 목을 메어 죽은 후 큰 바위가 되었다.

그 후 피리는 밤마다 큰 뱀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꿈에 시달렸다.

 

어느 날 밤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어 죽음을 택했는데,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너를 이렇게 괴롭히니 나를 용서하려무나, 살아 있을 때는 죽을 길이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더 죽을 길도 없구나. 제발 나를 용서해다오.”라고 하였다.

 

피리는 자기를 그리워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하여,

할아버지 바위에 올라가 할아버지, 인간 세상에서는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천년 세월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를 소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러자 할아버자 바위 옆에 또 하나의 바위가 나란히 솟아 올랐다.

 바위 아래 붉은 줄이 흘러내리니 피리의 핏자국이라 전하며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른다.

 

 

 

 

 

 

 

 

 

 

 

 

 

 

 

 

 

 

 

 

 

 

 

 

 

 

 

 

남산신성

남산 북쪽의 계곡과 비교적 야트막한 산봉우리를 이어 쌓은 산성으로 월성과 경주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다.

성의 둘레는 4,850m정도로 동쪽의 명활성, 서쪽의 서형산성, 북쪽의 북형산성과 함께

남쪽에서 서라벌을 지키는중요한 산성이었다.

 

진평왕 13년(591)에 성을 쌓고 문무왕 19년(679)에 크게 고쳐 쌓았다고 하는데,

성벽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문무왕 때 고쳐 쌓은 곳으로 보인다.

성 안에 큰 창고 2개를 짓고 무기와 군량미를 저장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하지만,

지금은 터만 3곳이 남아 있다.

 

성 부근에서 남산신성비가 발견되었다.

비문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각자 길이를 나누어 성벽을 맡아 쌓았는데,

만일 3년 이내에 성벽이 무너지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서약의 글과 함께,

성을 쌓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벼슬, 성명, 출신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성을 쌓은 기록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신라의 지방 통치 체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탐방로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능선이 둘러있다.

남산신성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너무 덥고 지쳐 살펴보지 못했다.

 

 

 

 

 

 

 

 

 

 

"大吉 8월 1일 福"

 

 

 

누군가 솔방울로 허트를 곱게 만들고 그 안팎으로 글자를 만들었다.

날짜는 오늘 아침 고쳐 적었을 것이다.

 

전에도 내가 찾은 날짜와 딱 맞았다.

 

 

 

 

 

 

 

 

 

 

 

상서장, 3시 15분

 

 

 

 

상서장上書莊신라 말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인 최치원(587~ ?)이 살았던 집이다.

 

최치원은 857년 신라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그가 12세 되던 해인 경문왕 8년(868) 당나라에 유학하여 수도 장안 국자감 태학에 입학한다.

874년 18세에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당나라 여러 곳을 다니며 벼슬을 하였다.

 

당나라 말기인 제18대 僖宗황소의 난 黃巢之亂(875~ 884)이란 내전이 일어났다.

황제 희종이 수도 장안을 버리고 피란을 가야할 만큼 큰 내란이었다.

이때 최치원은 회남절도사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역적 황소를 치는 글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황소는 이 글을 보고 자리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황제로부터 紫金魚袋를 하사받으며, 최치원이란 이름은 온 당나라에 떨치게 되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 11년 (885) 고국을 떠난지 18년 만에 귀국한다.

다음 해 헌강왕이 죽고, 정강왕, 뒤이어 제51대 진성여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신라는, 임금은 무능하고 신하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돌보지 않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지방에서는 도적떼가 일어나 나라가 매우 위태로웠다.

최치원은 태산군, 부성군 등 변두리 고을의 태수가 되어 나라를 바로집기 위한 의견을 글로 쓴 <시무십조 時務十條 >를 임금께 올렸으나 그 뜻이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정계를 떠나 대자연을 벗삼아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 방랑하였다.

경주 남산, 가야산, 지리산 쌍계사 등 곳곳에 자취를남겼다.

 

신라 제52대 효공왕(897~ 912 재위) 때인,

고려 태조 왕건이 임금이 되기 전 왕건의 뛰어난 인격을 격려하여,

"계림에는 낙엽이 지고, 송악산에는 솔이 푸르다  鷄林黃葉 鵠嶺靑松"란 글을 올렸다.

 

고려 제8대 宗(1009~ 1031 재위)이, 최치원이 고려 건국에 숨은 공이 있다 하여 文昌侯란 시호를 내리고,

공자묘 孔子廟에 위패를 모시게 하였다.

그후 최치원이 실던 집을 상서장이라 하였으니 태조 왕건에게 글을 올린 집이란 뜻이다.

 

지금 건물은 근세에 후손들이 세운 것인데,

상서장, 영정각, 추모문 등 있고, 조선 고종 때 건립된 비가 남아 있다. 

영정각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고,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낸다.

 

 

 

 

 

 

 

 

 

 

주차장에서, 3시 20분

 

 

 

 

상서장 주차장에서 달마루 셀카.

 

 

 

여기서부터 터미널 가는 길, 고생길이었다.

 

상서장 앞 길은 넓고, 많은 차들이 쌩쌩 달렸다.

왼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게 아주 잘못한 선택이었다. 오른쪽 박물관 쪽으로 가야 했다.

 

땡볕에 길 가장자리를 따라 간다.

한참 가니 도당산 터널이 나타났다. 터널 안으로 가기 싫어 큰길 왼쪽 오르막길로 힘겹게 올랐다.

오르니 정상에 도당산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덥고 지치고 잔디밭에 배낭을 베고 잠들었다.

얼마를 잤는지, 잠 깼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공원을 내려와서 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 가장자리를 조심조심 걸었다.

덥고, 지치고, 졸리고, 그렇게 한 참 가다가, 오릉 같은 게 보여 직각으로 꺾어 걸었다.

그리고 또 한참 걸어 오릉정류장에 왔다.

금방 버스가 왔고, 그렇게 터미널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