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정기도보, 2024년 3월 9일, 토요일, 대구방] 고령 대가야 둘레길
대가야 농촌문화 체험특구 주차장에 왔다. 10시 5분,
우리는 좀 일찍 도착했다.
주변을 구경할 여유가 생겼다.
■ 고령은 옛날 대가야의 도읍지였다.
고령의 진산인 主山(또는 耳山, 해발 321m)에는 대가야의 왕성인 주산성이 있고,
성안 능선에 지산동고분군이, 그 아래 펑퍼짐한 곳에 있던 왕궁터는 가야공원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 낙동강 하류 지방의 변한 12국에서는 기원 전후 시기에 철기문화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연맹왕국이 출현한다.
6가야로 불리는 가야연맹이 그것이다.
6가야의 위치
삼한시대 고령지역은 半路國으로 불리었다. 이 지역의 정치세력은 주변 지역과 동일한 문화적 기반 위에 있었다.
4세기쯤에 야로면(합천군 야로면) 일대의 철광을 개발하여 힘을 길러 가야의 하나로 성장했다.
40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내려온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호태왕(391~ 412 재위)의 군대의 공격을 받아,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하류의 가야 세력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하여, 법흥왕 19년(532) 구형왕 김구해가 왕비와 아들 셋과 함께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로 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금관가야는 42년에 나라를 세워 520년 만에 망한다.
이 틈에 낙동강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했던 대가야는,
고령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새로운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전기가야와 구별하여 후기가야라 한다.
이후 합천지역을 통합하고,
전성기에는 남해안 일부와 아라가야의 영역을 제외한 함양, 남원, 임실, 섬진강 일대까지 영역을 넓힌다.
대가야에 대해 위협과 유화정책을 병행하던 신라가 진흥왕 23년(562),
이사부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대가야를 침공하여 도성을 함락함으로써,
아진아시왕 이후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16대 520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인 가야는 외부의 강력한 힘에 맞설 수 있는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이후 가야 사람들의 문화는 신라 발전에 큰 힘이 되고 결국 삼국통일의 기틀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 가야는 무슨 뜻?
“‘伽倻 · 駕洛’ 내지 ‘弁韓’의 ‘변’은 모두 ‘가ᄅᆞㆍ갈’의 음훈차자인데, ‘가ᄅᆞ’는 ‘分 · 岐’의 뜻이다.
대개 삼한 중 마한이 남한, 진한이 동한임에 대하여 변한은 가ᄅᆞ한 또는 가ᄅᆞ신한[弁辰]으로 호칭되었는데,
‘변한 · 가야’ 제국은 원래 진 · 마한의 中分적 위치에 있거니와,
특히 낙동강 하류 분기지대에 있음으로 이 칭호를 얻은 것이다.
낙동강 하류는 강류가 여러 갈래로 분기됨으로 歧音江(가ᄅᆞᆷ은 강의 고어. ᄀᆞᄅᆞᆷ은 이에 연원됨)의 칭이 있다.”
양주동, <고가연구>, 일조각, 1970, 349쪽.
‘加羅는 城邑을 뜻하는 ‘가라’의 표기로 보았다.
이는 고구려 또는 구려가 성읍의 이름에 기원하는 것과 한가지다. 가야는 가라가 구개음화한 것이다.“
이병선, <한국 고대국명지명연구>, 형설출판사, 1982, 81쪽.
'대가야 생활촌'으로 들어간다.
주산루에서 내려다 본다.
'대가야 둘레길' 도보 출발, 11시 20분
돌널무덤[石棺墓]을 재현했다.
지산동 고분군
■ 지산동고분군(사적 제79호)은,
고령의 뒷산인 主山(耳山이라고도 한다. 해발 321m)에 있다.
뒤로 주산성을 두고 앞에 취락과 평야, 강이 내려다보이는 능선의 정상부에 거대한 봉토를 쌓아 조성했다.
고분군은 왕성과 왕궁 사이에 길게 뻗어내린 능선에 위치한다.
대가야 왕을 비롯한 통치자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된다.
가야 사람들은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며 무덤을 조성했다.
김해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함안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
창녕 비사벌가야의 교동 고분군 등이 모두 그렇다.
높고 건조한 곳을 명당으로 생각한 당시의 매장 관념,
또는 사람의 삶은 이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저승 또는 하늘나라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따라,
좀더 하늘에 가까운 높은 곳을 선택하여 주검을 안장했을 것이다.
대형봉토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무덤 200여 기가 있다.
대체로 5세기~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석으로 짠 상자모양의 돌널에 시신을 안장하는 돌널무덤[石棺墓],
깬돌 또는 깬돌과 판석을 함께 사용하여 덧널을 만든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로 만든 널방에 주검을 안치한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 등이 주류를 이룬다.
정해진 묘역 중앙에 주실을 설치하고 주실 옆에 부곽이나 순장곽을 설치한 다음 원형의 호석을 쌓았다.
무덤 안은 지하에 광을 쌓고 깬돌이나 자연석을 이용하여 네 벽이 서로 엇물리게 쌓았다.
껴묻거리로는 토기 등과 피장자가 지배신분인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동관 등 관모류, 갑주류, 목걸이, 금은제 귀걸이 환두대도 등이 있다.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국보 제138호)- 호암 미술관 소장
지산동고분군은 20세기 초부터 일본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임나일본부 때문일 것이다. 여러 차례 발굴했지만 출토된 유물들은 행방을 알 수 없고,
발굴 보고서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다가 1977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가 합동으로 44호분과 45호분을 발굴했고,
이듬해 계명대학교가 중형분 4기, 32~35호분을 발굴 조사하였다.
이 발굴로 무덤의 구조가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구덩식 돌방무덤 등 다양함이 밝혀졌다.
보물 금동관(지산리 32호분 出土)
이중 가장 먼저 조성된 것은 35호분, 이후 30호분이 축조되었는데,
금동관은 2호 순장 석곽에서 3~11세쯤 되어 보이는 소아가 장착하고 있었으며,
주석실 피장자의 노비나 하층계급에 해당하며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 지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가야고분군은 2023년 9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6가야의 여러 유적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7개 고분군은 다음과 같다.
전북 남원 유곡리와 두곡리 고분군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
가야 고분군은 2013년 잠정목록에 등재되었고,
2021년 문화재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해,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이코모스 ICOMOS의 현지실사를 거쳐 등재권고 의견을 받았고,
2023년 9월 10~25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개최된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목록에 등재 결정되었다.
대가야 왕릉전시관
전시관을 나와 다시 고분군
지산리 고분군은 끝나고,
주산을 향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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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석씨 참의공파--- 문중 묘역
청금정 샘터, 1시 25분.
여기서 점심
꼴치로 들어왔으니, 선두는 15~ 20분쯤 빨랐을 것 같다.
2시쯤부터 오후 일정을 시작한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
길 가에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명곡정
정자 앞에는 "충의부 도사 여주이공유허비"가 서있다.
문이 잠겨 있어 알 수 있는게 없다.
보호수 중화1리 느티나무
"중화리 주만들은 옛부터 땅이나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고,
이 당산나무 아래서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왔다."
중화저수지, 2시 55분.
■ 于勒과 加耶琴
"우륵은 대가야 省熱縣 사람으로 嘉實王의 명에 의해 가야금 곡조에 맞는 12곡을 지었다.
그는 그후 나라가 어지럽게 되므로 가야금을 가지고 제자 尼文과 함께 신라의 娘城(지금의 청주)으로 가서,
진흥왕에게로 귀화하며 가야금을 연주하였다.
이에 왕이 그를 받아들여 國原(지금의 忠州)에 편안히 거처하게 하였다.
551년(진흥왕 12년) 3월에 왕이 그들을 불러 河臨宮에서 악곡을 연주케 하니 각기 그들이 새 가곡을 만들어 올렸다.
이듬해에 왕이 대나마 階古, 法知와 대사 萬德을 우륵에게 보내어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기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사람이 우륵에게서 이미 11곡을 전해 받고 서로 이르기를,
“이것은 번다하고 음란하니,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 하고,
그것을 요약하여 5곡을 만들었다.
우륵이 이를 듣고 처음에는 노여워하다가 그 5가지의 음조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樂而不流,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哀以不悲,
바르다고 할 만하니 可謂正也 네가 왕의 앞에서 연주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학업을 마치자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이를 듣고 크게 즐거워하였는데,
諫臣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망한 가야국의 음율은 취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가야국이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하였는데 음악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대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하는 것은 인정으로 연유하여 조절하게 한 것이니,
나라의 다스리고 어지러움은 음악곡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행하게 하여 大樂이 되었다.
가야금은 본래 대가야의 가실왕이 중국의 당나라 악기인 箏를 보고 만들었는데,
중국의 傅玄이 이르기를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가 평평함은 땅을 상징하고,
가운데가 빈 것은 우주에 비할 수 있고,
줄의 기둥은 12월에 비겼으니 이것은 仁 · 智의 기구'라 하였다.
阮瑀(위나라 문인)는 이르기를 '쟁은 길이가 6척이니 음율수에 따른 것이고,
12줄은 4時를 상징하고, 기둥의 높이 3寸은 三才(天 · 地 · 人))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야금에는 두 음조가 있는데, 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가 그것이다.
<삼국사기> 樂志 제1, 新羅本紀 제4 진흥왕조.
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만든 12줄의 현악기로 공명관 위에 줄을 세로로 매기고,
기러기 발[雁足[을 버티어 세웠는데, 머리 부분은 양의 귀 모양을 하고있다.
1997년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에서 완성되기 이전의 가야금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현을 꿰매는 구멍이 뚫린 상부, 소리 울림통 역할을 하는 몸통, 현을 모아 고정시키는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다.
경산 임당동에서도 이러한 현악기가 발굴되었다.
신라 토기에도 가야금이 보인다.
신라 "토우장식장경호(국보 제195호)"에서 보는 가야금
우륵이 12곡을 만든 것은 가야 세력의 일체화와 대가야 맹주권의 확인이었을 것이다.
우륵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진흥왕 12년(551) 신라로 망명한다.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성(충주)에 살게하고 법지 계고 만덕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충주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며 만년을 보냈다는 탄금대가 있다.
이후 가야금은 신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185곡이나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가야금은 일본에도 전해져 신라금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일본 천왕가의 보물창고인 정창원에 신라금이 보존되어 있다.
19세기 말 金昌祖가 가야금 산조를 창시한다.
전통적인 가야금보다 빠르고 다양한 산조 기교에 적합한 소형 산조 가야금도 만들어졌다.
중화저수지 위 덱길을 따라 가서,
저 뒤로 보이는 바위산이 가야산 칠불봉 쪽인 것 같다.
우륵정
중화저수지를 건너 왼쪽 길을 따라 우륵공원으로 간다.
저수지 가 길에 "이운 순럐길"이란 안내 표지가 있다.
강화도에서 만든 고려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기는데, 이리로 지나갔다는 뜻.
우륵공원, 3시 15분.
봄은 곧 오는가?, 목련꽃눈이 통통 부풀었다.
대구방에서 준비한 정성으로 뒤풀이가 있었다.
여기서 오늘 행사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우리는 4시에 이곳을 출발했다.
숙등역에 내리니 6시 20분.
김해를 좀 지나서 차가 많이 밀렸다.
달마루 셓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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