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답사기- 2020년 1월 31일
12시 5분, 양동마을 입구 정류장에 왔다.
양동마을 문화관 옆 벽에 이런 키치 kitsch 풍의 벽화
● 양동초등학교
학생이 80명쯤 된다는데,
학교 참 좋다.
버즘나무는 플라타너스
●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189호)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이다.
이 마을의 진산인 설창산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4개의 골짜기인 두동골 · 물봉골 · 안골 · 장태골을 중심으로 능선 위로 올라가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15세기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이곳에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 골짜기의 가장 높은 곳에 대종가, 파종가가 있으며, 그 지손들의 주택은 그 아래 자리잡았다.
대개 지손들의 집은 종가건물보다 규모가 작다. 대종가나 파종가의 집은 거의 口자집(통말집)이다.
길가의 낮은 지대에는 일반 민가가 자리잡고,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양반집이 자리잡아 계급에 따라 주택이 배치되어 있다.
양반집에는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는 행랑채가 있고,
외거노비들이 사는 가랍집(하배집)이 3~4채씩 딸려있다.
17세기 말에는 600~700채나 되었다.
한국전쟁 안강 · 기계 전투 이후 100여 가구 이상이 한꺼번에 줄었다.
이 마을에는 국보 제283호 <통감속편>, 무첨당, 향단, 관가정, 손소영정 등 보물 3점,
서백당, 낙선당, 사호당, 상춘헌, 근암고택, 두곡고택, 수졸당, 이향정, 수운정, 심수정, 안락정, 강학당 등 중요민속자료 12점 등이 있다.
이씨 가문의 정자 설천정(1995년 화재로 불타 지금 터만 남았다)과 손씨 가문의 정자 수운정,
남촌에 이씨 가문의 서당 강학당과 손씨 가문의 서당 안락정이 있다. 안락정은 1780년경 지은 건물로 지금은 정자이다.
마을 길가 낮은쪽에 외거노비들이 사는 가랍집들이 있다.
※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 ||
| 월성 손씨 | 여강 이씨 |
종가 | 서백당 | 무첨당 |
정자 | 수운정 | 심수정 |
서당 | 안락정 | 강학당 |
서원 | 동강서원 | 옥산서원 |
대표 건물 | 관가정 | 향단 |
●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① 이 마을에는 4~5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② 고려 말 이광호라는 사람이 이곳에 살았다.
③ 풍덕 유씨 유덕하라는 사람이 이광호의 손자사위가 되어 처가 동네인 이곳에 정착한다.
④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溪川君에 봉해진 사람인
월성 손씨 손소(1433~1484)라는 사람이 유복하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어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 마을에 정착한다.
⑤ 이광호의 5대 종손인 李蕃이라는 사람이 손소의 딸과 결혼하여 이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손씨와 이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손소의 가문의 둘째 아들 우재 손중돈(1463~1529) 은 의정부 우참찬(정2품)에 올랐고, 학문이 뛰어났다.
이씨 가문에는 이번의 맞아들 회재 이언적(1491~1553)이 태어난다.
그는 뛰어난 선비로 동방오현에 오른 인물이다.
이리하여 두 가문은 확실한 기반을 마련한다
⑥ 이후 두 사돈 가문의 후손들은 몇 개의 분파로 갈라져 대를 이으며 이곳에 살고있다.
서로 경쟁하며, 서로 협력하며 이 마을을 오늘날까지 지켜왔다.
양동마을은 2010년 7월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손종로 旌忠碑閣
● 관가정 觀稼亭(보물 제442호)
관가정은 보수공사 중, 사진을 찍지 못했다.
■ 관가정(보물 제422호)은 우재 손중돈이 분가하여 산 집으로 월성 손씨 파종가이다.
경사지를 평면으로 닦아 나지막하게 건물을 지었다. 건축 계획이 매우 규범적이고 합리적이다.
누마루만 사각 기둥을 사용하였다.
밖으로는 폐쇄적이고 소박하나 안으로는 개방적이다.
평면은 口자형이다. 앞쪽 좌우로 날개가 나온 모습니다.
중문을 가운데 두고 서쪽에 사랑채, 동쪽과 북쪽에 안채가 있다.
사랑채는 방 2칸 대청 2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청 밑 부분은 기단을 낮추어 누마루가 있는 정자의 역할도 하게 하였다.
사랑채 마루는 두리기둥을 써서 차이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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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단
들어가지 못했다.
■ 향단(보물 제412호)은 마을 어귀 언덕에 있다. 여강 이씨 파종가인 향단파 종가이다.
회재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인 1540년대에 지었다.
회재가 전임할 때 동생 농재 이언호에게 물려주어 이후 농재의 후손들이 살게 되었다.
경사지를 2개의 단으로 닦아 건물이 드러나게 지었다.
앞면 지붕 위로 노출된 박공면이 특징적이다. 본디 99칸 집이었으나 허물어져 51칸으로 줄여 보수하였다.
안채의 대청마루가 밖에 있다. 여기서 행랑채가 훤히 보인다. 바로 하인들을 지휘할 수 있다.
대청 옆의 쪽문은 젊은 남편이 슬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양쪽 박공면에 풍판을 달았다.
앞이나 옆에서 보면 2개의 합각면과 1개의 박공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외관이다.
행랑채까지 두리기둥을 썼고, 동쪽 2번째 칸이 문이다.
동쪽을 향한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정면을 나란히 두 개의 맞배지붕으로 마감하고 풍판을 달았다.
향단은 집안은 폐쇄적이고, 밖에서 보면 권위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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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첨당(보물 제411호)
"무첨당" 현판은 사랑채 정면에 걸려있다.
"無忝"은 이언적의 맏손자 李宜潤의 號이다.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 무첨당(보물 제411호)은 물봉골 산기슭에 있다.
회재의 본가이며 여강 이씨 대종가이다.
1460년경 이언적의 아버지 성균관 생원 李蕃이 살림채를 짓고,
이언적이 1504년경 별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별당이 무첨당이다.
사당 앞에 서면 서당 강학당과 정자인 심수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첨은 회재의 맞손자의 호이다.
대종가는 안채, 별당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첨당은 대종가의 별당채이다.
일반적으로 별당은 살림채 안쪽에 두어 외부에 잘 보이지 않게 하는데, 무첨당은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크다.
몸체는 가운데가 6칸 대청, 그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다.
앞으로 나온 부분은 2칸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홑처마에 지붕은 누마루 쪽은 합각이고, 몸체 오른쪽은 박공면에 부섭지붕을 덧붙였다.
무첨당의 오른쪽 건물들이 안채이고, 뒤편 언덕에 있는 것이 사당이다.
사랑채 대청마루 왼쪽에 걸린 현판, "左海琴書"
"영남에서 선비가 살 만한 곳"이란 뜻,
대원군이 이곳에 들러 대쪽으로 쓴 글씨라 전한다.
勿厓書室, "물애"는 물봉골. "물봉골에 있는 책방"이란 듯
蓉舫 趙光이란 사람이 썼다고 관지에 적혀있다.
"五棣書室 오체서실", 오체는 이언적의 다섯 손자. "다섯 형제가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蒼山世居, "창산"은 무첨당 뒷산 설창산을 말한다.
"설창산에서 대대로 살아온 집"이란 뜻이다.
● 대성헌
● 사호당 고택
● 서백당
● 송첨종택 서백당
■ 서백당(중요민속자료 제3호)은 안골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이 마을 입향조인 孫昭(1433~ 1484)가 25세 때인 1458년에지은 월성 손씨 대종가이다.
문화재청 명칭은 ‘월성 손동만씨 가옥’이다. 사랑채의 이름을 따서 書百堂 또는 松簷이라 한다.
愚齋 孫仲暾(1463~ 1529)과 외손 晦齋 李彦迪(1491~ 1553)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서백당은 풍수적으로 三賢先生之地라 전해온다.
세 사람의 현인이 태어날 길지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우재 손중돈과 외손 회재 이언적이 태어났으니, 빼어난 인물 한 사람이 더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회재 이후로는 외손이 큰 인물이 된다면 다른 가문에 현인을 빼앗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시집간 딸들이 몸을 풀러 친정에 와도 해산만은 다른 집에서 하게 하는 관습을 지킨다 한다.
서백당이란 말은 “참을 인(忍)자를 백번이나 써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행랑채 ‧ 몸채 ‧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 사랑채는 口자형, 사당채는 一자형이다.
서백당에는 <통감속편>(국보 제283호)과 손소 영정(보물 제 1216호)이 있다.
손소영정은 손소의 초상화이다. 성종 7년(1476)에 그린 것이다.
가로 105㎝, 세로 160㎝의 비단 위에 그렸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지만, 그림의 색체나 윤곽과 글은 비교적 뚜렷하다.
<통감속편>은 중국 고대 반고씨부터 고신씨까지, 그리고 당나라 천복 1년(901)에서 송(宋)나라 상흥 2년(1279)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원나라 때인 1361년에 중국에서 발간된 적이 있다.
이곳에 보관된 책은 세종 4년(1422)우리나라에서 발간한 것이다. 책의 크기는 가로 18.3㎝, 세로 29.2㎝이다.
서백당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는 500살쯤 된다. 손소가 집을 지을 때 심었다고 한다.
사당에는 손소와 손중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화장실
양동마을 체험관
양동마을 주차장
3시 10분에 출발하는 203번 버스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3시 52분.
4시 출발 고속버스를 타서,
4시 55분, 노포동 터미널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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