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과 하회마을
1. 屛山書院(사적 제260)은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다.
西厓 柳成龍(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 修巖 柳袗(1582~1635)을 배향한 서원이다.
본디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풍산 류씨 가문의 豊岳書堂이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 고장에 왔을 때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토지 800두락을 내려준 적이 있다.
그뒤 조선 선조 5년(1572) 류성룡이 서당이 큰길가에 있어서 학문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조용하고 경치가 좋은 이곳으로 옮겼다.
조일전쟁 때 병화를 입었으나 광해군 6년(1614) 류성룡의 제자인 遇伏 鄭經世(1563~1633)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류성룡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1629년에는 셋째 아들 修巖 류진을 추가로 배향했다.
철종 14년(1863)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꽃뫼[花山]의 동남쪽 경사면에 남향으로 앉아있다.
서원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강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그 언덕에 노송들이 서있다.
강 건너에는 병풍 같은 병산이 있어 강물에 병산의 그림자가 떠있다.
병산서원은 서원이라는 사설교육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17세기 초반에 건설되었다.
그래서 서원 구조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1. 정문은 復禮門이다.
<論語 顔淵> 편에 나오는 “克己復禮(자기의 사사로운 욕망을 이겨내어 禮를 회복한다면 천하가 仁으로 돌아갈 것이다)”에서 따온 말이다.
2. 복례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측면 2칸의 晩對樓가 나온다.
杜甫의 시 <白帝城樓>의 한 구절 “翠屛宜晩對(비취빛 병풍(절벽)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에서 온 듯하다.
아래층은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의 기둥이 누각을 받치고 있고,
윗층 누각은 이와 달리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들이 정연하게 공간을 만들었다.
만대루 천장의 기둥 사이를 연결한 굵은 보들 역시 자연스럽게 휘어진 재목 그대로이다.
3.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중심 건물인 입교당이 나온다.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집이다.
마루인 가운데 칸은 강당이고, 양 옆의 두 칸은 온돌방이다.
동쪽 明誠齋는 원장의 방, 서쪽 2칸 敬義齋는 유사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입교당 양쪽에 있는 동 ‧ 서재는 기숙사이다.
■ 입교당 대청마루에 앉아 앞을 내다보면 만대루 7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이 어우러져 7폭 병풍이 된다.
만대루는 병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진 자연이 펼치는 주변의 풍광을 끌어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대루는 자연과 교감하는 공간이다.
4. 입교당과 동재 사이의 문을 나오면 계단 위에 三門(神門)이 있고, 그 안에 사당 尊德祀가 있다.
존덕사 향사는 4월과 10월 첫 丁日에 지낸다.
존덕사 동쪽에 있는 典祀聽은 제수를 준비하는 곳이다.
서쪽에 장판각이 있다
장판각 앞에 있는 두 그루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을 심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나무이다.
5. 옆으로도 들어가는 쪽문이 있는데, 옆에 서원을 관리하는 고지기가 사는 고직사이다.
https://chagov.blog.me/221580163348
2.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 민속마을)은 안동시 풍천면 낙동강이 크게 S자를 그리며 동 · 남 · 서 방향으로 하회를 감싸 안으며 흐르는 곳에 있다.
낙동강은 안동에 이르러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데,
하회에 이르면 동에서 서로, 충효당 앞에서 만송정까지는 남에서 북으로,
만송정을 지나면 서에서 동으로 흐름을 바꾼다.
북동쪽으로 굽이를 틀어 광덕동을 지나면 본디의 방향인 남서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물돌이동, 한자로 河回라 한다.
그 물길이 감싸는 중심에 있는 꽃뫼[花山] 자락의 양쪽 끝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있다.
강 건너 부용대에서 보면 자루가 달린 다리미 모양이다.
그 지형은 산태극 수태극, 또는 蓮花浮水形이라 한다.
<擇里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무릇 시냇가에 살 때에는 반드시 嶺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야 한다.
그러한 다음에야 평시에나 난세에나 모두 오랫동안 살기에 알맞다.
시냇가에 살 만한 곳으로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첫째로 삼는다.
……하회는 하나의 평평한 언덕이 황강 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향하여 있는데 서애의 고택이 있다.
황강물이 휘돌아 출렁이며 마을 앞에 모여들어 깊어진다.
水北山은 학가산에서 갈라져 와서 강가에 둘러있다. 모두 석벽이고 돌빛이 차분하면서 수려하여 험악한 모양이 전혀 없다.
그 위에 옥연정과 작은 암자가 바위 사이에 점점이 잇달았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덮여있어 참으로 절경이다.” (卜居總論, 山水)
“예안 · 안동 · 순흥 · 榮川 · 예천 등 고을은 二白(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여기가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다.
태백산 밑은 산이 평평하며 들이 연이어 명랑하고 수려하며 흰 모래와 단단한 토질이어서 氣色이 완연히 한양과 같다.
예안은 퇴계 이황의 고향이며 안동은 서애 류성룡의 고향이다.
고을 사람들이 이 두 분이 살던 곳에다 각각 사당을 짓고 제사한다.
이런 까닭으로 서로 가까운 이 다섯 고을에 사대부가 가장 많으며 모두 퇴계와 서애의 문하생의 자손이다.
의리를 밝히고 도학을 중히 여겨서 비록 외딴 마을 쇠잔한 동리라도 문득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며,
헤진 옷을 입고 항아리 창을 한 집에 살아도 도덕과 성명을 말한다.” (八道總論 慶尙道)
또 땅의 모양이 배가 물에 떠있는 것과 같다 하여 行舟形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을에 돌을 쌓으면 배에 돌을 싣는 것과 같다 하여 돌담을 쌓지 않는다.
우물을 파지 않고 하천에서 양수기로 끌어다 쓰는데,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을 내는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꽃내[花川]는 낙동강 상류이다.
화천 둘레에는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서북쪽에는 울창한 노송림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강류의 마을 쪽이 모래사장인데 반하여 건너편은 가파른 층암절벽이 이어져 있다.
그중에도 부용대의 경관이 가장 빼어나다.
이곳에 옥연정, 화천서당이 있으며,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나가는 즈음에는 겸암정과 상봉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 강의 최대 폭은 대략 300m이며 최대수심은 5m에 이른다.
하회마을로 들어가려면 부용대 기슭 옥연정사 아래에 있는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화천을 건너 만송정 끝에 닿는 뱃길로 가거나,
걸어서 가려면 광덕리 앞 강가로 나가 광덕교를 건너 멀리 돌아가야 한다.
옛날 류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김해 허씨, 광주 안씨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허씨는 화산 남쪽 기슭 거무실골,
뒤에 들어온 안씨는 북쪽 기슭 행개골에 자리잡았다.
인조 13년(1635)의 <동원록>에도 蔘姓이 들어있기는 하나 이미 류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류씨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 말 지방 관리였던 풍산 류씨 류종혜라는 사람이 후손들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좋은 터를 잡고자 꽃뫼[花山]에 올라 지형을 살폈다.
여러 차례 꽃뫼를 오르내리며 주위의 지세를 살핀 결과 꽃내가 감싸안고 흐르는 지금의 하회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물 가운데 연꽃이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달리 보면 바다를 항해하는 배 같았다.
그래서 이러한 명당의 형국을 연화부수형 또는 행주형이라 한다.
큰 인물이 나고 부귀영화를 누릴 명당이라 생각한 류종례는 河岸에다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일구기로 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려놓으면 밤새 집이 무너져 버렸다. 세 차례 집을 지었는데 번번이 밤을 새면 무너져 버렸다.
그때 한 도승이 나타나서 “여기에다 터를 잡고 살려면 만 명의 사람에게 적선을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류종례는 마을 입구에 원두막을 지어 놓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도 주고 노잣돈도 주며 3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선을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하여 기존 집단의 승인을 얻고 이 마을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중흥조 유운룡, 유성룡 형제를 비롯하여 큰 인물이 많이 나면서부터 중심이 류씨 쪽으로 옮긴다.
유운룡은 시조에서 13대의 종손이며 유성룡은 시손인데 모두 문중의 거봉이어서 이 두 계손들을 겸암파, 서애파로 부른다.
그래서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동족마을의 기반을 만든다.
허씨와 안씨는 점차 세력이 약해져서 18세기 이후 대부분 떠나고 류씨만 남는다.
풍산으로부터의 진입도로와 연결된 큰 강이 이 마을의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하는데,
이 마을길의 북쪽을 북촌, 그 남쪽을 남촌이라 한다.
마을 안에는 양진당과 충효당이, 북촌댁과 남촌댁이 마을 중심의 동서남북에 각각 자리잡고 있다.
현재 남북촌의 총 가구수는 대략 188가구이다. 사대부집인 기와집과 서민들이 살던 초가집 296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국보인 하회탈(제121호)과 <징비록>(제132호)을 비롯하여 양진당(제306호)과 충효당(제414호)등 보물 2점이 있다.
또 중요민속자료로는 겸암정사(제69호), 북촌댁(제84호), 원지정사(제85호), 빈연정사(제86호),
유시주가옥(제87호), 옥연정사(제88호), 남촌댁(제90호), 주일재(제91호) 등 모두 문화재 18점이 있다.
이 마을에서 유서 깊고 규모가 갖추어진 가옥으로서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들은 모두 풍산류씨의 소유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류운룡과 류성룡의 유적이 중추를 이루고 있다.
■ 旌閭碑는 마을 입구에 있다.
龜村 柳景深(1516~1571)의 어머니 영양 남씨와 그 며느리 聞昭 김씨를 열녀로 모시고 정려비를 세웠다.
龜村은 서애의 당숙이다. 龜村은 예조좌랑과 홍문과 수찬을 지냈다. 귀촌의 자손을 귀촌파라 한다.
■ 삼신당은 마을 중앙에 있는 600년쯤 된 느티나무이다.
화산 자락의 묘지와 논 사이에 국사당이 있다. 삼신당은 국사당과 함께 마을의 穴에 해당하는 곳이다.
국사당의 당신은 고려 말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몽진하여 이곳에서 휴식했던 고려 제31대 공민왕(1351∼1374 재위)으로 보인다.
화산 중턱에 서낭당이 있다.
서낭당의 당신은 탈을 깎던 허도령을 엿보던 처녀인데, 실제로 당시 17세였던 의성 김씨 처녀였다고 한다.
하회 별신굿은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
또 마을 동구의 큰고개와 작은 고개에 돌을 쌓고 성황당으로 모셔 골맥이로 삼았다.
이 당들에 정월 대보름과 4월 초파일에 동제를 지낸다.
■ 원지정사(중요민속자료 제85호)는 선조 6년(1573)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하여 하회에서 3년상을 치른 후 지었다.
선생이 학문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처음으로 지은 건물이다.
서재인 정사와 누각 2채로 되어 있는데, 모두 부용대를 마주하여 북향하고 있다.
누각 燕坐樓는 강물을 바라보기 위해 지은 집이다.
특히 대들보는 천지의 기를 모아 2층 다락의 두리기둥을 통해 건물에 맺히게 하듯 힘차기 꿈틀거린다.
‘遠志’는 ‘원대한 뜻’이란 뜻이다.
하회 사람들은 ‘원지’를 한약재로 쓰는 풀로 사람의 심기를 다스려 번민을 풀어주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원지산은 원지풀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 서쪽에 빈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6호)가 있다.
강에서 가장 가깝고 맞은편의 부용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가장 좋은 곳이다.
■ 양진당(보물 제306호)은 하회 류씨 대종댁으로 류성룡의 맏형 謙庵 柳雲龍(1539~1601)의 종가이다.
류운룡이 지은 집으로 조선 전기 주택이다.
마을의 중심, 곧 연꽃의 꽃술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입향조인 류종해가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 마을을 피해 처음 자리 잡은 곳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一자모양의 사랑채가 마주 보인다.
사랑채 대청 앞 정면에는 ‘立巖古宅’이란 한석봉이 쓴 편액이 걸려있다.
"입암"은 유운룡과 류성룡의 아버지인 류중영의 號이다.
대청 안 북쪽 벽에 양진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양진당이란 당호는 류운룡의 6대손 柳泳(1687~1761)의 호에서 가져왔다. 그는 양진당을 크게 보수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정남향집이다. 기단을 막돌로 상당히 높게 쌓아 권위를 과시했다.
안채는 사랑채와 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口자형 집으로 사랑채 바로 옆으로 난 중문을 통해서 들어간다.
양진당에는 사당이 두 개 있다.
12세 류중영(1515~1573)과 13세 류운룡을 불천위로 모시는데, 부자를 한 사당에 모실 수 없어 류운용을 별묘로 모셨다.
입암은 중종 14년(1541)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좌부승지, 황해도 관찰사, 승지, 경연관을 등을 지냈다.
■ 충효당(보물 제414호)은 류성룡의 종가로 소종택이다.
차남인 13세손 류성룡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이후 류성룡의 종손이 대대로 살고있는 집이다.
류성룡이 살 때는 작고 소박한 집이었다. 류성룡이 돌아간 뒤 일생을 청백하게 살다 삼간초가에서 별세한 일을 기리기 위해 여러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손자 拙齋 柳元之(1598~1674)가 내당을, 그의 아들 訥齋 柳宜河(1616~1689)가 사랑채와 외당을 지어 확장했다.
대문간채는 8대손 逸愚 柳相祚(1763~1838)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갑자기 닥칠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서둘러 지었다고 한다.
대문간채,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된 조선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집이다.
현판은 眉叟 許穆(1595~1682)이, 류성룡은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이란 뜻으로 써주었다.
충효당 扶安絲는 노인들이 마루를 오르내릴 때 잡는 끈이다.
正寢은 사당에서 신위를 모셔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나타낸다.
뒷마당에 유물각인 영모각이 있다.
영모각은 1973년에 짓기 시작하여 1976년에 개관했다.
안에는 <懲毖錄>(국보 제132호)과 그밖의 여러 문서들과 류성룡이 생전에 썼던 갑주, 가죽신, 갓끈 등(보물 제460호)도 전시되고 있다.
■ 영모각 앞에 만지송이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에 왔을 때 당연히 자기네들 관습대로 신을 신은 채 마루에 올랐다.
그러자 누군가가 ‘한국에서는 실내에서 신을 벗습니다’고 충고하자 신을 벗고 올랐다.
여왕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신을 벗는 것은 충효당 안채가 처음이라 한다.
여왕은 대문간채 앞에 구상나무 한 그루를 기념으로 심었다.
■ 澹然齋는 본디 명성황후 집안 여흥 이씨 가문 소속이었으나 1987년 류선우씨(류시원의 아버지)가 매입하여 개축했다.
1,500㎢의 대지에 ㄷ자 형태로 본건물과 대문 좌우로 넓은 잔디밭으로 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왔을 때 이곳에서 하회별신굿 중 탈놀이를 공연했다.
당호 담연재는 ‘맑고 편안한 마음으로 학문을 익히면 지혜와 뜻이 널리 퍼진다’라는 뜻으로 한학자 임창순과 함께 지었다고 한다.
■ 북촌댁(중요민속자료 제84호)은 북촌의 중심에 있다.
하회마을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북촌댁은 정조 21년(1797) 柳師春이 현재의 위치로 분가해 나와 작은 사랑과 좌우 익랑 등 수십 칸을 짓고 萬壽堂이라 했다.
그후 그의 아들 柳台佐(1763~1837)가 중수하여 和敬堂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북촌댁은 철종 13년(1862)에 柳道性(1823~1906)이 화경당의 규모를 크게 키워 증축한 것이다.
모두 54칸으로 하회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살림집이다.
口자형 몸체에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있는 본채와, 北村幽居와 須愼窩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현판이 걸린 별당과 행랑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촌유거 뒤에 하회마을을 감사고 도는 낙동강처럼 생긴 물돌이동소나무[下回松]가 있다. 300살이 넘는다고 한다.
■ 남촌댁(중요민속자료 제90호)은 남촌의 중심에 있다.
柳致睦(1771~1836)이 분가하면서 이곳에 지었다.
류치목은 류성룡의 장손 졸재 류원지의 6대손으로 순조 14년(1814)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우승지, 춘추관 수찬관 등을 지냈다. 류치목의 손자인 柳驥榮(1824~1880)이 고종 15년(1878)이 크게 확장했다.
1954년 불타고 문간채와 별당, 사당과 1980년에 사랑채 자리에 건립한 百栗園이란 정자가 있다.
사당 담장에 충효당의 편액 ‘忠孝’라는 문자를 새겨두었고, 별당채 담장에는 이름다운 여러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 主一齋(중요민속자료 제91호)는 충효당 동쪽에 있다.
류성룡의 증손 柳萬河가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었다고 한다.
뒤에 그의 아들 주일제 류후장이 증축하고 자신의 호로 당호를 삼았다.
안채, 사랑채, 중문간채, 곳간채, 사당채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口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 하회마을의 민가는 모두 초가집으로 班家에 속하는 하인들의 집이다. 민가는 마을 둘레에 위치하여 반가를 둘러싸고 있다.
남촌댁의 가랍 행랑채는 남촌댁 앞 왼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형적인 여칸(6칸) 겹집으로 평면은 아파트와 비슷하다. 여칸집은 짐승의 침입을 막고 겨울 추위에 대비하기 위한 집이다.
집 안에 모든 시설을 두어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다.
가운데 칸 앞은 봉당, 뒤는 마루, 오른쪽 칸은 앞뒤로 방, 왼쪽 앞칸은 부엌, 뒤에는 방이 있다. 가랍집이기 때문에 외양간이 없다.
행랑채는 까치구멍집이다.
까치구멍은 집안의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고 환기가 되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
또 행랑채에 새불막이가 있다.
새불막이는 지붕 처마와 서까래 위에 올린 평고대 사이를 흙으로 막아 새가 지붕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 장치이다.
■ 만송정숲(천연기념물 제473호)은 마을 서북쪽 끝에 있다.
원지산에서 부용대로 이어지는 경관과 마을 사이 공간이 허한 것을 비보하기 위한 수구막이로 솔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防水災, 防沙의 기능을 한다.
류운룡이 지은 만송정은 1905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만송정이란 소나무 만 그루가 있는 숲속의 정자란 뜻이다.
■ 芙蓉臺는 하회마을에서 강을 건넌 곳에 있다. 일월산에서 뻗은 지맥에 이어져 있다. ‘부용’은 곧 연꽃이이다.
‘부용대’란 연꽃을 내려다보는 대란 뜻이다. 부용대에서 보면 화회마을은 물위로 떠오르는 한 송이 연꽃으로 보인다.
부용대는 양반문화를 펼치는 현장이다. 이곳이서 하회줄불놀이가 시작된다.
■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는 원지정사와 함께 류성룡이 생전에 지은 건물이다.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하여 지은 정자이다. 1576년에 시작하여 1586년에 완성했다.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름은 옥연서당이다.
옥연은 정사 남쪽 아래로 흐르는 물이 옥빛과 같이 맑고 푸르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류성룡이 낙향하여 머물러 있을 때 이곳에서 <징비록>을 지었다.
부용대 동쪽 바위 곳곳에 선생이 직접 이름을 새긴 글씨들이 있다.
■ 화천서원은 부용대 동쪽 기슭에 있다.
정조 10년(1786) 文敬公 겸암 류운룡을 받들기 위해 지방 유림에서 사당 景德祠를 세웠다.
1802년 강당 崇敎堂을 짓고, 1822년 문루 地山樓를 지으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본디 부용대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1934년과 1936년의 대홍수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종 5년(1869) 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강당과 살림집인 廚所만 남기고 헐리게 되어,
한동안 화천서당으로 불려오다가 1994년 가을 다시 서원이 되었다.
■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는 부용대 서쪽 끝 절벽 위에 있다.
류운룡이 명종 22년(1567)에 세워 도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현판 중 앞면의 것은 퇴계가 썼다.
서애는 그의 형님 겸암을 그리워하며 겸암정사에서 이렇게 읊었다.
西厓先生 爲伯氏謙巖先生 遺亭韻
我兄遺亭館 우리 형님 정자 지어
謙巖有舊名 겸암이라 오랜 이름 붙였네
竹影淨臨階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슬어 내렸고
梅花開滿庭 매화는 뜰 가득 피어 있구나
遊從芳草合 발끝에 향기로운 풀 냄새 모이고
仙路自雲生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는데
愴憶空垂淚 그리움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떨어지니
江流夜有聲 강물도 덩달아 흐느끼며 밤새도록 흐르네
■ 하회줄불놀이는 매년 7월 16일 달 밝은 밤 만송정과 부용대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하고 숯 봉지를 매달아 불을 붙여 화려하게 장식하고 꽃내에 배를 띄우고 풍악을 잡히며 시를 지어 읊조린다.
풍산류씨 구성원들과 그들과 관계되는 문사들이 참가한다.
강물에 불꽃을 띄워 밝히고 배를 타고 즐기는 양반 놀이이다.
시를 완성하여 읊조릴 때마다 배 안에서 ‘낙화야!’ 하고 외치면 부용대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나뭇단에 불을 붙여 절벽 아래로 던지므로 불꽃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이때 꽃내 위쪽에서는 달걀불이라 하여 달걀껍질에 기름불을 붙여 강물에 띄우면 불꽃이 물에 반사되어 강물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흘러간다.
최근에 복원하여 9월 마지막 토요일부터 10월 첫 토요일까지 하회줄불놀이를 재연한다.
■ 별신굿(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은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을제이다. 하회리 · 수동리 · 마령리에서 거행되었던 별신굿이다.
별신굿은 3년 · 5년 · 10년마다 하거나 또는 서낭신의 신탁이 있을 때 치른다.
별신굿은 음력 정초에서 대보름 사이에 벌어진다.
먼저 신주가 서낭신에게 신의 뜻을 물어 별신굿을 할 것인가를 정한다.
굿이 정해지면 마을 양반들에게 알리고 부정이 없는 목수에게 내림대와 서낭대를 만들게 한다.
섣달 그믐날 각성받이 동민과 신주가 서낭당에 모여 신주의 당내림으로 15광대를 결정하고 동사에서 별신굿이 끝나는 날까지 합숙한다.
낮에는 연습을 하거나 초청받은 집에서 놀기도 한다.
별신굿은 당내림, 탈놀이, 지신밟기, 모의혼례, 서낭제, 허천거리굿의 차례로 진행한다.
이중 탈놀이는 제의의 일부로 서낭신을 즐겁게 하는 행사이다.
탈놀이는 무동마당, 양반 · 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 등으로 복원하어 전수하고 있다.
1928년까지 마을에서 벌이던 탈놀이는 일제가 ‘민족적 색체가 있다’고 하여 금지하는 바람에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다.
최근 젊은 시절 탈놀이에 참가한 적이 있는 이의 고증으로 복원하였다.
탈은 가면이다.
또 ‘탈이 났다’ 할 때는 ‘질병, 사고, 고장’을 뜻한다. 그러므로 탈놀이는 탈 곧 가면을 쓰고 하는 가면극으로 사회적인 탈이라 할 수 있다.
부조리한 제도와 부패한 사실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전통 연극의 한 갈래이다.
양반: 나는 士大夫의 자손일세.
선비: 뭣이 사대부? 나는 八大夫의 자손일세.
양반: 팔대부는 또 뭐야?
선비: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선비: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네.
양반: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을 다 읽었네.
선비: 도대체 팔서육경이 어디 있으며 대관절 육경은 뭐야?
초랭이: 나도 아는 육경 그것도 몰라요? 팔만대장경, 중의 바래경, 봉사 안경, 약국의 길경, 처녀의 월경, 머슴 쇄경. (양반 · 선비마당)
양반과 선비가 서로 자기가 신분이 높다고 다투다가 나중에는 서로 학식이 높다고 다투면서 팔대부니 팔서육경이니 억지를 쓴다.
양반과 선비는 이런 억지로 구경꾼들 앞에서 망신당함로써 둘다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하회탈놀이는 지배층의 허위와 위선을 폭로하고 풍자한다.
※ 3, 4월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5~10월엔 매주 토, 일요일 오후 3시에마을입구 구 관리사무소 맞은편 별신굿 탈놀이 공연을 볼 수 있다.
■ 하회탈(국보 제121호)은 양반 · 선비 · 할미 · 초랭이 · 백정 · 각시 · 부네 · 먹중 · 이메 · 주지 2개(암주지, 숫주지) 등 10종 11개가 전한다.
본디 총각 · 별채 · 떡다리 탈이 있어 모두 13종이었다고 하는데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탈은 고려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병산탈인 대감 · 양반탈 등 2개를 더하여 모두 13점이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병산탈의 제작자와 제작연대는 미상이다.
각시탈
고려 중엽 허도령이란 총각이 탈을 깎느라고 목욕재계하고 사람들에게,
탈이 완성될 때까지 절대로 방문을 열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허도령을 짝사랑하던 마을의 처녀가 탈이 거의 완성되었을 즈음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엿보려고 방문을 살짝 열었더니,
허도령은 그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때 허도령이 만들다 만 이메탈은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 전승되고 있다.
방안을 엿본 처녀도 번민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를 올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탈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하회탈은 눈이 깊고 코와 광대뼈가 도드라져 강항 입체감을 보인다.
다른 고장의 탈처럼 원색을 칠하지 않고 인물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간색을 거듭 칠하여 색깔의 깊은 맛을 살리는 동시에 극중 역할에 따라 인물의 성격을 살렸다.
탈을 쓰고 상하좌우로 움직이는데 따라 얼굴표정이 바뀐다.
특히 턱을 고정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여 탈놀이 하는 사람이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따라 적절히 표정이 바뀌는 관계로 마치 살아있는 얼굴처럼 생동감이 있어 세계적인 탈로 주목받고 있다.
■ 하회동에 탈박물관이 있다.
경주시와 안동시, 경북도는 2008년 3월 이들 마을의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재 방침을 확정했으며,
2010년 1월에는 문화재청을 통해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어 2월과 5월에는 국내외 전문가가 참여하는 예비실사가 2차례 진행됐고,
같은해 9월에 세계유산위원회의 현지실사가 이루어졌다.
26일부터 8월 3일까지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하였다.
하회마을과 양등마을의 심사는 현지 시간으로 30일 오전 10시부터 열린 회의의 마지막 의제로 채택돼 8월 1일에 등재가 결정되었다.
"건축문화와 생활양식을 잘 보전하였다"해서.
이로써 우리나라는 2010년 8월 1일 현재 세계유산 10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여왕의 생일잔치
● 하회에서의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생일잔치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999년 4월 21일 오전 11시 20분 하회마을 도착했다.
충효당을 거쳐 담연재로 가서 의자에 앉자 꾕과리 소리를 시작으로 하회별신굿 탈놀이 양반선비마당을 10여분 진행했다.
여왕이 공연자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앞뜰에 생일상을 차렸다.
여왕과 생일이 같은 주민 4명과 유기잔에 담긴 청주 축배잔을 높이 들었고 다 비웠다.
전통음식 연구회장 조옥화(당시 78세)씨가 마련한 생일 큰상은 47가지 음식과 ‘떡꽃화분’과 봉황문양으로 만든 문어오림이 올랐다.
여왕은 먹지는 않았다.
안동시는 당초 고종황제의 양모였던 조대비의 생일상과 같은 수준으로 72가지에다가 고임 37cm로 준비할 예정이었으나,
영국 왕실 요청에 따라 47가지에 고임은 20cm로 했다.
여왕은 경상북도가 재현한 순종황후 화관과 담연재에서 준비한 오방색 복주머니를 선물로 받은 뒤 20여분 동안 머문 뒤 하회를 떠났다.
12시 45분쯤 봉정사에 도착하였다.
극락전 앞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돌탑에 얹으며 “돌탑을 쌓았으니 복을 받겠다”하며 웃었다.
절에서 미리 마련한 방명록에 미리 쓰여진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는다."라는 글귀 아래 Elizabeth라 서명하고,
청기와에도 흰색 글씨로 이름을 적었다.
12시 20분경 농산물 시장에 도착했다.
4월 22일 13시 15분 한국을 떠났다.
1998년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EM)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이 여왕을 초청했다.
여왕은 1년에 2번 해외 공식방문을 하는데, 한번은 연방국, 또 한번은 비연방국이다.
여왕은 외국에 나가면 여러 나라를 방문하지만 이번에는 한국 한 나라만 방문했다.
여왕의 방문지로 부산, 대구, 광주, 경주, 대전, 제주 등이 후보지로 고려되었으나 한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기 위한 것과 교통상의 이유.
IMF를 딛고 회복기에 들어선 것 등의 이유로 안동과, 인사동이 결정되었다 한다.
* 여왕의 여로
여왕은 예천 공항에 내려~ 하회마을~ 봉정사~ 예천 공항의 순서로 움직였다.
이 108km를 퀸로드로 개발하여, 충효당 뒤뜰에 심은 20년 구상나무와 47가지 음식상을 모형으로 만들어 관광객에게 보이고 사진도 찍게한다. 또 봉정사 방문록 표구 전시, 극락전에 쌓아 올린 돌탑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했다.
여왕에게 선물로 준 화관과 족자, 합죽선, 하회탈 등을 상품으로 판매한다. 헛제사밥과 안동식혜를 관광음식으로 개발한다.
*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 Windsor)이다.
1926년 4월 21일 런던 출생으로 할아버지 조지 5세가 왕이었다.
아버지 조지 6세는 둘째 왕자이다. 조지 5세가 서거한 뒤 왕위는 장남인 에드워드 8세에게 넘어갔지만 그가 미국 출신 이혼녀 윌리스 심슨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자. 아버지 조지 6세가 1936년 왕위를 이었다.
Queen Eizabeth 2/ Yousuf Karsh가 1951년에 찍었다.
1947년 그리스 왕자 필립 마운트 버튼 해군 대위와 결혼했고, 1952년 왕위에 올랐다.
1980년대 세계 외교와 사교계의 신데렐라로 등장했다.
대영제국 식민지 지역을 순탄하게 영연방국가로 바꾸는데 역량 발휘하였다.
영연방국의 인구는 17억(세계 인구의 1/4), 52개국이다. 이 가운데 16개 나라는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 원수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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