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골
탑골 입구에서 서북쪽으로 악 500m 돌아 들어간 곳이다.
계곡 입구 산기슭에 두 곳의 절터가 있지만, 주춧돌, 기왓장 등이 흩어져 있을 뿐 별다른 유적은 없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부처골 감실 석불좌상이 있다.
이 부근에서는 삼화령 석조미륵삼존상을 연상하게 하는 여래상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현좌에 왼손은 밑을 향하고, 오른손은 위로 들고있는 여원시무외인이다.
감실의 불상과 거의 같은 시대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 부처골 감실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 남산의 동쪽 기슭 인왕리
높이 3m, 너비 4m의 남쪽으로 향한 바위에,
높이 1.7m, 너비 1.2m, 깊이 60cm의 홍예형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고부조로 불상을 새겼다.
불상의 높이는 1.4m이다.
약간 숙인 얼굴에 두 손은 소매 속에 넣고 다소곳한 자세로 조용히 앉아있다.
둥근 얼굴은 단아하여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얼굴은 둥글고 양감도 적당한데, 지그시 감은 눈과 오목하게 파인 입가의 가득한 미소는 은은하면서도 고졸하다.
부드러운 얼굴의 표정과는 달리 체구는 어깨가 넓어 강직한 인상을 풍긴다.
통견의 법의는 몸의 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양 어깨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모이는 쐐기형의 선각 옷주름은 신체의 굴곡과 어울리게 유연하게 처리되었고, 가슴 양쪽의 굵직한 골주름이 상체를 경계짓고 있다.
상체에 비해 무릎은 낮고 수평적이며 오른발은 유난히 크게 과장되었는데, 이러한 비사실적인 수법은 이 불상의 다소곳한 모습과 함께 고졸한 인상을 더해준다.
무릎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은 대좌 밑으로 흘러내려 상현좌를 이루었는데,
옷주름은 2단으로 Ω 모양을 이루었지만 번잡하지 않다. 의문의 조각수법은 매우 세련되었다.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두 손을 가슴에 겹쳐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자세, 의습, 특히 짧으면서도 상징적으로 전개되는 현상의 모습은 7c 말의 형식이다. 이 불상에 서린 특이한 적막감은 독특하며, 이러한 6C 중엽경의 일련의 신라석불이 보여주는 불가사의한 정신성이 조각기술의 발전과 함께 화강암의 구석구석에 스며들면서 8c 석굴암 조각으로 이어진다.
나이 든 처녀의 모습이다. 고고한 기품을 갖추고, 인자함과 넉넉함을 보인다. 30~ 40대 초반 여인의 모습니다.
선덕 진덕 재위시에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선덕여왕은 52~ 53세경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작은 육계가 솟았는데 마치 아주머니가 머리를 틀어올린 것 같다.
머리는 귀밑까지 덮여 있으며, 육계는 낮고 넓은 편이다.
감실 내의 광배는 생략되었다. 어깨와 감실벽에 물감이 남아있다. 옛날에는 감실을 붉은 연꽃으로 장식하였을 것이다.
이 불상은 팔짱을 끼고 있는데, 불상의 수인에는 이런 것이 없다. 중국 고대 불상에서 평남 원오리 불상, 백제의 납석제 불상으로 전해진 선정인의 모습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군수리 절터 출토 납석제여래좌상
팔짱을 낀 수인, 옷자락이 대좌를 덮은 상현좌 양식으로 보아 6C 말에서 7C 초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감실불은 7C 초부터 나타난다.
현재 남산의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불상은 조각의 기법으로 보아 단석산의 자연석굴과 석굴암 인조석굴의 중간단계로 보여진다.
다소곳한 상의 모습과 함께 몸의 굴곡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등 이 불상은 중국 수나라 때의 조상양식을 가미한 고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이다.
부처바위 마애조상군
남산의 북쪽 기슭에 신라의 궁성 반월성이 있었다. 반월성 앞으로 南川이 흐르고 있다.
남천을 거슬러 1.6km쯤 남쪽으로 가면, 탑골에서 흘러오는 개울이 남천으로 드는 곳에 탑골마을이 있다,
탑골마을에서 탑골 개울을 거슬러 150m쯤 들어가면 불무사란 현판을 건 옥룡암이 있다.
불무사 대웅전 뒤쪽의 큰 바위에 다양한 조각들이 있다.
이 바위를 부처바위라 한다.
탑골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란 절이 있던 곳이다.
부처바위에는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탑골마애조상군이 있다.
이 바위는 동, 서, 남, 북의 4면을 이루고 있는데,
4면에 여래상, 보살상, 나한상, 탑, 사자 등 30여점에 달하는 조각을 새겨 4방 4불정토를 나타냈다.
바위 하나에 불교의 모든 세계 - 사방정토, 속인들의 세계 - 를 새겼다.
이 부처바위에는 부처를 모시는 법당이 따로 없고, 이 바위더미가 바로 법당이다.
이것은 자연신앙(바위신앙)과 불교의 융합에 의한 것이다.
우주의 핵심인 비로자나불[大日如來]의 빛이 온 세상에 비취면 그 빛이 비취는 곳마다 부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온 누리는 華麗莊嚴한 부처의 세계가 된다. 이를 줄여서 華嚴世界라 한다.
<금광명경>에서 화엄세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의 빛이 동방으로 비취면, 阿閦如來가 다스리는 香積세계가,
서쪽에 비취면, 阿彌陀如來가 다스리는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남쪽에 비취면, 寶生如來가 다스리는 歡喜세계가,
북쪽에 비취면, 微妙聲如來가 다스리는 蓮華세계가 이루어지니, 온 세상은 무수한 부처의 나라로 장엄된다.
비로자나불이 비추어 이루어 놓은 모든 불보살과 신장들을 질서있게 배치한 것을 蔓多羅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만다라를 四方佛로 표현한다.
이 바위 속에 비로자나불이 계신다.
비로자나불의 빛이 탑골의 이 바위 사방에 비추어, 四方四佛淨土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화엄세계이다.
■ 부처바위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1. 북면은 바위의 前面으로 가장 높다. 높이 10m, 폭은 5.7m의 절벽바위이다.
북면은 영산정토를 나타내고 있다. 영산정토는 석가모니가 여러 보살들과 나한들에게 설법하는 곳이다.
중앙에는 연꽃대좌 위에 석가모니불이 앉아 있고, 머리 위에는 천개가 있다.
여래상 양쪽으로 목탑이 늘어 서있으며, 그 위로 2개의 비천이 나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목탑 앞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버티고 있다.
북면 모사도
신라시대의 천개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없다.
다만 감은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함 뚜껑과 송림사 전탑에서 발견된 순금 사리함의 뚜껑이 천개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이곳 부처바위 마애조상군의 천개와 비슷하다.
또 일본의 법륭사의 천개도 이런 모양인데 실물로 잘 보존되어 있다.
1-1. 두 탑 사이 하늘에 떠있는 큰 연꽃송이 위에 여래상이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표정은 밝고 자세는 단정하다.
수인은 선정인 같은데 손이 옷자락에 가리어 확인할 수 없다.
둥근 두광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꽃잎들이 햇살처럼 방사선으로 퍼져 부처의 얼굴에 생기가 넘친다.
여래상의 머리 위에는 화려한 天蓋가 떠 있다. 천개는 인도같은 더운 나라에서는 빛을 가리기 위한 양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의 신분을 돋보이게 하는데 쓰였다.
둥근 양산 둘레에는 마름모로 된 줄무늬가 줄지어 그려져 있는데 보배 구슬일 것이다. 양산 꼭대기와 가에는 불상의 광배 모양으로 된 장식이 둘러가며 서 있다. 밑으로 오각형으로 접은 헝겁들이 수실처럼 드리워 있고, 그 아래로 넓은 포장이 쳐 있는데 양쪽으로 갈라서 양 가에 올려다 묶었다. 이 천개로 미루어 보면 천개 위의 장식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천녀들의 광배일 것이다.
1-2. 천개 위에 두 飛天이 있다. 두 팔을 벌리고 천의를 날리면서 구름을 헤치고 여래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천녀들은 하늘을 날면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세계를 찬미하는 모습이다.
비천은 맑고 깨끗한 하늘을 인격화 한 것이다.
1-3. 동탑은 지상 2m 되는 곳에 2m 높이의 2중기단 위에 세운 9층 기와집 모양이다.
첫 옥신은 높은 편이나 2층부터 높이를 줄여 안정감을 나타내었다. 추녀의 너비도 위로 올라 갈수록 차츰 좁아지다가 3.08m 되는 곳에서 9층 지붕이 삼각형으로 끝맺었다. 층층마다 추녀 네 귀에 풍령을 달았다.
9층 지붕 위에는 높이 1.77m의 상륜부가 솟아있다. 노반, 복발, 앙화 위에 수많은 풍경이 달린 다섯 층의 보륜이 찰주에 꽂혀있다. 그 위에 수연, 용차, 보주가 둥근 구슬로 새겨져 있다.
서탑은 동탑으로부터 1.68m 거리에 있다. 동탑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자리잡았고, 너비 1.55m 되는 2중기단 위에 7층으로 솟아있다. 모양과 수법이 동탑과 같다. 기단에서 7층 지붕까지의 높이는 2.3m, 상륜부의 높이가 1.8m이다.
이 쌍탑은 옥신마다 두 개씩 창문을 새겼다. 문이 열린 쪽을 더 깊이 파내어 입체감을 강조했다. 얇은 조각이지만 힘차고 굳건해 보인다.
실물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라시대의 목탑형식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이 탑은 황룡사 구층탑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1-4. 동쪽 사자상은 오른발로 땅을 밟고 왼발을 들어올려 싸우려는 자세인데 꼬리가 세 갈래로 날리고 있다. 천마총 출토 천마도의 말꼬리와 비슷하다. 목에는 털이 없어 암컷으로 보인다. 입을 벌리고 있다.
서쪽 사자상은 왼발로 땅을 딛고 오른발을 높이 들었다. 꼬리가 여러 갈래로 날리고 있다. 목에는 털이 많으므로 수컷인 것 같고, 입을 다물고 있다.
사자는 불국토를 지키는 성스러운 짐승이다.
입을 벌린 사자를 阿사자, 입을 다문 사자를 吽사자라 한다. 불상이나 탑 주위에 아 · 훔 두 사자를 배치하는 것은 열린 세계와 닫힌 세계,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극락과 지옥 곧 모든 세계를 부처님이 다스린다는 뜻이다.
서면 여래상
2. 서면은 약사여래불의 유리광 정토이다.
경전대로라면 향적세계이겠지만 우리나라 사방불에서는 동쪽에 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 바위면은 서쪽이지만 왼쪽이고, 왼쪽은 청룡, 곧 동쪽이 된다. 어느 방향으로 섰을 때나 왼쪽은 동쪽으로 오른쪽은 서쪽으로 삼는다.
이 바위면은 북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동서가 바뀐 것이다.
바위면이 경사진 땅에 있으므로 북쪽은 높이가 10m나 되고, 남쪽은 산허리이므로 높이가 3m 정도 된다.
바위면은 너비가 약 4m로 공간이 매우 좁다. 그러므로 여래상 하나, 비천상 하나가 있다.
오른편에는 능수버들, 왼편에 대나무가 뻗어오른 사이의 그늘 아래 여래상이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있고,
비천상이 피리를 불며 날고 있다.
2-1. 여래상의 높이는 1.44m, 무릎 너비는 1.14m이다. 얼굴은 네모에 가깝고, 머리에 작은 육계가 솟아 있다. 귀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머리에 비해 조금 갸름한 몸체는 자세가 반듯하며 두 무릎은 연꽃 위에 풍성하게 평행으로 놓여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손은 가려서 잘 보이지 않으나 선정인으로 보인다.
머리 뒤의 두광에는 가운데 큰 연꽃을 새겼고, 연꽃 가에는 구슬을 늘어놓았다.
테두리에는 불길을 새겼다. 불길이 위에서 한곳에 모여 보주형이 되었다.
3. 남면은 바위가 흙으로 덮인 언덕 위에 있다. 높이가 3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바위면의 너비는 6.8m가 된다. 3등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장 넓은 동쪽면은 3.5m, 중간면은 2.5m, 서쪽면이 80cm이다.
3-1-1. 동쪽 바위면에 남면의 주불인 삼존불상을 새겼다. 이 삼존은 남방 환희세계의 보생여래로 짐작된다.
비바람으로 마멸이 심하여 부처의 얼굴이나 옷주름을 알기 힘들다.
가운데의 본존불은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았다. 몸체는 단정하고 두 무릎은 넓게 놓여 평안하게 보인다. 통견에 촉지항마인이다. 얼굴은 아주 밝은 표정이다. 두광에 햇살처럼 연꽃을 그려 얼굴에 생기를 더해준다.
남면의 주불인 삼존불
옷자락의 복잡한 주름이 연화대좌를 덮고있는 상현좌이고 옷자락 밑의 연꽃이 보인다. 두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사깃 사이로 승기지가 비스듬히 나타나 있고, 군삼을 동여맨 끈 매듭이 부채살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땅에서 솟아오른 줄기 위에 핀 연꽃대좌 위에 합장을 하고 본존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몸이 여래 쪽으로 기울어져 여래에게 응석을 부리는 것 같다. 오른쪽 협시보살 역시 연꽃 위에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본존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삼존상은 모두 입상이거나, 본존은 앉고 보살은 서는데 여기에는 삼존이 모두 앉아있다. 이 분위기는 화목하고 다정한 가족을 연상하게 한다. 부처를 부모 모시듯 섬기던 신라인의 신앙의 표현이다.
삼존불의 왼쪽에는 한 그루 능수버들이 서 있다.
3-1-2. 남면 삼존불 앞에 큰 바위들이 널려 있는데, 그 중 가운데 바위 모서리에 나한상이 있다.
갸름한 얼굴에 점잖은 모습인데 손은 옷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평안히 앉아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3-2-1. 불상 앞에 입체의 여래입상(남면 바라보아 왼쪽)이 서있다.
한 면이 1.12m 되는 4각의 대석 위에 높이 2.1m의 여래상이다. 대석에는 발만 새겼고, 발목 이상은 한 개의 돌로 되어있다.
두광과 얼굴은 많이 파괴되었으나 표정이 풍부한 둥근 얼굴임을 알 수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어깨는 넓다.
가슴은 풍성하고 허리는 가늘어 여자같이 보인다.
가는 허리에서 엉덩이로 흐르는 선은 양감을 더하여 고운 곡면으로 기둥같은 다리에 연결된다.
통견으로 입은 가사의 옷주름은 이 상의 입체감을 돋보이게 한다. 배 앞에서 가로 그어진 석 줄의 옷주름은 복부의 형태를 꾸미면서 자연스럽게 두 다리로 흘러내려 허벅다리와 무릎의 형태를 암시한다.
왼손은 배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손바닥을 붙인 채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
좌상에만 나타나는 촉지항마인으로 서있는 모습이다.
이 불상은 조각품으로서도 우수하지만 부처바위 전체의 공간미에 주는 효과는 매우 크다.
부처바위의 조각들은 얕은 돋을새김으로 되어있어, 바위 전체가 웃음으로 차 있을 뿐 힘이 없다. 여기에 굳세고 풍성한 입체상을 세워 바위면에 생기를 돋우어 전체 분위기를 활기차게 하였다.
3-2-2. 서쪽 바위 면(입체 여래상 뒤)은 높이 2.8m, 너비 2.5m 되는 절벽 바위이다.
중앙 아랫부분에 얕은 감실을 파고 매우 낮은 부조로 좌상을 새겼다. 작은 몸체는 단정히 앉아있다.
얼굴은 달걀 모양으로 갸름하다.
두광도, 연화대좌도 없는데 머리 위에 작은 육계가 있는 듯하여 선정에 든 스님상인지 여래상인지 그 성격을 알기 어렵다.
3-2-3. 이 여래상에서 정면으로 12m 밖에 석등을 세웠던 자리가 있다. 지름 약 70cm의 자연석 위에 지름 30cm, 깊이 10cm의 둥근 홈이 패여있다. 이 구멍은 간주석을 세웠던 자리이다. 자연석을 하대석으로 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였다.
3-2-4. 이 석등에서 서쪽 산기슭까지의 넓은 터에는 강당, 승방, 식당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근년까지도 많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3-2-5. 석등 바로 동쪽에 삼층석탑이 있다. 이곳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77년에 세운 것이다. 높이는 4.5m이다.
남산의 다른 탑들처럼 하층기단이 없다. 바위나 산을 하층기단을 삼아 탑을 세워,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꾀하였다.
2단의 굄돌 위에 단층기단을 쌓았고, 면석, 덮개돌은 모두 4개로 되어있다. 지붕돌받침이 3단이다.
낙수면 모서리에는 기와집 추녀마루가 새겨져 있고 끝 부분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있다.
2층, 3층은 몸돌의 높이를 반이상 줄여 전체의 비례가 적당하여 안정감이 있다. 다른 신라탑보다 지붕돌 처마가 좁은 편이어서 안정감보다 상승감이 더 강하게 풍긴다. 이런 점은 백제탑 같은 느낌이 든다. 솜씨가 둔하다. 신라 말기의 것으로 보인다.
이 탑으로 인하여 탑골이라 부른다. 옥룡암 정원에 탑재들과 난간돌들을 보면 이 유적에는 3개 이상의 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동면은 북쪽의 높이가 10m인데 비해 산비탈인 남쪽의 높이는 3m쯤 된다.
이 바위면은 너비가 13m로 부처바위에서 가장 넓다.
바위면이 세 면으로 갈라져 있어 북쪽부터 첫째면, 둘째면, 셋째면으로 부른다.
4-1. 동쪽의 첫째면은 높이 10m, 너비 13m 정도 된다.
화려한 극락세계의 환상이 표현되어 있다. 동쪽이지만 오른쪽 바위면이기 때문에 서쪽이다.
4-1-1. 중앙에 아미타 삼존불, 아래는 염불하는 스님, 하늘에는 여섯 비천들이 날고 있다.
본존 아미타불은, 풍성한 두 무릎이 넓고 큰 연꽃 위에 편안하게 앉아있다. 두 어깨의 선이 조용히 경사를 이루면서 두 팔로 연결되어 삼각형에 가까운 몸체를 이루었다. 두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사깃 사이로 승기지가 비스듬히 보이고 군삼 끈이 부채살처럼 보인다.
두 손은 선정인을 표시한 것 같은데 팔소매로 넘어온 가사자락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다.
긴장된 곳은 전혀 없고 부드럽고 조용하다.
둥근 머리 위에 나지막한 육계가 솟아있고 정면으로 가르마를 탄 머리카락들이 양 귀 언저리에서 곱게 처리되었다.
초승달 같이 가늘게 휘어진 눈썹, 갸름한 코, 하현달 같이 가늘게 새겨진 두눈의 윗시울은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두 볼에는 광대뼈가 도드라져 화사한 웃음이 감돌고 있다.
동면의 삼존불
본존 왼쪽의 관세음보살도 작은 연꽃 위에 앉아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썼고, 두 어깨에 천의가 걸려있다. 그 자락이 어깨 위에 날리고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합장하고 얼굴은 본존 쪽으로 돌렸다. 머리 뒤에는 연꽃을 새긴 두광이 둥글게 나타나 있다.
도드라지게 표현해야할 뺨을 도리어 파내었다. 그곳에 햇빛이 비취면 부드러운 살결이 돋아나와 보이게 하였다. 왼쪽 무릎 아래 꽃 접시 같은 것이 보인다.
오른쪽 보살은 대세지보살이겠는데 풍화로 인해 지금은 형체가 없다. 다만 대좌의 연꽃 일부와 천의 자락만 조금 남아있다.
4-1-2. 삼존불 둘레와 머리 위에 여섯 비천상이 있다. 꽃 접시를 들고 꽃을 뿌리거나, 합장을 하고 있다.
비천은 하늘이 지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때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삼존불 왼쪽에서 부처님을 향하여 날아오는 비천은 연꽃 송이를 들고 손으로 꽃잎을 뿌리면서 날아온다.
그 위의 비천도 같은 방향에서 날아오고 있다. 두 손에 그릇을 받들었는데 꽃 접시인지 향로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 다음의 비천은 정면으로 내려오고 있다.
머리를 조금 기울이고 주먹쥔 왼손을 다시 오른손으로 감싸쥐고 턱 밑을 괴고 있어 무언가 간절한 마음을 나타낸 것 같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날아오는 비천은 두 개의 고리로 묶은 머리에 둥근 귀걸이가 보인다. 두 손은 합장을 하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합장하고 내려오는 비천상은 속도감이 매우 강하다. 오른쪽으로 길게 휘날리는 천의 자락으로 인하여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이 비천의 손 밑에 날개를 편 듯한 것이 보이는데 가릉빈가인 것 같다.
4-1-3. 북쪽 아래(오른쪽) 모퉁이에, 모난 방석에 꿇어앉아 향로 자루를 받들어 올리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자세로 공양하는 스님상이 있다.
4-2. 둘째면은 높이 6m, 너비 5.1m의 바위면에 보리수, 사라수(?)의 두 그루 나무 아래 선정에 든 스님상이 있다.
얼굴은 갸름하다. 단정히 앉아있다. 인도에 가서 구법한 어느 스님인지,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든 싯다르타인지는 알 수 없다.
한쪽 나무는 다섯 갈래의 활엽수이고, 다른 쪽은 잎이 넓은 나무이다. 모두 우리나라의 나무는 아닌 듯하다.
4-3. 셋째면은 높이 4m, 너비 2m의 기둥바위이다.
4-3-1. 북쪽을 향한 바위면에 명상에 잠긴 스님의 좌상이 있다.
머리는 동쪽으로 돌리고 멀리 내다본다. 두 손은 옷소매에 가린 채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4-3-2. 이 돌기둥 남면에 동향으로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다.
정면으로 서서 허리를 왼쪽으로 내민 굴곡자세인데 오른손에 키만큼 큰 금강저를 들고있다.
눈은 크게 뜨고 입은 굳게 다물고 동쪽을 노려보고 있다.
금강역사상 탁본
맞은편에도 기둥바위가 있어, 입을 벌린 금강역사가 있었을 터인데 이 바위는 지금 찾을 수 없다.
낮은 북쪽에서 높은 남쪽을 향해 자연석 계단으로 오르면 셋째면 기둥바위가 화엄불국으로 들어가는 돌문이다.
이 돌문이 가람의 정문이다. 이 돌기둥 남면에 불국토를 지키는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3층석탑과 입체 여래입상이 있다.
5-1. 이 유적들의 제작 연대를,
윤경렬은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패한(668년) 후부터 사천왕사를 창건(679년)하기 전까지의 10년 사이로 보았다.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 불지사, 1993.
강우방은 통일기 후반기인 9C경으로 보았다.
“이곳 불상의 양식을 통관하면 통일성기의 양식이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순 소박한 彫塑性이 전혀 결여되어 있을뿐더러 고졸의 미와도 거리가 멀다. 북면의 쌍탑제, 통일기 후반 양식의 삼층석탑, 불상들의 윤곽선 강조, 평면부조에 추상적 옷주름의 선적 처리, 자유분방한 회화적 구성과 도상의 배치, 많은 부분의 치졸한 조각수법은 통일성기 이후의 조각양식이다.”
강우방, <원융과 조화>, 396~397쪽, 열화당, 1990.
문명대는 신인사사방불이라 하여 7세기 중엽에 조성했다고 보았다.
윤경렬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부터 사천왕사를 창건하기 전까지의 10년 사이로 보는 근거로 다음을 들고 있다.
① 여래상의 가슴이 열리고 승기지가 비스듬히 나타나고, 군을 동여맨 끈 매듭이 부채살처럼 퍼져 있다. 이런 양식은 北齊(550~577년), 北周(577~581) 시대에 유행했고, 일본에서는 飛鳥(593~701년) 시대에 유행했다.
② 금강역사가 철갑옷에 금강저로 무장을 하고 있는 것도 古式이다. 일반적으로 허리 아래만 군삼으로 가리고 윗도리는 나체이다.
③ 일제시대 일본 학자 大坂가 “神印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여 여기가 신인종 절임을 알 수 있다. 신인종은 통일을 위해 힘쓰던 7C, 명랑법사에 의해 개조된 불교 종파이다. 명랑법사는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가서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하는 밀교를 배워 635년에 돌아온다. 바위 속에 대일여래를 모셔놓고 여래의 빛이 비췬 방향마다 부처의 정토를 새긴 이 부처바위의 유적은 명랑법사의 교리와 통한다.
④ 하현달 모양의 눈에 웃음이 있다. 8C 이후의 불상에는 입에만 웃음이 있다.
⑤ 상현좌이다. 상현좌는 우리나라에는 7C에 유행했다.
5-2. 이 유적의 특징
①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다. 이런 예는 미륵골 여래좌상의 광배에 새겨진 화불들과, 미륵골 마애여래좌상, 석탑재 사면불에 조금 보일 뿐이다.
② 연꽃잎이 넓게 표현되어 있다.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고 천진한 민중적인 정서가 보인다.
③ 불상의 어깨들이 비스듬히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있다. 군수리 출토 납석 여래상의 어깨선처럼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이는 중국 남조시대 불상이 백제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라 불상들은 어깨가 ㄱ자형으로 각져 있다.
5-3. 부처바위의 사방불 신앙은 통일신라 초기 남산 봉화골 칠불암으로 이어진다.
칠불암에서는 사방불은 작게 나타나고 석가삼존은 크게 조성하였다. 이것은 인간세계의 영광을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다.
다음 742년에 조성한 금강산의 掘佛寺 사면석불로 이어진다.
이 바위에는 동쪽 약사여래의 유리광세계와 서쪽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가 크게 나타나는데, 특히 극락세계의 규모가 가장 크다.
약사여래는 좌상인데 비해 아미타불은 입상으로 돋을새김을 하였고, 머리는 입체로 조각하여 얹었다. 협시인 관음, 세지 두 보살도 입체로 새겨 세웠다. 그러므로 이 바위는 극락세계가 중심세계이다.
다음은 불국사로 이어진다.
서쪽의 극락전은 九品蓮池 위에 세운 절인데, 연화교,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거쳐 들어가는 극락세계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동쪽은 지금 좌경루 밑에서 끊어지고 없는데 옛날에는 동방 유리광세계의 普光殿이 있었을 것이다.
백운교, 청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통해 부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 明朗法師에 대하여 <三國遺事> 제5권 神呪 제6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는 國有이다. 신라 沙干(沙湌이다. 신라 17관등의 제8위) 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南澗부인인데 法乘랑이라고도 한다. 蘇判 茂林의 딸 김씨로 慈藏의 누이동생이다.
재량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國敎大德, 다음은 義安대덕이며,
법사는 막내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삼키고 태기가 있었다.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貞觀 9년 乙未(635)에 돌아왔다.
“金光寺 본기를 상고하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로 들어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000냥(혹은 1,000근)을 보시받아 가지고 땅 밑을 潛行하여 자기집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경주시 미남면)라 했다.”
總章 원년 戊辰(668)에 당나라 장수 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남은 군사를 백제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했다.
문무왕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명랑의 신인종은 진언종의 별파이다.
근본 도량은 금산사이다. 경주 원원사, 堗白사(경주), 개성의 現聖寺 등이 있다.
'문화유산 > 경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가을 경주 나들이- 2018년 9월 22일 (0) | 2018.09.23 |
---|---|
남산 답사 자료 1 - 냉골·용장골/ 요약 (0) | 2017.11.10 |
대릉원, 천마총 (0) | 2016.12.08 |
민중불교의 산실 오어사 (0) | 2016.08.18 |
망덕사터 (0) | 2016.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