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경주

대릉원, 천마총

추연욱 2016. 12. 8. 19:13



■ 대릉원 -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에는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을 포함해서 23기의 고분이 있다.

무덤 자리가 수없이 많았지만 봉분이 있는 것만 남기고 지워버렸다. 1970년 공원화 하였다.

 

무덤의 주인은 대체로 4~6세기 왕을 마립간이라 부르던 김씨 왕족들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릉원의 무덤은 모두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김씨 시조 알지는 계림에 처음 나타났다. 그 성씨로 보아  황금을 다루는 기술집단으로 보인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3.75kg의 금이 나왔다.

 

김알지는 제4대 탈해니시금(57~80 재위)대 등장하지만, 김씨로 처음 왕위에 오른 인물은 석씨왕 시대 즉위한 미추니사금이며 본격적으로 김씨왕 시대를 연 이는 제17대 내물마립간(356~402 재위)이다.

내물마립간은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 박씨, 바다에서 온 昔씨를 누르고 4세기 중반 권력을 잡는다.

이후 내물마립간의 아들 눌지마립간(417~458), 손자 자비마립간(458~479) 증손자 소지마립간(479~500) 대에는 김씨끼리 근친혼을 통해 본격적인 김씨왕실을 이어가면서 지배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눌지마립간 대에는 고구려 세력을 물리쳤고, 자비마립간 대는 주요 요충지에 성벽을 쌓고 서울의 坊里 이름을 정하였다.

소지마립간 대에는 통신수단으로서 우편역을 설치하였고, 교통로로서 관도를 수리하였으며 시장을 열어 재화를 유통시켰다.


대릉원은 미추니사금을 대묘로 불렀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제13대 미추니사금(362~384 재위)은 대릉원에 최초로 모셔진 왕이다.

미추니사금은 김유신과 함께 신라인에게 영원한 호국영령으로 상징화되었는데, 이로 인해 나라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과 함께 제사지내고 서열을 혁거세의 능인 오릉보다 위에 두어 대묘라 불렀다.


대릉원에는 미추니사금부터 제23대 법흥왕(514~540 재위) 이전까지 10왕이 묻혀있었다.  

법흥왕의 무덤은 평지를 떠나 산에다 썼고, 무덤의 양식도 횡혈식 석실분으로 바뀐다.

법흥왕은 개혁을 통하여 국가 경영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꾼다.

기마민족의 전통은 잊혀지고 중국적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다. 


신라 왕릉은 대체로 제22대 지증마립간(500~514 재위) 이전에는 왕족의 거주지인 왕성 근처, 오늘날 경주 시내에 있었다.

중고기(법흥왕~진덕여왕)에 들어서면서 외곽지대로 나가는데 이는 법흥왕 이후 장사를 지낸 장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법흥왕 이전에는 왕릉이 왕족의 거주지 근처에 있어 장지를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없었지만 능 자리가 점차 부족해지자 법흥왕대 이후 외곽에 축조하면서 장지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경주문화권>, 역사공간, 2004.

 

 

대릉원 후문

 

 

* 황남대총(98호고분)은 적석목곽분 2기가 붙은 쌍분이다.

남분과 북분이 연결되어 있다. 동서 80m 남북 120, 높이 20mm로 가운데가 꺼져 낙타등 모양이다.

1973년 7월 6일 16,000톤의 봉토를 걷어내고 발굴을 시작하여 1974년에 모두 끝났다. 

황남대총 발굴은 출토된 유물은 금관을 비롯하여 5만 8000점이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도기는 깨지지 않은 것만도 1500점이나 된다.  

 

이 시기 고구려, 백제의 무덤은 적석총이다. 따라서 신라의 지배집단은 고구려, 백제와는 다르다.

1975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남쪽은 남자, 북쪽은 여자의 묘이다. 남분에는 정강이 가리개, 금동, 은동관이 나왔다.

 

북분에서 순금제관, 팔찌 11개, 반지 12개와 , "夫人帶"라는 명문이 있는 은제허리띠 장식이 출토되었다.

피장자는 칼을 차고 있지 않았다. 피장자는 150cm 정도의 여자로 보인다. 남분의 주인공보다 뒤에 사망하였다.

피장자의 신분은 남자와 같거나 높다. 남자보다 신분이 높은 여자는 결혼해도 지위가 바뀌지 않는다.

신라의 왕족 여자는 쌍분의 북분에 매장됨을 알 수 있다.

여왕이 아닌 여자가 금관을 사용한 2명이 있다.

 

황남대총은 내물왕의 능이라는 견해도 있다.

계림에 내물왕이라는 능이 있다.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국보 제191호) 

 

 

남분의 주인공은 63세 전후의 170cm 정도의 남자로 보인다.

허리에 환두대도, 머리에 금동관이 있었다. 북분에 비해 장신구가 적었다.

관 내부 뼈조각 12개가 출토되었다. 또 주인공과는 다른 뼈 15개가 나왔는데, 146cm 정도의 15세 전후의 소녀의 뼈이다.

순장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제22대 지증마립간 3년(502)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금제고배


금팔찌



황남대총 북분 출토

새머리모양유리병

손잡이 부분에 금실로 감았다. 깨어져 수리한 듯하다. 유리는 금보다 희소한 보석이다.

당시 신라에는 유리 생산 기술 없었다. 로마에서 수입한 것이다.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반지


유리잔




 



대릉원의 겨울/ 사진 2011년 1월 4일.

 

 

대릉원 벌초

 

 

대릉원 황남대총

 

 

 

 

황남대총 남분 출토 말안장 꾸미개

 

말안장 꾸미개에 용 60마리가 투조되어어 있다.

투조된 용무늬 밑에 2000여 개의 비단벌레의 날개가 촘촘히 겹쳐져 있다.

 

용이나 봉황무늬는 왕을 상징한다.

왕이 외출하거나 出征할 때 그 말안장은 바로 왕이 앉는 자리, 곧 御座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말안장 앞뒤에 용무늬를 새긴다.

또 그 바탕에 비단을 깔거나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서 위엄과 화려함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말 자체가 어좌가 된다. 지배자와 말은 한몸이 된다.

말이 없이는 전쟁을 할 수도, 또 다른 나라를 정복할 수도 없다. 역사적으로 모든 위대한 정복자는 말을 탄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신라에서 말안장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하는 기법은 고구려 진파리 고분 출토 ‘삼족오 용봉 무늬 금동투조 장식판’에서 전파됐을 것으로 보고있다.

 

 

금동투조금구/ 진피리고분 출토

 

 

 

비단벌레

 

 

 





* 천마총(155호고분)

1973년 4월부터 12월까지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연습 삼아 발굴했다. 발굴 연습으로 작은 무덤 천마총을 택한 것이다.

당시 능 발굴로 하늘이 노해 가물었다고 민심이 흉흉했다. 무덤을 몰래 파면 하늘이 더럽다고 비를 내려 씼는다는 속신이 있다.

금관이 나올 때 천둥, 번개가 치고 인부들은 달아났다. 소나기가 왔고, 곧 맑아졌다. 가뭄도 해소되었다.

금관과 천마도장니 등 모두 11,500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무덤을 복원,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상에 높이 2m 정도의 덧널을 짜놓고 그 안에 널을 안치한 뒤, 이 덧널 위에 높이 약 4m의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봉토를 덮은 구조로 무덤 전체의 높이는 12.7m 밑지름은 47m이다.

먼저 땅을 고르고 목곽이 놓일 자리를 깊이 40cm 정도로 파고 어른 머리 크기의 냇돌을 깔고 분구 밑바닥 전체에 점토를 다져 두께 15cm 정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폭 50cm 높이 40cm로 냇돌을 깔아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동서 6.6m 남북 4.2m 폭 2m의 목곽을 놓았다. 목곽은 결국 지상에 놓인다. 목곽 주위에는 직경 23.6m 높이 7.5m가 되게 돌을 쌓은 뒤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20cm 두께로 점토를 발랐다.

곽 안에는 동서로 길게 21.5m×1m의 목관을 놓았고, 동쪽의 머리끝에서 50cm 떨어진 곳에 1.8m×1.08m 되는 副葬品 收藏櫃를 놓았다. 장신구는 모두 순금제였다. 유물로 보아 5C말 6C초의 능으로 추정된다.

 

목관 안에는 금제 허리띠를 두르고 금관을 쓰고, 둥근 고리장식의 자루가 붙은 칼을 차고 팔목에 금팔찌, 은팔찌 각 1쌍, 손가락마다 금반지를 낀 주검이 누워있었다. 석단 동쪽에 나무로 짠 부장품 수장궤를 남북으로 길게 놓았다. 뚜껑 위에서는 金製鳥翼形冠飾과 金製蝶形冠飾 및 金銅帽 · 金銅製脛甲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안에서는 透彫金銅板飾竹心障泥, 白樺樹皮製 천마도 장니, 은제 · 금동제 안장 등의 마구류가 위쪽에 놓였고, 그 밑에 백화수피제 彩畵板이 있었다. 이들 밑에는 금 · 은 · 금동 및 청동으로 된 각종 그릇과 많은 칠기와 유리그릇이, 맨 밑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석단 위에서는 동쪽에서 金帽 · 은제과대 등의 장신구류가 발견되었고, 그 밖의 자리에서는 환두대도를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鐵鋌이 나왔으며, 金銅製飾履는 서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되었다.

 

신라 제 21대 소지마립간, 또는 제 22대 지증마립간의 무덤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신라 왕릉에 대하여 잠깐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신라는 BC 57년 박혁거세거서간이 건국하여 제56대 경순왕(927~935 재위)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기까지

992년 동안 56명의 왕이 다스렸다.

이중 제30대 문무왕, 제34대 효성왕, 제37대 선덕왕 등은 화장해 능이 없다.

또 신라가 망한 후 개경에 살다가 죽어 철원에 묻힌 제56대 경순왕을 제외하면 52기의 능이 경주와 경주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주에서 왕릉으로 비정된 것은 38기다. 아직 능을 찾지 못한 왕이 16명이나 된다. 왕릉으로 비정된 38기 중에도 피장자가 확실한 능은 제29대 무열왕릉과 제42대 흥덕왕릉뿐이다. 그 밖의 36기 왕릉들은 구전이나 추정에 의한 것이므로 확실하지 않다.

이를 성씨 별로 보면 박씨 10왕은 모두 능을 찾았고, 석씨 8왕은 제4대 탈해왕(57~80) 외에는 모두 왕릉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김씨는 38왕 중 9명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 신라의 역대 왕 중 능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고 전설에도 없는 왕이 몇 명 있다. 이 중에서도 제18대 실성왕, 제19대 눌지왕, 제20대 자비왕, 제21대 소지왕, 제22대 지증왕 능은 아직 자료가 없어 비정할 수 없다.

 

피장자를 알지 못하는 무덤 중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것을 ‘총’ 또는 ‘분’이라 한다.



 

천마총

 

  

 

천마총 출토 천마도

천마총 출토 다래는 안장 옆에 드리워 말굽에서 튀는 흙탕물을 막기 위한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치고 斜格 무늬로 전체를 누빈 다음 둘레에 채색으로 당초문띠, 중앙에는 달리는 흰말을 그렸다. 크기는 75, 35cm이다.

등자는 말 탈 때 발걸치개로 처음에는 안장의 왼쪽 것만 있는 외등자가 3세기경 중국에서 나타났다. 4세기 쌍등자로 변하였다. 처음에는 나무에 쇠를 입힌 것이었으나 후에는 전부 쇠로 만들었다. 고급품으로 여러 가지 장식을 한 것도 있다.

신라의 마구로 杏葉이라고 불리는 말띠드리개 장식이 있다. 이것은 말 꾸미개 가죽띠의 궁둥이 옆부분 교치지점에 매다는 장식임을 고구려 쌍영총 벽화나 금령총 출토 기마형 토기로써 알 수 있다. 형태로는 하트형이 주류이나 시대가 내려오면 형태가 변하여 종모양, 넥타이(또는 펜촉) 모양 등이 나타난다.

 

천마총 출토 금관(국보 제188호)

 

금관은 신라가 고대국가를 형성해가는 시기에 만들어졌다. <일본서기> 중애천황조에 ‘신라는 눈부신 금은 채색의 나라’라 하였다.

금관은 나무와 사슴뿔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는 하늘로 통하는 길이다. 샤먼의 영혼이 하늘과 신라인과 중개한다. 사슴뿔은 시베리아 샤먼에게 사냥, 숭배의 대상인 소중한 동물이다.

크라스노 야르스코박물관에 샤먼의 유품이 있고, 에미르타쥬 박물관에 금관이 있다. BC 8~7C 스키타이족의 전성기이다. 이들은 나무와 사슴을 숭배하였다. 유라시아를 지배하다가 2C 경 역사에서 사라진다. 


 

금관은 5세기초부터 6세기초까지 약 100년 사이에 축조된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1921년 9월 노서리 한 무덤에서 금관이 발견된 이후 정식 조사를 거쳐 발굴된 금관은,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북분 출토 등 5점이다.

이 기간의 왕은 모두 김씨로 내물이사금(356~402), 눌지마립간(417~458), 자비마립간(458~479), 소지마립간(479~500), 지증마립간(500~514), 법흥왕(514~540) 등이다.


'今', '干'은 퉁구스어로 유목민 수장을 말한다.


528년 법흥왕 때 전통신앙인 시베리아 샤머니즘을 버리고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이런 칭호가 사라지고 왕이라 부른다.

법흥왕은 매장하지 않고 불교식 화장을 하여, 금관을 사용하던 전통이 끊어진다.

 

금관은 왕이나 왕과 가까운 왕족이 죽었을 때 사용한 副葬品이었을 것이다.

신라왕들은 실제 생활에서 금장식을 단 비단모자를 착용했고,

하늘이나 조상에 제사를 올리는 등 국가 주요행사 때는 금동관을 썼다.

 

그러나 왕이 금관을 왕관으로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첫째, 금관은 너무 약하다. 그리고  장식이 지나치게 많아 실용품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실제로 머리에 금관을 쓴다면 일상 생활이 많이 불편할 것이다.

둘째, 금관이 출토될 때의 모습은, 죽은 왕의 얼굴을 모두 감싸고 있었다. 금관의 둥근 테는 왕의 얼굴의 턱 부근까지 내려와 있고, 나뭇가지나 사슴뿔 모양의 세움 장식의 끝이 모두 머리 위 한 곳에서 묶인 채 고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모자처럼 머리 위에 쓴 것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온 황금제 데드마스크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초기의 김씨왕들은 이시금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다가 17대 訥祗왕 417년부터 마립간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후 지증을 끝으로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다음 대인

제23대 법흥왕(514~540)부터는 왕이라는 중국식 칭호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마립간 시대는 눌지~지증의 기간인 514년부터 약 100년간이고 이때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즉 스키타이-알타이형 쿠르간이 크게 유행하였고, 금관도 이 기간에 사용되었다.



천마총은 155호 고분이다.

경주시내 큰 무덤에는 일제가 붙인 155기의 무덤에 일련번호를 붙였다. 그중 지금까지 발굴된 무덤은 약 1/5정도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구조 



 

미추왕릉/ 사진, 2011년 1월 4일.

 

 

* 미추왕릉(사적 제175호)은  면적 6만 1,144㎡, 지름 높이 12.4m, 지름 56.7m. 신라 초기의 왕릉묘제인, 봉토만 있고 호석이 없는 형식의 능묘다. 원형토분으로 특별한 시설도 없고 의표물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신라 초기 왕 가운데 미추왕이 희귀하게 제 이름의 능을 분명히 알려주며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재위 23년만에 돌아가시니 대릉에 장사지냈다’라는 기록으로 ‘대릉원’이라 한다.

 

14대 유례왕 때 경북 청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던 伊西國의 군대가 경주까지 쳐들어와 신라는 곤경에 빠졌다.

이때 어디선가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원병들이 나타나서 순식간에 적을 무찔러 위급한 상황을 면하게 해준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라의 병사들이 이상하게 여겨 대나무 잎의 행방을 조사해 보니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었다. 그래서 죽릉, 죽장릉이라고도 했다.

 

세월은 흘러 혜공왕(765∼779) 때였다. 김유신의 무덤에서 장군 같은 사람이 나와 말을 타고 달려가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얼마 있다 무덤 안에서는 한바탕 울음소리가 섞인 하소연이 들려온다. 바로 김유신의 혼령이었다.

그의 후손들이 가혹한 형벌을 받아 섭섭한 마음 그지없어 이제 멀리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미추왕의 혼령은 극구 말린다. “오직 내가 그대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디로 가란 말이오.” 왕의 간절한 청에 김유신이 몰고 온 회오리바람이 멈추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쓴다.



 

미추왕릉 출토

상감유리옥달린목걸이(보물 제634호)

 

 

황금보검(보물 제635호) 

 




대릉원 미추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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