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부산 7월 23일(토)~ 24일(일)] 왕피천 물길 걷기~ 울진금강송숲길 4구간-2.

추연욱 2016. 7. 25. 19:00




[부산 7월 23일(토)~ 24일(일)] 왕피천 물길 걷기~ 울진금강송숲길 4구간-2

2. 울진금강송숲길



울진해맞이공원에서




8시 20분에 소광1리 쉼터에 왔다..





굴구지마을에서 7시 15분에 출발했다.

당초에 7시 30분에 출발할 계획이었는데,

아침에 출발을 앞 당겼다.

큰 버스가 들어오는 길이 겁이 나서 그렇게 했는데,

이게 회원들을 불편하게 한 것 같다.


10분씀 쓸데없이 빨리 왔다.





기다려서 우리를 안내해줄 해설사를 만나고,

점심 도시락을 받고,

다시 차를 타고,




9시 5분에 금강송숲길 4구간 출발지점 너삼밭에 왔다.




시작은 대광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이렇게 징엄하고 신비로운 숲.




오늘 너무 더웠다.

모두들 많이 힘드셨다. 













입산통제소, 9시20분.



이곳의 루드베키아는 별나게 색갈이 곱다.































껑충한 낙엽송, 하늘을 가리다.



썩바골폭로 갈림길, 9시 50분.
















 Bill Douglas(1944~)
Forest Hymn
 Bill Douglas, bassoon
 




 

































































대왕송 갈림길, 11시.






































11시 10분, 대왕금강소나무




































































































갈림길로 돌아간다.

















갈림길로 동아와서,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 12시 10분.











































































대광천 징검다리를 건너 장군터, 2시 25분.



소광1리 쉼터에 출발, 3시.

금강송 숲길 탐방을 끝내고 돌아간다.




사랑바위 휴게소, 3시 20분.
















































불영계곡 전망데 불영정, 3시 45분.


















울진해맞이공원, 4시 분,



이 공원에 울진대종과 망양정이 있다.







망양정







송강 정철1536~ 1593)의 <관동별곡> 마지막 부분.

여기서 달을 맞이한다.




숙종대왕의 시


















울진 망양정

 

■ 망양정-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望洋亭은 성류굴 앞으로 흐르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를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있다.

 

고려 때는 여기서 15km쯤 아래쪽인 기성면 망양리 해변 언덕에 있었다.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중종 13년(1518)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 부탁하여 중수하였고,

철종 1년(1858) 울진현령 이희호가 郡承 임학영과 함께 현재의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으로 옮겨지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어수선한 시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57년 울진교육청이 지역인사들의 도움으로 1959년 중건하였다.

1979년 보수 정화하였다. 1994년 다시 보수하였으며, 2005년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사진은 울진군청 홈페이지에서 빌렸다.


 위의 사진은 2008년 9월 5일 필자가 찍은 것이다.

 

 

‘망양정’의 ‘望洋’이란 이름은, 겉으로 드러나는 뜻은 ‘바다를 바라본다’이지만

깊은 속뜻이 있다고 한다.

 

<장자>, 秋水편에, 

 

가을 물이 때가 되어(물은 봄에 나서 가을에 성하게 된다고 한다) 모든 냇물이 황하로 들어오니, 탁한 물결이 멀리 넘쳐흘러, 양쪽 기슭에 놓아먹이는 마소들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이에 河伯(황하의 神)은 기뻐하여 천하의 장관이 모두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北海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동쪽을 바라보니 그 물끝을 볼 수 없었다. 하백은 비로소 얼굴빛을 고치고 멍하니 若(북해의 신)을 향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골말에 ‘백쯤의 道를 듣고 천하에 자기만한 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니, 그것은 나를 두고 한 말인가 하오. 또한 나는 일찍 仲尼(공자)의 학문을 적게 여기고 백이의 義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더니, 이제 당신의 그 끝없음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니, 만일 내가 당신의 문 앞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길이 大方家(大道를 얻은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소.”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우물에 구속을 받기 때문이요,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때(여름)를 굳게 믿기 때문이며, 옹졸한 선비에게 도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敎(墨子 등의 가르침)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자네는 냇물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자네의 못난 것을 아니, 자네와는 더불어 큰 이치를 이야기할 만하구료. 천하의 물로서 바다보다 큰 것은 없으니 모든 냇물은 끊임없이 여기로 들어와도 찰 줄을 모르고 尾閭(바다의 동쪽에 있다는 바닷물이 새어 나가는 곳)로 끊임없이 새어 나가도 마를 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또 봄이나 가을을 따라 변하지 않고, 장마나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니 이것은 저 江河의 물보다 많아서 그 수량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김달진 편, <莊子>, 고려원, 1989.

 

여기서 ‘望洋之嘆’이란 성어가 나온다.

‘망양지탄’은 ‘지금까지 알지 못한 위대한 것을 보고 감탄하며 자신의 좁은 소견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망양정은 예로부터 관동팔경 중에도 경치가 으뜸으로 꼽혔다.

고려 말 李穀(1298~1351)의 <東遊記>, 조선 광해군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李山海(1539~1609)의 <아계유고>, 古山子 金正浩가 1861~1864쯤 간행한 <大東地誌> 등 여러 문헌에 그 아름다운 경치가 소개되어 있다.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 제일가는 곳이라 하여 숙종(1674~1720 재위)은 “關東第一樓”라는 친필 편액과 시를 내렸고,

 

정조(1776~1800 재위)도 망양정을 제재로 시를 지었다.

 

正祖의 어제시


元氣蒼茫放海溟 일기 창망한 때 바닷가로 내쳐지니,

誰人辯此望洋亭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恰如從目仙尼宅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을 구경하는 듯,

宗廟官墻歷歷經 종묘며 관창 담들이 뚜렷이 구분되어있구나. 


 


양정

李山海


枕海危亭望眼通 바다를 낀 높은 정자 전망이 탁 트여,

登臨猶足盪心胸 올라가 보면 가슴 속이 후련히 씻기지.

長風吹上黃昏月 긴 바람 황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

禁闕玲瓏玉鏡中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


 

鵝溪 李山海(1539~ 1609)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평해에 귀양살이한 적도 있다.

이산해는 <토정베결>을 지은 李之菡의 장조카이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1745~?) 등 조선시대 화가들도 그림을 남겼다.

단원 김홍도는 금강산 주변의 네 개 군을 그려 <금강산 사군첩>이라 하였는데, 관동팔경이 모두 들어있다.

이 <망양정도>는 현재의 자리로 옮기기 전, 기성면 망양리 해변에 있을 때의 모습이다. 



조선 선조 13년(1580) 송강 정철(1536~1593)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이때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이어 동해안 관동팔경을 따라 내려오면서 그 마지막 여정에 망양정을 찾는다.

 

……

하늘의 끝을 못내 보아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이나 성난 고래, 뉘라서 놀라게 하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고.

은산(銀山)을 꺾어내어 육합(六合)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곧 밤이 되니 풍랑이 고요해져,

부상 지척에 명월을 기다리니,

천길 서광이 보이는 듯 숨는구나.

……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바라보니 깊이를 모르니 끝인들 어찌 알겠는가.

명월이 천산만락에 비추지 않는데가 없구나.

<관동별곡>

 

 

망양정 현판은, 蔚珍文化院 附設 蔚珍歷史硏究所長 金成俊의 고증으로 울진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李台榮이 1962년 초에 썼다고 한다. <울진문화 제16호>


 

 

이에 앞서 망양정을 현재의 장소로 옮겨짓기 전에는 숙종 16년(1690) 전에는 숙종대왕이 현판을 써서 眼原君에게 보내 달게 했다. 그런데 <大韓每日申報> 1910년 4월19일자 기사에 따르면 “망양정의 현판 글은 숙종대왕이 御製했는데, 그 정자가 훼손되어 철거한 후 그 현판을 고을 객사에 두었더니, 원산의 재무감독국 임원인 일본인 슈등정부(사이또 마사히로)가 재무 시찰차 왔다가 그 현판을 구경하고 가져갔다”고 하였다.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망양정으로 다녀오는 동안 뒤풀이 준비를 해두었다.


















이렇게 어제 오늘 이틀의 행사를 마무리한다.


왕핓천 물길 도보 선두를 맡아주신 카페지기 백마강 님께 감사드림니다.


대구방에 찬조해 주신 분,

하윤이 님 수박 찬조,

시골제비 님 맥주와 소주,

세피아 님, 참외, 자두, 야채,

백마강 대창, 막창 


부산방에서 찬조해 주신 분,

옛사랑, 오징어회무침,

원다루, 바다 님, 생맥주 3통,

또아줌마 님, 수박,

생이 님, 김치와 반찬,

마아, 세피아 님, 강냉이.


찬조해 주심이 깊이 감사드림니다.


뒤에서 관리와 노동끼지 해 주신 마야님과 생이 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녁밥, 그리고 일찍 일어나셔서 아침빕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늘 함께 해 주시는 우리의 일꾼 영업용(이성준) 님께도 깊은 감사 보냅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5시 30분쯤 돌아오는 차에 올랐고,






9시 30분쯤 부산 서면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