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남양주

추연욱 2016. 6. 10. 10:04



■ 다산생가(여유당)와 묘소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동남쪽 두물머리에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나고 죽은 곳은 경긷도 광주군 초부면 馬峴리(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우리나라의 풍수가들이 국내 최고의 양택 중 하나로 지목하는 곳이다. 

옛날에는 소내[苕川] 또는 杜陵)라 했고,

다산의 5대 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다산 선생이 살던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갔고,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통 한옥에 口자형 20칸 집이고, 오른쪽에 사당, 왼쪽에 유품을 정리한 유물전시관이 있다.



다산은 22세 때 성균관에 입학한 때부터 임금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다산이 환갑을 맞았을 때 스스로 일대기를 기록한 <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은 "정조대왕의 총애를 지나치리만큼 받아 상품으로 내려주신 책은 이루 적을 수 없고 호랑이가죽과 말도 받았다"고 했다.


다산은 정조를 보필하면서,

한강을 건너는 船舟橋도 설계했고,

華城 축조에 쓸 거중기도 제작했다.


그러나 항시 노론 측으로부터의 견제와 시기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1800년, 다산 나이 39세 때 정조대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다산은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났음을 직감하고 이곳 고향집으로 내려와,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노자의 말을 이끌어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칩거했다.

그렇게 조심했지만 그는 결국 유배객이 돼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고 나이 57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줄곧 여유당에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했다.


다산이 받은 형벌은 끝까지 사면되지 않았다.

그러다 1910년 7월에 극적으로 복권되고 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다산을 위한, 세상을 위한 왕조의 마지막 조치였다.


그리하여 여유당 뒷산 자락에 있는 다산의 묘소 앞에는 "문도공 다산 정약용"으로 시작하는 묘비가 우뚝 서 있다.
생가 왼쪽으로 ‘與猶堂’이라 새겨진 비머리돌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묘소가 있다.

곡장에 쌓인 봉분 앞에 상석과 향대가 있고 오른쪽에 비석이, 양 옆에에는 혼유석이 있다.


■ 수종사는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619m) 정상 까까이에 있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939년 경내의 석조 부도를 중수하면서 조선 초기의 유물이 대량 발견됨에 따라 유물과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 세조4년(1458)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한다.


금강산을 순례하고 돌아오던 세조가 양수리쯤에 도착하여 이 부근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한밤중 세조의 귀에 수종사 부근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세조는 날이 밝자 종소리를 따라가니 종소리가 울리는 곳은 바위굴이었다. 굴속에는 16나한이 앉아 있었다.

종소리로 들렸던 것은 굴속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암벽을 울려 나는 소리였다.

이에 세조는 왕명을 내려 절을 짓고 水鍾寺라 했다. 현재 약사전 앞에 약수가 있다.

폐종소리 들려온 동굴은 사라졌지만 그 석간수만은 지금도 산신각 아래 보존돼 있다. 그러나 그 물은 매일 세 차례 예불 때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茶偈에만 쓰인다.

약사전 오른쪽 위에 나한전만 보존되어 있다. 세조가 돌계단을 쌓아 터를 닦아 굴속의 16나한을 모셨다는 전각이다.


고종 27년(1890) 풍계 혜일스님이 고종에게서 800냥을 하사받아 폐허가 된 절을 중수하고,

이듬해 4천냥과 金帛紅絲를 하사받아 사존불을 개금했다.

1939년 태욱스님이 중수했으나 한국전쟁 때 전화를 입는다.

지금의 수종사는 1974년부터 중건한 것으로 대웅보전과 나한전․약사전․산신각․경학원과 요사, 팔각오층석탑이 있다.


불이문 옆에는 키 40여m, 둘레가 7m가 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중창을 마친 세조가 기념으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데 그렇다면 500년이 넘는다.


서거정은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하였다.

운길산 아래(능내리) 묻힌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만년에 이곳 수종사에서,

추사 김정희(1786∼1856년)와 <東茶頌>을 지은 한국의 茶聖 초의선사(1786∼1866년)와 자주 어울려 차를 마셨다.


종소리 울려 퍼졌다던 그 석간수로 차를 다려 마시며 발아래 펼쳐지는 동방가람 최고의 풍치를 감상하면서.

2000년 三鼎軒 개방, 다산, 추사, 초의가 차 마신곳이다.


* 팔각오층석탑(수종사 다보탑, 경기도 문화재 제22호)은 세조가 중창불사를 하면서 조성한 것이라 한다.

지대석만 4각형이고 중대, 상대, 몸돌, 지붕돌이 모두 8각이다. 8각 기단부 면석마다 2구씩 안상이 새겨져 있고, 기단 하대석과 상대석에는 단판의 복련과 앙련이 피어 있으며 그 아래위로 역시 안상을 조각했다.

버팀기둥 외에 돌아가며 문이 새겨져 있는 8각 몸돌은 올라갈수록 체감이 심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지붕돌은 낙수면과 전각이 부드럽게 반전되었으며 지붕돌 안쪽은 수평을 이룬다. 지붕돌 8각 모서리마다 풍경이 서너 개씩 달려 있었던 듯한데, 지금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인근 묘적사의 것과 비슷하다.


이 탑은 그동안 위치를 변경하며 탑을 중수, 조사하느라고 1957년과 1970년에 걸쳐 두번 해체 복원했다.

1957년에는 1층몸돌과 중대석 안에 3구의 작은 금동불이 모셔진 동제불감과 목제불감, 금동불, 보살상 14구가 나왔다. 이들은 한꺼번에 모셔진 것이 아니고 조선 전기와 후기에 나누어 모신 것이다. 또 이 본존의 복장에서 발원문과 함께 “성종 24년(1493) 明嬪金氏가 시주한다”는 명문이 있고, 금동비로자나불상에는 “인조 6년(1628) 貞懿大王大妃가 시주한다”는 명문이 있었다. 1970년 2차 조사 때는 12구의 불상과 금동불․보살상들이 나왔다.
특히 동제불감 외벽에 그려진 아미타극락회상도는 솜씨가 뛰어난 작품들이다. 이들 사리구(보물 제259호)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양주의 묘적사 칠층석탑과 한 장인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 원형은 보현사 8각13층석탑이다.


* 석조부도는 태종의 다섯 째 딸 정의옹주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높이 238m에 팔각원당형을 기본 구조로 삼았다. 지대석은 4각으로 몸돌을 원형으로 구성했다.

지대석과 하층기단 옆면에 연꽃무늬를 새겼고, 상층기단 8각 모서리마다 두꺼비처럼 생긴 동물을 배치했다.

8각 중대석은 아래위 2단으로 사각형을 구성하고 빈틈없이 조각을 했으며 둥근 몸돌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곡선과 반전이 부드럽고, 상륜부는 연꽃과 복발․보주로 장식되어 있다.
지붕돌 옆면에 “太宗太后貞懿翁主舍利塔施主○○柳氏錦城大君正統年四年己未十月入”이라는 명문이 한 줄로 적혀있다.
본디 경내 왼쪽 산비탈에 있던 것을 1939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 중수하였다.

이때 복장유물로 1493년에 조성한 청자항아리로 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 수종사 금제9층소탑(보물 제259-2호)은 1939년 수종사 석조부도를 중수할 때 발견됐다.

높이는 12.9cm, 무게는 205.3g이다. ]

발견 당시 표면의 많은 부분이 구릿빛을 띠고 기단부 일부에서 청동 부식물이 나와 ‘금동제9층소탑’으로 1963년 1월 보물로 지정됐다.
그런데, 박물관 보존과학실이 2003년 비파괴 분석조사를 실시한 결과 금 83.2%에 은 16.4%가 가미된 것으로 밝혀졌다.(2003년 12월) 따라서 金銅製가 아니라 금제임을 확인했다.

이 소탑은 사리그릇 봉안 소탑뿐 아니라 현존 탑 가운데 금제로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정사각형 기단 위에 9층으로 세워져 있어 고려 후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자운서원 - 법원읍 동문리

율곡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기호사림의 본산이다.

광해군 7(1615)에 창건되어 효종 원년(1649) 왕이 慈雲이란 사액을 내렸.

율곡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던 곳이다.

지금의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했다가 1970년 복원한 것이다.





서원에 들어서면 왼편 낮은 언덕에 慈雲書院廟廷碑(경기도유형문화재 제77)가 있다.

율곡의 덕을 기리기 위해 숙종 9(1683) 유림에서 세운 비이다. 당대의 명필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다.

오른편에 기념관에는 이이와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복제품이다.

위쪽에 율곡교원연수원이 있다.


동쪽으로 올라가면 서원이 있다.

느티나무 두 그루가 양쪽에 서있고, 나무를 지나 솟을삼문으로 들어가면 높은 지대 위에 앉았다.

사괴석담장(길이 20~ 25m의 네모진 돌로 쌓은 담장이다. 사괴석이란 한 사람이 네 덩이를 질 만한 크기의 돌에서 온 말이다)을 둘렀으며 익공계 합각지붕이다. 정면 3칸으로 정남향이다.


서원 앞에 신도비를 세웠다.

높고 두툼한 머릿돌을 놓고 화강암의 비문을 세운 다음 날렵한 지붕돌을 올렸다.


묘소는 자운산 깊숙한 곳에 있다.

율곡의 부모, 내외를 비롯해 한 가계의 묘 13기가 있다. 율곡의 묘가 율곡 부모의 묘보다 위쪽에 있는 역장이다.

또 묘택이 동침(머리를 동쪽에 두고 시신이 서향)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고대의 경우 동침이나 남침이었다가 조선에 와서 북침이 기본 묘제가 되었다.

묘택의 지형상 북침이 곤란하게 되어있고, 앞 줄기가 서향으로 빠져버리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임당의 묘율곡의 묘가 경기도 기념물 제14 15호이다.

 

화석정(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 - 파평면 율곡리

율곡의 5대조가 세종 25(1443)에 대물림했던 정자이다.

그 아랫마을에 강릉에서 여섯 살에 올라와 살던 율곡의 본가가 있었다.

율곡은 어린날 이 정자에 올라와 자연을 벗하며 학문을 익혔고,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는 제자들과 학문을 논했다.


화석정은 선조가 의주로 몸을 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급히 서울을 빠져나와 임진나루에 도착한 임금일행은 어둠 속에서 뱃길을 잡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의 피난길을 인도하던 이항복은 미리 기름칠을 해두었던 화석정에 불을 지르게 했다.

임금 일행은 화석정이 밝혀준 불로 무사히 강을 건너 의주로 갈 수 있었다.


그뒤 80년만에 복원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불탔고,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재건하였다.

정자 일대는 노송이 우거지고 바로 앞에 임진강이 굽이굽이 흐른다. 정자 옆에는 560년 정도된 느티나무가 있다.

 

李珥(1536~ 1584)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원수이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호는 그가 살던 마을 이름을 따서 栗谷이라 하였다.


강릉 외가에서 탄생,

여섯 살 때 파주 율곡리의 본집에 돌아왔다.

열세 살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한다.

율곡이 16세 때 사임당은 48세로 세상을 떠난다. 3년간 어머니 무덤 廬幕에서 지내고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불교를 배운다.

1년만에 오죽헌으로 돌아온다. 이듬해 서울에 올라와 한성시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모두 9차례 장원해 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26세에 아버지를 잃고, 29세에 호조좌랑이 된 이래 예조좌랑 · 이조좌랑 · 청주목사 · 대사헌 · 형조판서 ·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부교리와 춘추기사관을 겸임하면서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33세에 관직을 버리고 해주로 가 머물면서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이는 주자를 본받고자 한 것이었다.

42세에 <擊蒙要訣>을 지었고,


49세로 서울 대사동에서 죽어 자운산 선영에 묻혔다.

그는 는 하나로 융합된다는 理氣一元論을 주장했다.

이는 우주의 가 되는 당연한 법칙이고, 기는 체의 활동을 구체화하는 용이라는 것이다.

이는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거대한 두 물줄기가 된다.

뒷날 당쟁에서 율곡의 후예들은 서인으로 퇴계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맞서다가 결국 영남학파인 남인에게 몰락한다.



■ 반구정과 황희묘(경기도문화재재료 제12호) - 문산읍 사목리 사목리 남쪽

伴鷗亭(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은 가파른 절벽 위에 있고,

조금 위 언덕에는 仰止臺라는 8각정자가 있다. 두 정자 모두 정면 측면 각 한칸의 작은 규모이다.


翼成公 黃喜(1393~1452) 정승이 벼슬에서 물러나 세운 정자이다.

처음 洛河亭이라 하고 강물 위에 떠가는 갈매기를 벗삼고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뒤 400년이 지나 후손들이 다시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그 뜻을 따서 반구정이라 하였다.

한국전쟁 때 불타고, 그뒤 근처의 후손들이 복구하였고, 1967년에 고쳐지었다.


정자에서 내려오면 마당 오른쪽에 황희 동상이 있고,

그 왼쪽에 방촌 영당과 영모재가 있다.

2칸집에 초익공 맞배지붕이며 솟을삼문을 단 방촌영당(경기도 기념물 제29호)은 황희의 영정을 모신 곳이고, 영모재는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영당은 한국전쟁 때 불타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탄현면 금승리에 부인 청주 양씨와 합장한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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