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김춘수/ 얼룩, 또 하나 가을 저녁의 시, 하늘

추연욱 2015. 9. 21. 08:52

 

또 하나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1922~ 2004)

 

부서져 흩어진 꿈을

한 가닥 한 가닥 주워 모으며

눈물에 어린 황금빛 진실을

한 아름 안고 나에게로 온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듯이

넘쳐흐르는 이 靜寂을

고요히 흔들며

나에게로 온다 

 

저 섧게 물든 전나무 가지 사이

가리마 같은 언덕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로 온다.

 

김춘수, <김춘수 시 전집>, 서문당, 1986.

 

 

 

얼룩

 

김춘수(1922~ 2004)

 

낙엽은 지고

그늘이 낙엽을 덮는다

저무는 하늘, 머리를 들면 멀리

바다가 모래톱을 적시고 있을까,

세상은 하얗게 얼룩이 지고

무릎이 시다.

발 아래 올해의 문꽃은 지고

소리도 없다.

 

김춘수, <김춘수 시 전집>, 서문당, 1986.

 

 

 

 

하 늘

 

김춘수(1922~ 2004)

 

언제나 하늘은 거기 있는 듯

언제나 하늘은 흘러가던 것

 

아쉬운 그대로

저 봄풀처럼 살자고

밤에도 낮에도 나를 달래던

그 너희들의 모양도

 

풀잎에 바람이 닿듯이

고요히 소리도 내지 않고

나의 가슴 어루만지던 

그 너희들의 모양도

 

구름이 가듯이

노을이 가듯이

언제나 저렇게 흘러가던 것

  

김춘수, <김춘수 시 전집>, 서문당, 1986.

 

 

 

 

 

 

 

 

 

 

 

'여백 > 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딘 사랑/ 이정록  (0) 2015.12.27
안현미, 와유 臥遊  (0) 2015.10.04
데드 슬로우/ 김해자  (0) 2015.09.15
오일도의 시  (0) 2015.08.11
정희성 숲  (0) 201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