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경주

元曉大師(617~686)

추연욱 2015. 7. 14. 06:31

元曉大師(617~686)

 

 

원효는 압량군(현재의 경산시 자인면) 불지촌 북쪽 栗谷裟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성은 씨이다.

 아버지는 談捺乃末 柰麻(신라 17관등 중 제11), 할아버지는 仍皮公(또는 赤大公)이다. 6두품 출신이다.

어릴 때 이름은 이었다.

 

소년 시절 화랑이었다.

648년 황룡사에 출가하였다.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아 初開寺,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라 하였다. 출신으로 보아 평범한 절을 떠돌았을 것이다.

고구려에서 온 <열반경> 법사 보덕에게 <열반경><유마경>을 배웠으며, 낭지에게 <법화경>을 지도를 받았다. 여러 경전의 주석서를 쓸 때는 혜공에게 물었다. 나이가 들어 귀한 신분의 고승인 대안(571~644), 의상등과 어울렸다. 그의 높은 학덕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650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海路는 백제가 막고 있어, 육로로 고구려를 거쳐야 했다. 그래서 육로로 요동까지 갔다가 순라꾼[戍羅]에 잡혀 간첩으로 몰려 갇히게 되었다. 간신히 탈출하여 유학의 뜻을 꺾고 돌아왔다.

 

그뒤 10여 년이 지나 백제가 망하고 바닷길이 열리자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다시 구법의 길에 나섰다.

<송고승전-4, 釋義湘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문무왕 원년(661)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가는 도중 그들은 비 오는 어느 날 밤 人家를 찾아 헤매다가 길가 언덕 밑 땅막[土龕]을 발견하여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땅막이 아니고 오래된 무덤이었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또 하루 밤을 더 무덤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귀신 때문에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간밤에는 땅막이었기에 편히 잘 수 있었는데 오늘밤에는 무덤이기 때문에 귀신의 장난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마음이 나면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三界唯心이요, 萬法唯識이다.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心外無法 胡用別求)” 하고는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송고승전>은 북송의 승려 贊寧(918~999)이 편찬한 승려들의 전기이다. 988년에 완성되어 북송 태종에게 바친 책이다. 모두 30권이다. 여기에는 삼국 출신 승려 10여 명의 전기도 포함되어 있다.

찬녕은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그는 신라 사신에게 신라 설화를 듣고, 등주의 신라방 같은 곳에서 노인들에게 물어 지었다 한다.

 

<指月錄>이란 책에는 원효와 함께 불법을 구하려고 당나라에 가던 길에, 어느날 밤 무덤가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어떤 구멍에서 물을 얻어먹었더니 시원하기 비길 데가 없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 속의 더러운 물임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원효는 깨닫기를 마음이 나면 여러 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해골과 둘이 아니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髑髏不二) 부처님 말씀에 三界가 오직 마음뿐이라 하셨으니 어찌 나를 속였으랴.”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의상은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성 - 경기도 화성군 지화리 - 옛날은 바다 -7세기 경에는 횡혈식 석실묘(가족 합장묘) - 연도가 열려 있는 경우도 많다. 빗물이 새기도 한다. 무덤 안에 배수로도 있다.

 

돌아와 분황사에 살면서 <화엄경소><금광명경소> 등 경전의 핵심을 정리하는 저술활동을 한다. 원효는 <화엄경소>를 써나가다 제4<十廻向品>에서 붓을 던졌다. 여기서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닦은 모든 을 중생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廻向이란 보살이 大悲心으로 지금까지 쌓은 공덕 전부를 一切의 중생에게 돌려서 그들을 구제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회향의 정신을 글로 밝히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붓을 던진 후 광대처럼 박을 하나 쓰고 방방곡곡을 누비며 춤추고 노래하는 삶을 살았다. 불경 연구에서 중생구제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이후 계를 깨뜨린다. <삼국유사, 4> 元曉不羈 조에,

 

스님이 어느날 常例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리.(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쉬게 했다.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이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만날 때 39~44세 사이로 보고있다.

 

그리고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원효는 이미 를 잃어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을 바꾸어 입고 스스로 小姓居士라 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따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에서 말한,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로써 생사를 벗어난다 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는 구절을 따서 無碍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無碍란 모든 것으로부터 얽매임이 없다는 뜻이다. 대자유인의 삶이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 몽매한 무리들이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다. 이러한 무애행은 뭇중생과 만나 서로 변화하는 삶, 곧 풍류도의 接化群生의 불교적 실천인 것이다.

 

원효는 승려의 높은 경지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다. 승려의 신분이 아닌 거사의 신분으로 無碍行을 벌였다. 스스로 광대가 되어 無碍라 이름한 노래와 이상하게 생긴 큰 박을 희롱하면서 춤을 추었다.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과 민중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원효대사에게는 중생의 마음은 곧 眞如 그 자체인 한마음[一心]이다. 고원한 진리와 세속의 비루한 일상이 구분되지 않는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사람이 죽어갔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민중들은 굶주림과 노역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귀족들과 승려들은 민중의 고통과 중생제도를 외면하고 화려하게 살고 있었다. 원효는 신라 사회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민중들은 원효를 동반자로 친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왕궁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설하고자 하여 대안에게 부탁하였다. 대안은 원효를 추천했다. 원효는 이 경을 시골의 길거리에서 전달받고 소를 타고 경주로 왔다. 쇠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요론을 적으면서 경주에 도착했다. 요론 8권을 소를 타고 완성했다.

 

<송고승전> 4新羅國 沙門 元曉傳,

 

국왕이 백고좌를 설치하고 <인왕경> 대회를 열어 두루 고승대덕을 찾았다. 원효의 고향인 湘州에서는 그를 추천하였으나 다른 승려들이 싫어하여 비방하므로 이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 얼마 후에 왕비가 악성 腫瘡을 앓게 되었는데, 왕자와 신하들이 모든 산천 靈祠에 기도를 올렸으나 도무지 의약이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무당이 말하기를 외국으로 사람을 보내 약을 구하면 곧 나을 것입니다.”고 하므로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해로로 당으로 가던 중 사신은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비는 원래 鈐海라는 용왕의 셋째 딸이었다. 용궁에는 <금강삼매경>이라는 경이 있는데, 二覺圓通하여 보살행을 닦는 것이 그 내용이다. 지금 부인에게 병이 있다니 이것을 增上緣으로 삼아 그 경을 신라에 유통시키도록 하라.” 하고는 30장 가량 되는 종이뭉치를 가지고 와서 사신에게 주었다. 그것은 다 흩어지고 순서가 뒤바뀐 책이었다. 그는 이어서 대안성자를 시켜 흩어진 종이의 순서를 맞추고, 원효법사에게 청하여 소를 짓게 하여 이를 풀이하면 왕비의 병이 곧 나을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귀국하여 왕께 이 사실을 알렸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먼저 대안스님을 불러 그 차례를 맞추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안스님은 보통 사람과 달라 항상 거리에서 구리로 만든 발우를 치면서 대안, 대안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다닌 특이한 스님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대안이라 불렀는데, 왕의 청을 듣자 대안은 그 경을 이리 가져오시오. 나는 왕궁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소.”라 하였다. 대안이 경을 받아 배열하니 八品이 되었는데, 모두 부처님의 뜻대로 글의 뜻이 맞아들었다. 대안이 말하기를 속히 원효스님께 강을 시키도록 하시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하였다.

원효가 고향인 상주에서 경을 받았다. 원효는 사신에게 이 경은 本覺始覺二覺으로 하고 있으니 나에게 角勝[]을 마련해 두 뿔 사이에 책상을 걸쳐 놓고 그 위에 필연을 얹으시오.”라 하였다. 그는 이 소 수레 위에서 疏 五권을 지었는데, 날짜를 정하여 황룡사에서 강연할 즈음 경박한 무리들이 이 를 훔쳐갔다. 원효는 이 사실을 왕께 아뢰고 다시 3일을 연기하고 3권의 略疏를 지었다.

드디어 왕과 신하, 도인과 속인 등 모두 구름같이 법당을 메운 가운데 원효가 그 뜻을 풀어갔다. 위엄과 격식이 있고, 어려운 대목을 해석하는데, 가히 만고의 원칙이 될 만했다. 이때 원효는 시를 지어 옛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데는 오직 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구나(昔日 百椽時 雖不預會金 今朝)” 하였다. 그때 뭇 승려들은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운 낯으로 엎드려 참회하였다.

 

仁王百高座道場이란 백 개의 여래상, 백 개의 보살상, 백개 의 아라한을 만들어 모시고 고승 100명을 초대하여 <仁王護國般若波羅密多經>을 강설하는 법회를 말한다.

 

''''과 음이 같기 때문에 소의 두 뿔로 二覺을 나타낸 것이다. 이각은 本覺始覺을 말한다. 본각이 땅 속에 묻힌 금이라면 시각은 노력하여 파낸 금을 말한다. 승이란 불법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소>는 당나라 학자들이 격을 높여 <금강삼매경론>이라 불렀다. 馬鳴 · 龍樹 등 보살로 불리는 인도의 고승들이 주석한 논서 외에는 이라 부르지 않는다.

<金剛三昧經>, 동진의 도안(314~385)이 작성한 경록(경전 목록)에는 나라 시대 失譯이라 기록하였다. 그후 남북조시대 僧佑(445~518)<出三藏記集>에는 경의 이름은 있으나 책은 오래 전에 일실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후 수 · 당나라 시대 <靜泰錄> <內典錄> <干定錄> 등에도 이 경은 闕本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730智昇<開元錄>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편입한다고 하였다.

<금강삼매경>은 신라의 대안, 원효 등 학승이 지은 僞經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의 내용이 어렵고 문장이 압축되어 있어 (주석서)이 없이는 읽기 어렵다.

 

68670세로 穴寺에서 입적하였다.

아들 설총이 그 유골을 부수어 진흙과 섞어 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며 한 평생 슬픈 한을 품었다. 설총이 예배하자 갑자기 뒤돌아보았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까지도 그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한다.

분황사에 <和諍國師之碑>가 있다. 추사 김정희가 버려진 이 돌덩이가 <화쟁국사지비>의 대좌인 것을 알고 스스로 글은 쓴 것이다.

 

뒤에 고려 숙종이 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大覺國師 義天(10551101)은 송나라에서 돌아온 후 1091년부터 불경을 수집하고자 남한 일대를 편력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사모하던 원효의 진용 앞에 다과를 진설하고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제문을 지어 <祭芬皇寺曉聖文>이라 하였다.

 

微言의 그르쳐짐을 통한하여, 至道의 쇠퇴함을 가석히 생각하여 멀리 명산을 찾아 법을 구하다가 이제 계림의 고사에서 다행스럽게도 살아 계신 듯한 당신의 용자를 우러러 뵈오니, 옛날 석가가 설법하신 영취산의 회합에 참석한 것처럼 느껴지나이다.

 

 

그의 저술들에는 그 당시 중요시되던 대표적인 경전에 대한 , , 宗要 등이 망라되어 있다. 그 가운데 <열반경종요>,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은 경전 연구의 고전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불교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라는 것은 경전을 공부하면서 갖게 된 생각을 적은 글이다. ‘란 경전을 풀이하고 고증한 글인데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다고 한다. ‘宗要라고 하는 것은 경전의 내용을 간추려서 알기 쉽게 설명한 글이다. 경전의 내용을 자세하게 이해해서 그 핵심을 꿰뚫어야 그런 글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은 경전을 풀이한 글이면서 경전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원래 이 아니고 였는데, 중국에 전해져 높이 평가된 결과 으로 승격되었다.

· 대승경 율 · 논 등 100여 종 240여 권의 저술이 있다고 하나 현재 22권만 전한다.

 

원효 불교의 중심 사상은 和諍이다.

원효는 의 구별을 넘어서고, 을 아우르는데 진정한 삶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眞諦로 출세간 또는 본질을, 俗諦로 세간, 현상을 말한다. 아우르기[和諍 · 會通]란 안으로 부처가 되고[歸一心源] 밖으로 보살이 된다[饒益衆生].

신라의 대승교학은 유식과 화엄이다. 화엄은 통일신라 사회가 지향할 정치적 이념이 되었다. 당시 불교계는 서안 대자은사를 중심으로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정교한 이론인 유식학으로 중관과 유식의 대립하게 되고, 불교계는 혼란에 빠진다.

여기에 대한 원효의 대답이 <十門和諍論>이다. 원효는 불교 안의 제 가풍을 회통하고 제종문을 화쟁하여 전 불교를 귀일하려는 것이 화쟁사상이다.

 

원효는 자주적 지식인, 한국 철학의 개척자이며, 대승교학의 선구자이다. 전통 권위를 부정한 자유인이다.

원효는 특정 종파에 매이지 않고 모든 교학을 연구했다. 또 특정한 스승이 없이 배워 통불교적 성격을 가진다.

현재 대략 38개의 사찰절, 암자에 원효의 이름이 들어있다.

 

원효

일본 선림사에 <무량수경 종요>가 있다. 이 책은 원효의 저서로 800년 전 필사한 원효의 일대기이다. 6통 두루마리인데, 그림은 12세기 일본 사람이 그렸다.

교토 외곽의 고산사(천황이 하사한 액자가 있다)는 고산사는 12세기 가마꾸라[鎌倉]시대 묘오에[明惠] 쇼오닌[上人](1173~1233) 때 크게 발전했다. 묘오에는 당시 내전으로 생긴 전쟁 미망인들을 위해 여성이 불교에 공헌한 범본으로 선묘를 성자로 받들었다. 그는 고산사에 선묘사를 세우고 조각상을 모셨다. 그는 또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의 일대기를 80m짜리 長軸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그린 6권짜리 에마게[繪卷]를 제작했다. 이것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3대 에마게 중 하나이다. 또 묘오에는 원효와 의상을 크게 존경해 두 분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이 두 초상화는 12세기 초상화를 重模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효, 의상의 진영은 高山사 소유로 교토박물관에 위탁 보관 중이다. 15세기부터 고산시에서 보관해온 것이다. 15세기 일본 무로마찌[室町] 시대에 배껴 그린 것이다. 일본의 화승이 우리나라에 와서 배껴 간 것인지, 우리나라 화가가 그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초상화의 양식이 우리나라 초상 양식을 따르고 있어, 원본에 충실했다. 의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올라앉아 足坐에 신발을 가지런히 놓은 것은 최치원의 초상과 같은 형식이다.

 

분황사, 선산 원적사의 원효상이나, 은해사, 송광사의 말사인 금탑사의 의상상은 20세기에 그려진 상상화이기에 실제 모습은 아니다.

 

 

원효저 판비량론 - 오오타니 대학에 있다.

교기는 가마꾸라 승려로 원효와 비슷한 생애

서당화상전(9세기 초) - 고선대사는 68670세로 죽었다 기록

서당화상비 - 고선사에 세웠다.1.7m

깨달음에 대해서는 송고승전에

 

 

6세기 이후 고구려를 통하지 않고 직접 중국 문물을 배우려 함.

 

김영태, 한국불교사 개론, 경서원, 1988.

이정 편, 한국불교 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이하석, 삼국유사 현장기행, 문예산책, 1995.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 지식산업사, 1993.

홍법원, 불교학대사전, 1993.

 

정치 지도자나 사회 리더가 지나치게 형식화된 규칙이나 절차에 얽매이면 그 사회 분위기는 무거워지고 사람들의 삶이 멋과 흥을 잃게 된다.

민중이 절로 흥이 나려면 먼저 리더가 위선의 탈을 벗어야 한다. 딱딱한 절차와 규정에 얽매이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바람의 흐름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삶의 원리인 풍류를 아는 이라야 민중을 살리는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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