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인도행

[부산 5월 29일 금요일~ 30일 토요일] 선자령 풍차길, 오대산 선재길/ 1. 선자령

추연욱 2015. 5. 29. 09:22

 

 

 

 

[부산 5월 29일 금요일~ 30일 토요일] 선자령 풍차길, 오대산 선재길/ 1. 선자령

 

 

 

 

선자령에서

 

옛사랑, 신세계, 빈바다, 바니77, 처음, 바다와나, 새물결, 찬찬찬, 소영이, 나두, 엄지손, 마야,
돌하, 겨울맘, 여유롬, 수여니, 회림맘, 자리, 아공, 백일봉, 깊은산, 니가좋아,
내가좋아, 새처럼, 라일락, 훌랄라, 비나리, 빛들, 유비한, 해라, 포춘, 단비,
지혜, 느림보아,
달마루,

이렇게 35명이 함께 했다.

 

 

 

 

옛 영동고속도로 옛 대관령휴게소에 도착했다. 4시 45분.

5시간 하고도 15분이 더 걸렸다.

 

 

 

여명, 동쪽하늘이 밝아온다.

 

 

 

준비해온 아침밥을 먹는다.

 

 

 

 

 

 

 

 

 

여기서 먼저 아침밥을 준비, 밥상을 차려주신 분들께 고마움 전한다. 

특히 김치, 새로 담은 김치, 좀 오래된 김를 주신 옛사랑님께 감사드린다.

 

 

 

 

 

 

대관령 

 

申師任堂(1504~1551)은 38세 때 강릉 친정으로 와 어머니을 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곳 대관령에서

오죽헌 쪽을 바라보면서 홀로 계시는 늙으신 어머니을 그리며 이런 시를 지었다.

踰大關嶺望親庭

慈親鶴髮在臨瀛 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외로이 서울 길로 떠나는 이 마음

回首北坪時一望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 대관령(해발 832m)은 영동에서 영서로 넘나드는 고개이다.

서울 - 강릉을 동서로 횡단하여 - 삼척 - 평해로 이어지는 길을 관동대로라 한다. 문헌에는 평해대로라 하였다.

평해대로는 중종6년(1511)에 개설된 길로 지금의 대관령 옛길은 그 한 구간이다.

1917년에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옛 영동고속도로는 이 신작로를 확장한 것이다.

2001년 대관령 터널이 개통되었다.

 

지난날 엄청 붐비던 곳, 언젠가 새고속도로가 나고 이제 한산해졌다.

풍력발전소 발마개비만 쉼없이 돌아간다.

 

 

선자령 탐방로 입구에 왔다. 5시 50분.

 

 

 

 

 

 

 

 

 

 

 

 

 

 

 

 

 

 

 

 

 

 

 

 

 

 

 

 

 

 

 

 

 

 

 

 

 

 

 

 

 

 

 

 

 

 

 

 

 

 

 

 

 

 

갈림길, 6시 15분.

왼쪽 제궁골로 내려가면 국사서낭당,

오른쪽 오르막으로 가면 반정, 대관령박물관으로 이어지는 대관령옛길 2구간이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사작된다. 5시 25분.

 

 

 

 

 

 

 

 

 

 

 

 

 

 

 

 

 

 

 

 

 

 

 

 

 

 

 

 

 

 

 

 

 

 

 

 

저쪽 봉우리에 인공위성 발사대 비슷한 시설물이 모인다.

연넌에는 없었는데, 무슨 건물인지 의문이다.

 

 

 

 

 

 

 

 

 

 

 

 

 

 

 

 

 

전망대, 6시 40분.

 

 

 

 

 

 

 

 

 

 

 

 

 

 

 

 

 

 

 

 

 

 

 

 

 

 

 

 

 

 

 

 

 

 

 

 

 

 

 

 

 

 

 

 

 

 

 

 

 

 

 

 

 

 

 

 

 

 

 

 

 

 

 

 

 

 

 

 

 

 

 

 

 

 

 

 

 

 

 

 

 

 

 

 

 

 

 

 

 

 

우리 탐방로 주변 전체가 은방울꽃 군락지다.

아직 좀 덜 피었다.

 

 

 

 

 

 

 

 

 

 

 

 

 

 

 

 

 

 

 

 

 

 

 

 

 

 

 

 

 

 

 

 

 

 

 

 

 

 

 

 

 

 

 

 

 

 

 

 

 

 

 

 

 

 

 

 

 

 

 

 

 

 

 

 

 

 

 

 

 

 

 

 

 

 

 

 

 

 

 

 

 

 

 

 

 

 

 

 

 

 

 

 

 

 

 

 

 

 

 

 

 

 

 

 

 

 

 

 

 

 

 

 

 

 

 

 

 

 

 

 

 

 

 

 

 

 

 

 

 

 

 

 

 

 

 

 

 

 

 

 

 

 

 

 

 

 

 

 

 

 

 

 

 

 

 

 

 

 

 

 

 

 

 

 

 

 

 

 

 

 

 

 

 

 

 

 

 

 

 

 

 

 

 

 

 

 

 

 

 

 

 

 

 

 

 

 

 

 

 

 

 

 

 

 

 

 

 

 

 

 

 

 

 

 

 

 

 

 

 

 

 

 

 

 

 

 

 

 

 

 

 

 

 

 

 

 

 

 

 

 

 

 

 

 

 

 

 

 

 

 

 

 

 

 

 

 

 

 

 

 

 

 

 

 

 

 

 

 

 

 

 

 

 

 

 

 

 

 

 

 

  

 

 

 

 

 

 

 

 

 

 

 

 

 

 

 

 

 

 

 

 

 

 

 

선자령에 왔다, 7시 45분.

 

 

 

 

 

 

 

 

 

 

 

 

 

 

 

 

 

 

 

 

 

 

 

 

 

 

 

 

 

 

 

 

 

 

 

 

 

 

 

 

 

 

 

 

 

 

 

 

 

 

 

 

 

 

 

 

 

 

 

 

 

 

 

 

 

 

 

 

 

 

 

 

 

 

 

 

 

 

 

 

 

선자령(1,157m)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평창군 평창면, 도암면 횡계리 삼정평 사이에 있는 고개다. 옛날 대관령에 길

이 나기 전 나그네들은 선자령으로 영동과 영서를 넘나들 었다. 과거 삼양축산이 개발할 당시부터 삼정평이라 하였다.

선자령은 백두대간으로 영동과 영서가 나누어지는 분수계 중 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급경사, 서쪽으로는 완경사를 이루는 경계 지점이다. 북쪽의 곤신봉과 매봉에 이르는 서쪽 지역은 남한강 상류 송천이 시작되는 곳이다.

도암면 횡계리 삼양축산이 축산을 위해 백두대간에 이르는 산줄기까지 비포장도로를 개설하였다.

또한 선자령 일대에는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어 새로운 산업 및 관광자원으로서 부각되고 있는 자연 청정 지역이다.

 

 

 

 

 

 

 

 

 

 

 

 

 

 

 

 

 

 

 

 

 

 

 

 

 

 

 

 

 

 

 

 

 

 

 

 

 

 

 

 

 

 

 

 

 

 

 

 

 

 

 

 

 

 

 

 

 

 

 

 

 

 

 

 

 

 

 

 

 

 

 

 

 

 

 

 

 

 

 

 

 

 

 

 

 

 

 

 

 

 

 

 

 

 

 

 

 

 

 

 

 

 

 

 

 

 

 

 

 

 

 

 

 

 

 

 

 

 

 

 

 

 

 

 

 

 

 

 

 

 

 

 

 

 

 

 

 

 

 

 

 

 

 

 

 

 

 

 

 

 

 

 

 

 

 

 

 

 

 

 

 

 

 

 

 

 

 

 

 

 

 

 

 

 

 

매봉 갈림길, 8시 15분.

 

 

 

 

 

 

 

 

 

 

 

 

 

 

 

 

 

 

 

 

 

 

 

 

 

 

 

 

 

 

 

 

 

 

 

 

 

 

 

 

 

 

 

 

 

 

 

 

 

 

 

 

 

 

 

 

 

 

 

 

 

 

 

 

 

 

 

 

 

 

 

 

 

 

 

 

 

 

 

 

 

 

 

 

 

 

 

 

 

국사서낭당, 9시 30분.

 

 

 

 

 

 

 

 

 

 

 

 

 

 

 

 

 

 

 

 

 

 

 

 

 

 

 

 

 

 

 

 

 

 

 

 

 

 

대관사

 

 

 

 

 

 

 

 

 

 

 

 

 

 

 

 

 

 

 

 

 

 

 

 

 

 

 

 

대관사 앞에 함박꽃나무,

꽃이 활작짝피었다.

 

 

 

 

 

 

 

 

 

 

 

 

 

 

 

 

 

 

 

 

 

 

 

 

 

 

 

 

 

성황사

 

 

 

 

 

 

 

 

 

 

 

 

 

 

 

 

 

 

 

 

 

● 1603년(선조 36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하고 이를 기록한 내용이 許筠(1569~1618)의 문집 <惺所覆瓿藁 성소부부고>에 실려있다. 김유신은 어렸을 적에 이곳에 와 수련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칼은 명주(강릉) 남쪽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만에 완성되어 광채가 달빛 같았다. 장군이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평정했으며 죽어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 옛날 강릉 남문동 정씨 집안에 예쁜 딸이 있었다. 하루는 정씨의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그 집의 사위가 되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정씨는 사람이 아닌 귀신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 정씨의 딸은 대관령 서낭신의 사자인 호랑이에게 물려 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서낭당에 가보니 정씨의 딸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대관령 여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그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4월 15일에 서낭신을 여서낭사에 모셔가 제사를 올렸다.

이 행사는 지금도 강릉단오제 기간 중에 이루어진다.

 

산신당 뒤편에 칠성당과 용왕당이 있다.

 

● 梵日國師(810~889)는 성은 강릉 김씨, 이름은 品日이다.

학계에서는 범일의 家系를 金周元의 후손으로 보고 있다.

김주원은 신라 제38대 원성왕 김경신(재위 785∼798)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배한 후 명주(강릉)로 그 터전을 옮겨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 제37대 선덕왕 김양상(780~785)이 아들 없이 죽자 곧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시 김주원과 김경신은 상대등을 지낸 당대 최고 진골귀족이었다.

김주원은 당시 재상 가운데 제일 세력이 강했고, 김경신은 그 다음이었다. 김주원은 무리를 거느리고 왕궁에 행차해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北川]이 범람하여 왕궁에 이르지 못하였고, 이 틈을 타 김경신이 추대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김주원은 무열왕의 6세손이고, 김경신은 내물왕의 자손으로 왕통을 달리한다.

이로써 무열왕계는 끝나고 다시 내물왕계가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은 더 이상 경주에 머물 수 없어 명주로 낙향하였다. 명주는 그의 선대부터 경제적 연고권이 있었다.

명주는 오랫동안 고구려 영토였지만 5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는 명주 지역을 차지한 뒤 三直을 군주로 삼아 고구려 세력의 남하에 대비하였다. 6세기 초 지증왕 때에는 이사부가 성주로 파견되었고, 7세기 중엽 선덕여왕 때에는 소경을 설치하였으며, 무열왕 5년(658)에는 변경의 수비를 위해 북진이 설치되었다. 진흥왕이 황초령과 마운령까지 진출하게 된 것도 삼척 강릉 등 요충지를 미리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주에는 신라의 정예군이 일찍부터 주둔하였다.

지리적 ·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중앙정부에서는 명주의 김주원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김주원의 아들 김종기를 시중에 임명하고 타협을 모색하였다. 이후 김주원의 또다른 아들 김헌창과 김종기의 아들 김장여 역시 헌덕왕 때 연이어 시중을 지내며 신라 중앙 정치세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이유로 김주원은 787년 명주의 독자적 지배를 행사하는 명주군왕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성산면 보광리에 명주군왕릉이 있다.

 

범일의 아버지는 바로 그 김주원 집안사람이고, 어머니는 이 지역 토호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굴산에 살고 있는 한 처녀가 石泉에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속에 해가 떠 있어 그 물을 마시고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범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처음에는 品日이라고 했고 중이 되고는 범일이라 하였다.

 

15세 때 중이 되었다. 22세에 당나라로 유학하고 35세에 돌아온다. 굴산사를 창건하고 사굴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당시 경문왕, 헌강왕은 범일을 國師로 모시고자 했으나 모두 마다하고 40여년 굴산사에서 수도하고 제자를 키우며 강릉을 지켰다. 그 때문에 범일은 사후에 강릉지역의 토착신인 대관령국사서낭신이 되었다.

대관령 국사서낭사는 범일국사가 죽은 뒤 강릉과 영동지방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범일 국사를 서낭신으로 모신다.

 

■ 굴산사는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 있었다.

문성왕 9년(847) 범일 국사가 창건하였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이다.

창건 당시에는 강릉 일대에서 가장 큰절이었다. 지금의 학산리 전체가 절터였다. 절의 반경이 300m에 이르렀고, 승려가 200명에 달했으며 쌀 씻은 물이 동해까지 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이 어떻게 발전되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936년 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드러났는데, ‘門掘山寺’라 새겨진 기와가 발굴되어 굴산사라는 이름과 절의 면모가 확인되었다.

절터는 대부분 마을과 밭이 되었다. 범일국사의 부도(보물 제85호)는 마을의 한 편 언덕에 서 있고, 인근에 범일의 어머니가 물을 마셨다는 우물 石泉과, 마모가 심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이 남아있다.

 

 

굴산사터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그리고 그 높이가 5.6m나 되는 굴산사터 당간지주가 밭 가운에 우뚝 서있다.

굴산사터 당간지주(보물 제86호)

 

 

 

※ 강릉 단오제(중요 무형문화재 제13호)는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고 즐기는 제의로 그 역사가 천년이 넘는다. 향토 축제 중 아마도 그 규모가 가장 클 것이다.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2010년에는 6월 23일부터 25일까지 열렸다.

 

제의 절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음력 3월 20일 神酒(산신제와 국사서낭제에 쓸 제주)를 빚기를 시작해서,

2. 4월 5일 신목잡기(신목을 찾아 서낭신을 강신시키는 의식)

3. 4월 15일에 산신제와 국사서낭제를 지내고,

4. 4월 15일, 구산서낭제(국사서낭신을 여서낭신에게 모시는 도중 성산면 구산리 주민들이 올리는 제사)

5. 4월 15일 봉안제(국사서낭신과 여서낭신을 합사하는 제례)를 지낸다.

6. 5월 3일, 영신제와 영신행렬(국사서낭신을 단오장으로 모신다)

7. 5월 4~7일 조전제(서낭신을 모신 단오장에서 무당들이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열두 거리 굿을 행한다)를 지낸다.

8. 5월 4~7일 관노가면극을 벌이고, 5월 7일(단오제가 끝나는 날) 굿에 사용했던 물건을 모두 태운다.

 

대관령 산신제

 

 

 


 


 

 

 

 

여기가 강릉바우길 2구간, 반정, 대관령옛길로 가는 갈림길이다.

 

 

 

 

 

 

 

 

 

 

 

 

 

 

 

 

 

국사서낭당에서 대관령 옛휴게소까지는 포장길이다.

 

 

 

 

 

 

 

 

 

 

 

 

 

 

 

국사서낭당 입구에 왔다. 10시다.

5시 50분에 이곳을 지났다.

 

 

 

 

 

월정사 매표소 조금 아래

오대산 통일식당에 왔다. 10시 45분.

 

 

 

 

 

 

 

여기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입장료를 내고,

상원사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