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내가 없는 듯하여 돌아누워 빗소리 잃어버려라
고은
인간은 고독할 수 있을까.
고독이란 곧 감상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 고독 때문에 인간이 오랜만에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나의 해후가 실현된다.
날마다 인간은 누구와 스치고 누구와 흥정을 한다. 누구와 싸우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어디에 자신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제 호주머니를 뒤져 볼 만큼 자신과는 먼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간신문이 고독을 막고 깊은 밤에는 불면증 치료제 CM이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고독을막아 버린다. 그뿐이 아니다. 이제 텔레비전은 나이트클럽의 광란의 향락을 몰고 오며 오대산의 그윽한 숲속에서도 관광객은 고독을 쫓아 버렸다.
인간은 어느 시대보다도 자기 없는 시대에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무엇인가 돌아다볼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을 간과하고 만다.
인간은 도시화 규격화 기계화하는 환경에 의해서 조종받고 있다. 그것은 혼과 관련되는 일을 없앤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괴뢰로서 인간은 문명적인 몰락을 겪고 있다.
그러나 어느날 인간은 인간 자신과 소스라치게 만난다. 전혀 예기치 않았을 때 문득 찾아오는 손님이 바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며 그것은 근원적인 모습이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병을 앓아 누웠을 때. 난데없는 충격 때문에 모든 일상이 흔들릴 때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서 숙직당번처럼 자신을 지킨다.
이런 시대라도 반드시 인간에게는 고독이 찾아온다. 그것은 인생에 단 몇번의 고독일지도 모른다.
그 고독과 자기 자신 사이에 일어난 일은 이제까지 없었던 깊은 혼의 모습으로서 살아난다.
너무나 오랜만에 자신과 만났기 때문에 그 만남은 오히여 허무에 가깝다.
세계에 아무것도 없고 저 혼자 있다는 영혼적 체험 속에서 자신조차 잊어버릴 수 있는 경지가 있는 것이다.
밖에서는 빗소리가 멀어지면서 들러온다.
고은, <고은 전집 13 세노야 세노야>, 청하,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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