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
임종성
내가 노래하고 싶을 때
山은 새를 날려 보낸다
내가 스스로 높아지려 할 때
山은 낮게 낮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려 준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山은 꽃으로 보여 주고
내가 소리치고 싶을 때
山은 바위로 말해 주고
내가 바라는 것을
山은 우뚝 솟은 봉우리로 대신해 준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말
임종성
내 가슴에
묻히지 않는
나의 말은
쭉정이일 뿐
아무리 물을 주고
흙을 덮어 주어도
내 마음에
묻히지 않는
나의 말은
죽은 뿌리일 뿐
아침 공기를 뚫고
벽을 넘어도
내 마음에 묻히지 않으면
부서진 잎일 뿐
나의 말이 네게 닿기만 하면
꽃이 되련만
꽃이 되어
향기를 피우련만
언제나 나의 말은
바람을 거슬러
네게로 간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바람이 되어
임종성
날이 새면 나는
바람이 되어
넓고 환한 들판으로 나가야겠다.
떠도는 산새와
쓸쓸한 풀잎.
언 땅 위에 드러난 나무 뿌리
잊혀지고 버려진 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고 싶다.
아아 겨울이 오면
아이들 나라로 떠나야겠다.
첫눈을 맞으며
신나게 꿈꾸는 鳶을 데리고
키 큰 상수리 나무 끝.
빈 하늘을 흔들며 날아야겠다.
허나 내가 진작 바람이 될 수 있다면
너의 純金 땀방을을
부드럽게 부드럽게 닦아 주겠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저녁
임종성
날이 저문 뒤에도
이곳의 들판은 혼자 남아 있다
어둠은 마을로 뻗은 길을 덮고
아무 것도 기다릴 것이 없는 자갈
흙 속에 차가운 알몸을 묻는다.
억새풀은 떨면서
저희 뿌리끼리 따뜻이 얽혀 있다
돌보아 주지 않아도
안으로 돋아나는 억센 힘
어둠을 떨치면서 아침 속으로 줄기를 뻗는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갈대
임종성
바람이 와도
물러나지 않고 서서
더 큰 바람이 와도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서서
무릎을 꿁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다짐하면서
빈 들판에 홀로 나와
새벽 빛을 기다리고 있다.
갈대는 바람에 쓰러져 떨고
일어나
그 바람을 떨침으로
힘있게 앞으로 나아간다.
펄럭이는 눈 앞의 길을 바라보면서
튼튼한 뿌리 한 가닥
차가운 흙 속에 묻고
꿈을 꾼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물소리
임종성
우리는 나아 간다
서로 서로 손을 잡고 간다
내 얼굴의 그늘은
네가 지우고
네 얼굴의 그늘은
내가 지우면서 우리는
어께를 맞대고 나아간다..
땀과 눈물로 깊은 강에 흘러 넘치면서
서로 서로 흠뿍흠뿍 젖으면서
가슴에 가슴을 열고
빰에 뺨을 부비면서
낮은 곳에
남아서
더 낮은 곳을 바라며 우리는
멀고 먼 곳을 나아간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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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임종성
날이 새면
약한 나무 줄기에
실한 가지 달아주고
상한 줄기에는
새끼 동여매어 주고
잎이 떨어진
빈 자리에
새잎 붙여 주고
꽁지 빠진 새에게도
새 깃털 묻어 주고
알 속의 어린 새에게도
새 부리 내어
하늘 끝에 날려보내 주고 싶어
아아 날이 새면
낯선 길 위
울음 우는 아이
눈물 딲아 주고
흰눈 내리는 들녘에서
아이를 따라
신나게 鳶도 날려 보고 싶어
바람 세고
흐린 날은 더욱
아이들의 가슴마다
환한 꽃을 달아 주고 싶어
눈물 글썽글썽
찬 손도 따습게 어루만져 주고 싶어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안개 숲
임종성
자욱한 안개에
숲 속의 모든 길이 무너져 가라앉는다
개울물에
풀벌레 소리는 흐드득 후드득 젖고
비탈길에서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나는
흐르지 못하는 잎
불현듯
산등성이 쪽으로 쏠려가는 바람 소라
닫힌 산문 더 굳게 닫히고
성냥 불빛을 일으켜
숲 길은 울안을 밝힌다
안개는 내 눈을 덮고
그 안개 속에 나는
한 점 물빛으로 쓰러진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혼자 남아서
임종성
혼자 남아
바람을 밀어내는 깃발로 서서
깃발에 솟아오르는 아침 공기로
공기 속에 자라는 나무로 서서
나무 속을 타고 오르는 물줄기로 서서
별을 본다
우뚝 선 벽을
햇빛으로 닦고 닦아서
물빛처럼 고운
거울로 다듬어서
별을 본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못
임종성
당신이 내 가슴에 박은 못들
날마다 뼛속 깊이 파고드네요
이렇게 내 안에 묻혀 녹스는 못들
얼른 뽑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고
아픔을 참을 수 없어서는 아니지요
그 못들 마저 없애면
내게 남은 당신의 흔적이 죄다 지워지기 때문이지요
청옥문학예술인협회편, <청옥문학>, 2014, 가을호
재회
임종성
기차에서 내려
내가 그 사람 앞에 섰다.
나는 그가 차린 식탁에서
그의 마음 몇 종지기를 먹고는
종착역을 향해 길을
다시 나섰다
그 뒤 한 차례
나는 기차에서 내렸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롱대롱
내 속눈썹 끝에 해와 달이
번갈라 매달리고 저물고
사르륵 사르륵
눈꽃의 화음에 귀를 맡기는 저녁
내가 기차를 타고
나뭇잎 같은 차창 밖
그가 사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더니
그는 혼자 대합실 가장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옥문학예술인협회편, <청옥문학>, 201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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