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시집

임종성/ 산, 말, 바람이 되어, 저녁, 갈대, 물소리, 겨울날, 안개 숲, 혼자 남아서

추연욱 2014. 1. 16. 21:52

 

 

 

임종성

 

내가 노래하고 싶을 때

山은 새를 날려 보낸다 

 

내가 스스로 높아지려 할 때

山은 낮게 낮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려 준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山은 꽃으로 보여 주고

 

내가 소리치고 싶을 때

山은 바위로 말해 주고

 

내가 바라는 것을

山은 우뚝 솟은 봉우리로 대신해 준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임종성

 

내 가슴에

묻히지 않는

나의 말은

쭉정이일 뿐

 

아무리 물을 주고

흙을 덮어 주어도

내 마음에

묻히지 않는

나의 말은

죽은 뿌리일 뿐

 

아침 공기를 뚫고

벽을 넘어도

내 마음에 묻히지 않으면

부서진 잎일 뿐

 

나의 말이 네게 닿기만 하면

꽃이 되련만

꽃이 되어

향기를 피우련만

 

언제나 나의 말은

바람을 거슬러

네게로 간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바람이 되어

 

임종성

 

날이 새면 나는

바람이 되어

넓고 환한 들판으로 나가야겠다.

 

떠도는 산새와

쓸쓸한 풀잎.

언 땅 위에 드러난 나무 뿌리

잊혀지고 버려진 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고 싶다.

 

아아 겨울이 오면

아이들 나라로 떠나야겠다.

 

첫눈을 맞으며

신나게 꿈꾸는 鳶을 데리고

키 큰 상수리 나무 끝.

빈 하늘을 흔들며 날아야겠다.

 

허나 내가 진작 바람이 될 수 있다면

너의 純金 땀방을을

부드럽게 부드럽게 닦아 주겠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저녁

 

임종성

 

날이 저문 뒤에도

이곳의 들판은 혼자 남아 있다

어둠은 마을로 뻗은 길을 덮고

아무 것도 기다릴 것이 없는 자갈

흙 속에 차가운 알몸을 묻는다.

 

억새풀은 떨면서

저희 뿌리끼리 따뜻이 얽혀 있다

돌보아 주지 않아도

안으로 돋아나는 억센 힘

어둠을 떨치면서 아침 속으로 줄기를  뻗는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갈대

 

임종성

 

바람이 와도

물러나지 않고 서서

더 큰 바람이 와도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서서

무릎을 꿁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다짐하면서

빈 들판에 홀로 나와

새벽 빛을 기다리고 있다.

 

갈대는 바람에 쓰러져 떨고

일어나

그 바람을 떨침으로

힘있게 앞으로 나아간다.

펄럭이는 눈 앞의 길을 바라보면서

튼튼한 뿌리 한 가닥

차가운 흙 속에 묻고

꿈을 꾼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물소리

 

임종성

 

우리는 나아 간다

서로 서로 손을 잡고 간다

 

내 얼굴의 그늘은

네가 지우고

네 얼굴의 그늘은

내가 지우면서 우리는 

어께를 맞대고 나아간다..

 

땀과 눈물로 깊은 강에 흘러 넘치면서

서로 서로 흠뿍흠뿍 젖으면서

 

가슴에 가슴을 열고

빰에 뺨을 부비면서

 

낮은 곳에

남아서

더 낮은 곳을 바라며 우리는

멀고 먼 곳을 나아간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물소리

 

임종성

 

우리는 나아 간다

서로 서로 손을 잡고 간다

 

내 얼굴의 그늘은

네가 지우고

네 얼굴의 그늘은

내가 지우면서 우리는 

어께를 맞대고 나아간다..

 

땀과 눈물로 깊은 강에 흘러 넘치면서

서로 서로 흠뿍흠뿍 젖으면서

 

가슴에 가슴을 열고

빰에 뺨을 부비면서

 

낮은 곳에

남아서

더 낮은 곳을 바라며 우리는

멀고 먼 곳을 나아간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겨울날

 

임종성

 

날이 새면

약한 나무 줄기에

실한 가지 달아주고

상한 줄기에는

새끼 동여매어 주고

잎이 떨어진

빈 자리에

새잎 붙여 주고

꽁지 빠진 새에게도

새 깃털 묻어 주고

알 속의 어린 새에게도

새 부리 내어

하늘 끝에 날려보내 주고 싶어

 

아아 날이 새면

낯선 길 위

울음 우는 아이

눈물 딲아 주고

흰눈 내리는 들녘에서

아이를 따라

신나게 鳶도 날려 보고 싶어

바람 세고

흐린 날은 더욱

아이들의 가슴마다

환한 꽃을 달아 주고 싶어

눈물 글썽글썽

찬 손도 따습게 어루만져 주고 싶어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안개 숲

 

임종성

자욱한 안개에

숲 속의 모든 길이 무너져 가라앉는다

개울물에

풀벌레 소리는 흐드득 후드득 젖고

비탈길에서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나는

흐르지 못하는 잎

 

불현듯

산등성이 쪽으로 쏠려가는 바람 소라

닫힌 산문 더 굳게 닫히고

성냥 불빛을 일으켜

숲 길은 울안을 밝힌다

안개는 내 눈을 덮고

그 안개 속에 나는

한 점 물빛으로 쓰러진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혼자 남아서

 

임종성

 

혼자 남아

바람을 밀어내는 깃발로 서서

 

깃발에 솟아오르는 아침 공기로

공기 속에 자라는 나무로 서서

 

나무 속을 타고 오르는 물줄기로 서서

별을 본다

 

우뚝 선 벽을

햇빛으로 닦고 닦아서

 

물빛처럼 고운

거울로 다듬어서

별을 본다.

 

임종성 시집, <땅뺏기>, 詩路 1983.

 

 

 

 

 

임종성

 

당신이 내 가슴에 박은 못들

날마다 뼛속 깊이 파고드네요

 

이렇게 내 안에 묻혀 녹스는 못들

얼른 뽑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고

아픔을 참을 수 없어서는 아니지요

 

그 못들 마저 없애면

내게 남은 당신의 흔적이 죄다 지워지기 때문이지요

 

청옥문학예술인협회편, <청옥문학>, 2014, 가을호

 

 

재회

 

임종성

 

기차에서 내려

내가 그 사람 앞에 섰다.

 

나는 그가 차린 식탁에서

그의 마음 몇 종지기를 먹고는

종착역을 향해 길을

다시 나섰다

 

그 뒤 한 차례 

나는 기차에서 내렸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롱대롱

내 속눈썹 끝에 해와 달이

번갈라 매달리고 저물고

사르륵 사르륵

눈꽃의 화음에 귀를 맡기는 저녁

 

내가 기차를 타고

나뭇잎 같은 차창 밖

그가 사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더니

 

그는 혼자 대합실 가장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옥문학예술인협회편, <청옥문학>, 201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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