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문화유산 답사자료

화양구곡

추연욱 2013. 10. 28. 12:10

 

 

화양구곡

 

 

화양구곡은 화양천 맑을 물을 끼고 산 속으로 10리쯤 뻗어있다.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로 들어와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불러들였다.

스스로를 朱子라 생각했던 그는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따 화양계곡의 경치가 빼어난 곳에 이름을 붙이고 華陽九曲이라 했다.

입구에서부터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1곡부터 9곡이 펼쳐진다.  

 

 

 제1곡은 擎天璧이다.

탐방안내센터에서 진입도로 쪽으로 250m쯤 떨어져 있다.

주차장 옆으로 흐르는 화양천 건너편에 우둑한 바위벽이다. 

차로 가면 대개 지나친다. 지금은 넓은 주차장이 생겨 가까이 갈 수 없다.

경천벽 아래쪽에 송시열이 쓴 "華陽洞天"이란 글씨가 있다.

 

 

 

서낭당

 

  

 

2004년 10월 31일 

 

 

 

만동묘

 

 

 

화양서원 묘정비

 

 

 

이 비석은 화양서원의 건립 취지와 향사하고 있는 송시열 선생을 추앙하는 뜻을 기록한 것으로 숙종 42년(1710)에 세워졌다.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고, 안진경의 글자를 모아 만든 비이다.

그러나 고종 7년에 서원이 헐리면서 이 비석도 땅 속에 묻히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 묘정비를 다시 세우고,

1980년에는 그 옆에 한글로 된 해설비를 세웠다.

화양서원은 숙종 22년(1696)에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세워지고, 사액되었으며 숙종 42년(1716)에 어필 편액을 달았다. 그러나 이곳의 유생들이 오만하여, 소위 화양묵패의 폐단으로 철종 7년(1858)에 철폐당하고,

고종 7년에는 헐리어 없어졌다.

    

 

화양서원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재집권하면서 송시열의 관작회복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사우의 건립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다.1695년 수원의 매곡서원과 정읍의 효암서원을 시작으로 각지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과 사우가 건립되었다.이후 송시열을 배향하는 서원과 사우는 39개가 건립되었다. 화양서원은 숙종 22년(1696) 화양동 밖 만경대에 세워졌다가 1709년 화양동 안쪽 현재의 장소로 옯겼다.화양서원은 송시열 한 사람만 제향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화양서원의 세력은 노론의 정치적 위상의 변화에 따라 오르내렸다.영조때는 노론 일당의 전제가 이루어지고,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그 위세가 더욱 높아졌다.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등을 지원받았고, 노론관료나 유생들이 기증한 토지들이 강원도와 삼남 일대까지 펼쳐져 있었다.이렇게 권력이 막강해지자 화양서원은 점차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만동묘

민정중이 중국으로 가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제17대 숭정제 의종(1627~1644 재위)의 "非禮不動"이라 쓴 친필을 받아왔는데,

송시열이 이를 얻어 화양동 절벽에 새기고, 그 아래 운한각을 지어 원본을 보관하였다.

송시열은 의종의 사당을 지어 제사지냈다.

 

송시열 사후 권상하 등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숙종 30년(1704) 화양서원 안에 만동묘를 짓고,

의종과 조일전쟁 때 원병을 보낸 제14대 황제 만력제 신종(1572~1620 재위)을 제사지냈다.

"萬東"은 선조의 어필 중 "萬折必東"의 '萬'자와 '東'자를 땄다. 

"만절필동"은 '모든 강물은 꺾이고 꺽여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 항상 중국의 힘은 동방의 조선을 옹호한다,

중국의 정통과 교화가 조선으로 모아진다'는 뜻이다.

 

영조 2년(1706)에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었고, 그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을 보내 돌아가며 묘우를 지키게 했다.

정조 즉위 후에는 어필 사액을 받았고, 순조 때는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었으며,

헌종 때는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관찰사가 정식으로 제사지냈다. 

 

1865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1873년 부활되었다.

대보단과 만동묘는 대표적인 사대 모화의 상징물이다. 

  

만동묘는 1710년 화양서원과 합쳐진 후로 尊周의 대표적인 장소로 군림하였다.  

해마다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의 유생 수천 명이 모여 들었고,

1년 내내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유생들의 집합소가 되면서 폐단이 극심했다.    

 

송시열의 문인들이 이 제사를 국가적 차원으로 승격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대신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보단을 설립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만동묘에서는 여전히 황제의 제사를 지냈고, 조정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송시열이 갖는 학문적 · 정치적 영향으로 가장 권위있는 세력으로 집단화하였다.  

화양서원은 제수비용을 내라는 명목으로 각 고을에 華陽墨牌라는 것을 발행하여 수령과 양민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거기에 응하지 않는 수령은 통문을 돌려 축출하자는 공론을 일으켰다. 또 봄 가을 향사 때 유생을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복주촌을 운영하고 양민의 재산을 거둬들이면서 잘 따르지 않는 사람은 서원으로 잡아들여 사형을 가하기도 했다.

묵패란 본디 서원 업무를 관리하기 위해 검은 도장을 찍어 발행하는 공문서인데. 여기서는 협박장이 되었다.

양민들은 정부의 세금보다 화양묵패를 더 무서워했다 한다. 

 

고종 2년(1865) 나라에서 서울의 대보단에서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니, 따로 제사할  필요가 없다 하여 만동묘를 폐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실권한 후 재건되었으나, 순종 1년(1907) 일본 통감이 만동묘를 폐하고 재산을 국가와 지방관청에 귀속시켰다.

일제강점기에도 비밀리에 제사는 계속되었으나 1940년부터 아주 끊겼으며, 1942년에는 건물도 철거되었다. 

  

大報壇

숙종 30년(1704) 창덕궁 금원 옆에 대보단을 세워,

명나라 시조인 태조, 조일전쟁 때 원병을 보내준 신종,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지냈다.

이것은 국가의 공식행사였다.

대보란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대보단은 북벌정책의 출구전략이다.

물론 처음부터 불가능하지만 당시 국가의 중요 정책이었다.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북벌정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명마라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실패한 정책의 책임을 벗어나려 했다.  

연남 박지원은 송시열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옛날 우리 선왕에게는 또 임금이 있었는데, 大明 천자가 우리 임금이다.

선왕에게는 신하가 있었는데, 시열 英甫(송시열의 자)였고,

천자에 충성함이 그 임금에 충성함과 같았다.

선왕에게는 원수가 있었는데, 오직 저 建州衛(청나라의 전신)라, 어찌 내 사사로운 원수이랴, 큰 나라의 원수이지.

 

<연암집>, 어사초구기  

 

 

 제2곡 雲影潭

 

   

 

  

 

  

 

제3곡 泣弓岩

송시열이 돌아간 효종을 기려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 이 바위에 올라 서울 쪽을 향해 업드려 통곡했다 한다.

읍궁암이라는 이름은 순임금이 죽은 후 신하가 칼과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비롯한다. 

 

 

제4곡 金沙潭물 아래 모래가 금가루 같다 해서 금사담이란 이름을 얻었다.

 

  

 

 

암서재는 송시열의 서재이자 별장이다.

 

  

 

 

"시냇가 바위벽 열리어 그 사이 집 한 칸을 지었네.

고요히 앉아 성인의 가르침을 받들어 한치라도 더위 잡고 올러보려네."

 

 

 

암서재 앞 바위벽에 ‘忠孝節義’니 ‘蒼梧雲斷 武夷山空’ 등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충효절의"는 명나라 태조의 글씨라 한다.

창오산은 예로부터 중국에서 임금들의 무덤이 있는 산으로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산이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 청이 서던 상황을 송시열 입장에서 절박하게 표현한 말이다.

"무이산공"은 주자학의 맥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송시열 초상화(국보 제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5곡 첨성대

 

 

 

 

  

바위벽에 쓰여있는 "大明天地 崇禎日月"은 송시열의 글씨이고,

"玉藻氷壺"는 명나라 신종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옥조'는 임금의 면류관에 달았던 옥을 뜻하며 '빙호'는 얼음을 넣는 항아리로 이는 임금이 깨끗하고 정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萬折必東"은 선조가 조일전쟁 후에 쓴 글씨로 가평의 조종암에 새겨진 것을 배껴온 것이다.

중국의 강물이 만번 돌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의리 사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非禮不動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아니한다"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다.

조선 숙종 때 판서 閔鼎重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의종의 친필 “非禮不動 ”이란 넉 자를 얻어와 송시열에게 주니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동 첨성대 아래 암벽에 새겨놓고 紙榜을 사용하여 신종과 의종 두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

원본은 운한각이란 전각을 지어 보관했다.  

그뒤 권상하가 그 유지를 받들어 부근의 유생들과 함께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이어 ‘국가적인 행사로 격상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켜 조정에서 왕이 참석한 가운데 이 문제를 논의 하였다.

 

그리하여 1704년 3월 19일, 의종의 60주년 기일을 맞아 단을 만들고 지금까지 행하던 단헌례를 삼헌례로 변경하였다.

단의 규모는 우리나라 太廟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사직단에 준하여 설치하고 南郊의 예에 따르기로 하였으며 祭日은 중국 황제가 정기적으로 東巡하는 시기인 2월로 정하고,

제물과 제기는 명나라의 의식에 따르며, 옷과 희생물[黃牛]은 우리나라 예에 따르기로 하였다.

또 이후부터 ‘숭정’의 연호를 쓰기로 하고 제기 등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기로 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大報壇事筵說>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 대보리 대보단 입구에는 궁전이나 능의 앞에 세우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조종천과 조종암
 조종천은 경기도 가평군 하면 상판리에서 발원, 동남쪽으로 흘러 북한강에 들어간다.
 조선 숙종 10년(1684) 당시 가평군수를 지낸 李齊杜와 명나라 사람 許格, 白海明 등이 가평군 하면 대보리 조종천변에 위치한 한 바위에 글을 새겨 朝宗巖이라 했다.
  
    


바위 맨 위에 “思無邪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라 썼다.

이 글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제17대 숭정제 의종(1627~ 1644)의 글씨를
허격이란 사람이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아래로 선조의 친필 “萬折必東 再造藩邦 일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녘으로 흐르니,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찾아 주었네”란 말을 새겼다.
   

밖에도, 
효종이 우암 송시열(1607~1689)에게 내린 글 가운데 여덟 글자 “日暮途遠 至痛在心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을 송시열의 서체로 새기고,

 선조의 친손자 朗善君 李俁의 글씨 “朝宗巖(명나라 임금을 뵙는 바위)” 세 글자를 새겼다.
 새겨진 글들은 조일전쟁 때 명나라가 베푼 은혜를 잊지 말고, 조청전쟁 때 청나라로부터 당한 굴욕을 되새기자는 崇明排淸 사상과,
‘청나라를 쳐서 명나라의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북벌의 기회는 오지 않고 오히려 청나라에 명나라가 망해서 그 아픔이 크다.’는 내용이다.  옆에 이러한 유래를 적은 記實碑도 세웠다.
비석은 별도의 기단 없이 자연 암반에 세웠다. 비문은 趙鎭憲이 짓고, 金達淳이 섰다.
이곳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나라에 반기를 들어 혁명을 꽤하다가 실패하여 조선으로 망명한 왕미승, 정선갑 등 아홉 사람이 조선에 귀화하여 이곳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가평군지>에 따르면 이곳 조종암에 단을 만들고 명나라 의종황제가 죽은 3월 19일에 제사를 지내면서 조종암과 大報壇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대보리라 했다.

 대보단은 본디 숙종 30년(1704) 예조판서 閔鎭厚라는 사람의 발의로 창덕궁 후원에 설치하여, 조일전쟁 때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견한 명나라의 태종, 신종, 의종을 제사지낸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바위 앞을 흐르는 냇물 이름을 조종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朝宗이란 말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
여러 강물이 흘러 바다에 모인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조종천이란 이름은 朝宗縣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태조 23년(940) 이 지역에 朝宗縣을 설치하면서, 이곳을 흐르는 내를 조종천이라 하였을 것이다.

화양구곡의 만동묘와 함께 모화사상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당시 조선의 정신은, 이미 없어진 명나라에 정복당해고 있었으며 국력을 키우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나 허약하였다.

 조종천은 경기도 가평군 상면 덕현리의 조종천계곡은 운악산과 명지산에서 흘러내려 온 계류가 합쳐져 남쪽의 북한강 청평댐으로 흘러들어 가는 계곡이다.

  
 

 

제6곡은 凌雲臺

바위가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다는 뜻이다.

 

 

 

 

제7곡은 와룡암

길게 누운 바위 위에 솥바닥 같은 구멍이 파여있다.

"臥龍岩"이란 글씨는 민진원이 썼다.

 

  

 

 

 

 

 

여기서 제법 올라간 곳에,

제8곡 학소대가 있다.

옛날 여기 푸른 학이 깃들어 새끼를 길렀다고 한다.

 

  

 바위 갈색으로 물든 곳에 鶴巢臺라 쓰여있다.

 

   

 

제9곡은 파천은 협곡에 있는 희고 매끄러운 바위다.

 

  

 

 

巴串 파천

 

   

 

1674년 제2차 예송으로 송시열은 9개월 복의 대공설을 주장하여 실각하고, 1679년에는 거제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조정에 출사한 후 송시열은 숙종에게 大老라는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1682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질 때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가 된다. 

 

숙종 15년(1689) 1월,

숙종은 소의 장숙정의 아들 畇을 원자(뒤의 경종)로 정한다는 분부를 내리자 노론은 즉각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중전이 아직 젊으니 때를 기다리자"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반대 의견를 억누르고 왕자 畇을 원자로 지정하고,

장소의를 중전 다음 품계인 禧嬪으로 승격시켰다. "소의, 빈"은 내명부의 품계로 소의는 정2품, 희빈은 정1품이다. '빈'은 왕세자의 아내와 같은 품계인데 '희빈'은 '빈'의 품계를 받은 장씨의 특별 호칭이다.

 

화양동에 살고 있던 송시열은 전면에 나서 반대했다.

숙종은 이미 결정된 사실을 가지고 시비를 벌인다며 불쾌해 했고, 남인과 소론은 송시열을 공격했다.

숙종은 이 일을 계기로 노론을 제거하려 한 듯하다. 

 

이 과정에 노론의 핵심 인물이었던 송시열은 제주도에 위리안치하였다.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압송되는 도중 사약을 받았다.

김수항 등이 사형을 당한다.

 

숙종은 또 인현왕후를 폐비시켜 궁중에서 내쫓았다.

남인을 등용하여 남인이 다시 집권한다. 

이 사건을 己巳換局이라한다.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도 숙종 20년(1694) 왕이 마음을 바꾸어 페위된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남인과 연결된 장희빈을 사사하게 되자 5년 만에 다시 몰려나게 되고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 한다.

이 사건을 甲戌換國이라 한다. 이때부터 남인은 거의 재기불능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서인이 재집권하자 송시열의 관직 회복이 이루어지면서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사액서원만도 37개에 이르렀다.

송시열의 문인인 권상하 등 유생들이 세운 화양서원은 대표적인 서원으로 노론 사림의 중심이 되었다.

 

숙종 20년부터 46년에 이르는 동안 권력은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오갔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은 전세계적으로 소빙기라 불리는 냉해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잇단 흉년과 홍수, 질병으로 인구는 줄어들어 1693년에서 1699년 사이 약 142만 명의 인구 감소 현상이 일어났다.

숙종 23년(1697)에는 10여 년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약해 오던 장길산 농민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서 서북지방은 어수선했고, 서울에서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부대와 연결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다가 발각되는 일도 있엇다. 

  

  ※ 예송
 1659년 5월 조선 제17대 왕 효종(1649~1659 재위)이 죽자,
慈懿대비 조씨의 상복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논쟁이다.
효종은 임금이었지만 맏아들이 아니었고, 자의대비는 인종의 둘째 왕비로 효종의 계모뻘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옛 스승이던 송시열(1607~1689)을 이조판서로 등용하였다.
허목(1595~1682)은 효종이 내린 벼슬을 여러 번 고사하다가 1657년 持平이라는 언관의 벼슬을 받았다.

권세력이었던 서인인 송시열등은 기복년(1년)을, 남인 계열인 허목은 3년복을 주장하였다.
효종은 맏아들이 아니었고 그의 형인 소현세자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자의대비는 효종의 계모지만 계모라도 맏아들이 죽으면 3년 상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은 맏아들이 아니므로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서인의 주장이었다.
 
임금으로서의 宗統이니 효종을 맏아들로 여겨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남인의 주장이다.
 이 논쟁의 이면에는 왕위 계승의 원칙인 종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과의 이념논쟁에다.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자격문제에 대한 시비가 깔려있다.

또 서인은 왕실도 사대부와 동격으로 보아 사대부 중심의 국가 체재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에 반해 왕이라는 점을 중시해서 장자로 보자는 남인의 주장은 왕실중심의 체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윤선도는 훗날 송시열이 국가의 종통을 부정하였다고 하였다.
 
宗法에 대해서는 <주자가례>에, 어머니는 장자가 죽으면 3년, 차자는 1년 상복을 규정하고 있으며,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에는 장자, 차자 모두 1년 상복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었다. 그뒤 몇차례 이런 논쟁을 벌여 정치투쟁으로 이어졌다.
 
제18대 현종(1659~1674 재위)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또다시 문제가 일어났다.
서인들은 9개월복으로 결정했다. 이에 남인들은 지난번과 맞지 않는다고 들고 일어났다.
현종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남인의 주장대로 1년복으로 결정했다.
이로써 당시 삼척부사로 좌천당해 있던 허목은 다시 조정에 나와 대사헌,
이조판서가 되었고 송시열은 유배의 몸이 되었다.
 
남인이 권력을 쥐자 또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송시열의 처벌을 놓고 강건론과 온건론으로 갈라졌다. 당시 숙종은 남인들이 너무 설친다고 생각하여 남인 일파를 견제하였다. 다시 조정은 서인들의 것이 되어 송시열은 귀양에서 풀려났다. 당시 허목은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송시열이 등장하자 남인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 온건파의 감정이 대립되어 서인은 노론(송시열이 영수)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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